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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정사 지조암 돈수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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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삼소 - 김영옥 1999년 07월 209호
안동시 서후변 봉정사, 일주문 앞에서 왼쪽으로 난 길을 내처 짚어 가면 지조암은 멀지 않다. 주위로 참나무가 유난히 많고, 맑은 토담이 야트막히 둘러쳐진 맞배집 지조암, 하늘을 배경으로 그려 놓은 잎선이 몽글몽글하나 수령이 만만찮은 것임을 알겠는 적송들이 암자를 뒤받치고 있다. 토담 아래로는 맑게 갈아 놓은 밭들이 보는 사람 마음을 따뜻하게 데운다.
열린 나무 문 안으로 들어가 돈수스님을 찾으니 보살님 한 분께 좁은 도량끝을 가리킨다.
해우소뿐, 희게 회칠한 벽으로 가로막힌 곳이라 잠시 어리둥절해지는데 그 끝에 주춤추춤 다가가니 아래쪽으로 휘어둘리어 난 소롯길이 있었다. 석류나무, 오죽 등이 섞인 가운데, 키를 넘게 자라는 시누대가 납작한 우거를 삼켜 버린 곳, 남탑산방, 지조암에서 동쪽도 남쪽도 아닌 향이니 남쪽은 실다운 뜻이 없고, 중이 사는 곳이나 그저 탑이라고 편하게 붙언 이름이라 했다.
오늘 그를 성가시게 하는 객들은 문지방을 넘어 방으로 들어서기는 했다. 그러나 아직 무문관의 흔적이 역력한 곳이다. 천리 길 마다 않고 찾아온 도반이 그 벽에 숙연해져서 돌아서 버린 곳, 일 주일만큼씩 쌀을 들여보내 주되, 그 때에 먼저 넣어 준 쌀이 그대로 있으면 죽은 줄 알라며 문을 없애고 면벽하기를 수 삼 년, 아직도 방의 창이 모두 창호지와 유리로 막혀 있는 채로인 것은 그때의 흔적이리라. 파기와나 자연석에 얹히어 자라는 난들은 그가 혼자 보낸 시간의 흔적이리라
무문관의 없던 문을 열고 그는 오늘 나와 있다. 땅 위 하늘 아래, 그리고 초목 사이를 넘나드는 바람 속에 그저 있다. 그러나 달라진 바 있겠는가. 그가 스스로 갇혔던 공간, 그 공간을 만들어 주던 벽이 애초에 있기는 했는가. 분별 없는 사람들의 쓸데없는 분별이다. 그 때를 짚어 보니 지천명의 으름이었다.
그는 요즘 국화꽃 농사를 짓는다. 밭을 갈고 김을 매는 일은 단순해서 화두 들기에 맞춤했다. 그리고 지난 겨울에는 그림과 함께 엮어질 책 한 권 분량의 글도 썼다. 화두 만들던 머리를 짜내려니 보통 일이 아니더라 했다. “차의 맛은 텅 빈 골짜기처럼 고요하다.” 책이 나오면 제목이 될 구절이다. 그것을 화제로 삼고 그리어 그의 방 벽에 붙여 둔 것, 굵은 먹선의 척량골이 유난히 도드라지는 수염 긴 노승은 면벽 구 년의 달마인지도, 무문관에서 나왔다고는 하나 아직도 제 속에 없지 않을 벽 하나 둔 채로 화두를 들고 있는 자신인지도 알 수 없다.
그가 짓는 국화꽃 농사는 꽃을 위한 것이 아니고, 그 꽃으로 차를 만들기 위해서이다. 금국, 그가 토종 국화인 조선감국으로 개발해 낸 국화차의 이름이다. 중국과 일본에는 국화 꽃잎차가 없지 않으나, 국내에서는 상품으로 유통된 최초의 사례이다. 꽃의 크기나 빛깔, 그리고 보존 상태 등 외양으로도 수입되고 있는 것에는 견줄 바가 아니고, 차인들로부터 차의 맛도 훨씬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무엇보다 수입 국화차는 유통 가능 기간으로 보아 처리 방법 면에서 미덥지 못한 점이 있어 그가 만든 차는 더욱 돋보인다.
국화 농사 삼 년 만인 지난해에 그가 생산한 국화차는 백 그램짜리 이천사백 포, 올해는 생산량을 갑절로 늘릴 생각이었으나 그 계획은 내년으로 미뤄졌다. 지난 겨울, 안동 지방의 유례 없는 가뭄으로 노지에서 겨울을 나던 종자뿌리가 절반 이상이 말라 죽었기 때문이다. 비널을 덮어 방한과 습도 유지를 배려했어야 했다.
이미 한 뼘쯤 자라 있는 국화를 심은 땅은 이천 평, 내년쯤은 사오천 평으로 늘릴 계획이다. 현재의 이천 평 규모도 단일 품종 재배지로는 국내에서 가장 큰 것이다. 생산량을 늘림에 따라 필요해질 일손이라든지 지금의 유통 체계를 보완하거나 확대하려면 전담 관리인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돈수스님의 국화 농사일은 오월 중순께, 밭의 흙에 살을 올리고, 겨우내 갈무리해 두었던 종자 뿌리를 묻는 일로 시작된다. 처음에는 농사 짓는 것처럼(제대로) 해 본다고 비닐도 안 덮었더니 그야말로 잡초와의 전쟁이 되어 그를 기진시켰다. 독사와 국화는 대가리를 눌러 주어야 한다-그가 예부터 있던 것이라고 주장하는 속담이다. 국화가 세 마디로 커 올라오면 윗순을 잘라 주어야 하는 일을 두고 하는 밀이다. 그래야 꽃 송이의 수효가 늘기 때문이다. 그 일도 엄청난 일이어서 낮에 두 사간 쉴 때말고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꼬박 매달려도 세 고랑을 넘지 못한다. 그 일을 끝냈나 싶으면 처음 따준 국화의 순이 또 세 마디로 자라나 있다. 그 작업을 꽃이 피기 시작하는 구월 말까지 한다.
11월 중순부터 한 달쯤 동안에 꽃을 따고 말린다. 백 그램짜리 한포에 들어가는 꽃은 천여백 송이쯤, 그것을 지금 포당 삼만원에 내고 있다. 그런 것이 어느 곳에서는 구만 원에도 거래가 된다는 소문이 들린다. 그 값을 치르고도 먹을 만한 차임을 인정 받고 있다는 뜻이겠는데, 그것에 각별한 관삼을 보인 것은, 자청한 일이기는 하나 호된 농사 일로 고단한 나날 보내고 있는 생산자가 아니라 엉뚱한 다른 사람들이었다. 이미 유사품이 나돌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개발은 어려워도 흉내는 쉬워요. 그는 간단히 말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어려운 세상에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되겠습니까. 국화차로 돈을 벌어 따로 도모할 일도 있다면서 그렇게 복장 편한 소리를 했다.
그가 국화차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개인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덖음차의 음기가 그의 몸에는 지나친 것이어서 대신해서 마실 차를 찾다가 시작한 ‘개발’이었다. 우연히 옛날 책에서 국화차에 관한 내용이 눈에 띄었고, 그것이 제 몸에 맞을 듯하여 국화꽃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엄청나게 다양한 국화 품종 가운데서도 작고 모양과 빛깔이 고운 것, 그리고 향기가 좋은 것이라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독성이 적어야 했다. 독성은 삼키면 바로 목이 쏴아해진다. 도구로 삼아 수 많은 국화를 일일이 맛본 뒤에 그가 최종적으로 찾은 것이 전통 조선감국, 그 조건을 두루 갖춘 것이었다. 개발에 삼 년쯤 걸렸다.
농사일은 건강한 수행을 위해서도 의미 있는 일이지만 추수되는 바, 자립의 가능성이라는 점으로도 그에게는 뜻 깊은 것이 된다. 도인이 쏟아졌던 그 옛날, 황매 회상의 칠백 대중, 설봉 회상의 일천 대중, 경산 회상의 일천칠백 대중이 가능했던 것은, 단월로서가 아니라, 낮에는 밭을 잘고 공부는 틈 나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을 자급자족의 생활 체계였을 것이라 그는 생각한다.
통도사 극락암에서 시작한 산문 생활, 경봉스님을 시봉하면서 느낀 것, “이쁘게 앉아 있는” 수좌들을 외호하느라 신도들에게 아쉬운 소리도 마다 않던 노승을 보면서부터 품은 생각이었다. 나라 안 최고의 수행 도량이라는 데서도 그 넓은 땅은 놀려 둔 채 채소를 사서 먹고, 큰절은 큰절대로. 조상이 물려 준 천혜의 도량에서 관람료, 도지 따위를 받으면서도 그 수입만으로는 살 수 없다고 아우성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수좌들의 방부처는 지주 해제비에 따라 결정되고, 스승은 형식적인 상당법문뿐, 나날이 그리고 낱낱이 점검하는 자상함과 치열함이 모자라는 수행의 풍토도 문제지만, 밥 한 그릇이 입에 오기까지의 수고를 몸으로 겪으려 들지 않는 공부의 자세가 그는 안타깝다. 그것은 몸으로 부딪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지 끼니 때마다 오관게만 업으로 왼다고 될 일이 아니다. 그런 아쉬움은 국화 농사를 짓기 전까지의 자신의 삶을 포함하는 것이라 했다.

밭일을 할 때는 장갑 없이 맨손으로 해요. 손에 만져지는 흙이 좋아요.
흙의 촉감이 좋다는 것인가. 그럴 법한 일 아니었나. 서른 살 무렵에는 전라도에서 적잖은 수업료를 갖다 바치고 정식으로 전통 산수화를 몇 년씩 공부한 적도 있고, 움직이는 멀어 내뿜는 생명감에 이끌리어 그것을 선으로 잡아 보려고 제주도에서 한동안 살기까지 했다. 신라토기에 흠뻑 빠져 그것을 수집하는 것이 취미였던 척도 있다. 요즘에는, 두툼하여 그에게 술잔만 같아 보이는는 우리 찻잔과는 달리, 문기가 가득한 중국 찻잔에 매료되어 있는데, 그가 뒷병에서 가져와 조심스레 펼쳐 보이는 상자 속에는 송대宋代에까지 거스르는 옛날 잔이 삼백 개는 넘어 보인다. 그의 타고난 미감이 발현시킨 취미들일 터였다.
여기 와서 사과 꽃 핀 것을 처음 봤어요.
사과 꽃 떨어진 자리에서 지고 없는 그 꽃잎을 고스란히 되살려 보아 내는 그의 감성이다. 그가 보아내는 사과 속살 같은 사과 꽃잎을 두고, 오온이 공空하지 못하니 수행길이 순탄치는 않겠다며 딴지를 걸어 본다. 그는 대뜸 되받았다. 공空하니 보이는 거요. 그랬던가 보다. 산수와 달마 등의 그림 그리기, 토기 및 자기 수집, 그런 것들이 주는 즐거움에 적잖았을 터였다. 그러나 희롱하였을 뿐이지 그의 목적아 된 바는 없었다. 신라토기 등은 아홉 해 전에 이 곳 안동으로 올 때에 주위에 나눠 주면서 털어 버렸다. 자립의 방편으로 삼을 수 있을까 싶어 도모해 본 그림 그리기 또한 전적으로 매달리지 않으면 안 될 일이라 판단되어 걷어 버렸다. 그림을 그리면서 화두를 챙길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지인을 통해 거두고 있는 중국 찻잔들은 그의 고임을 받고 있기는 하나 찻잔박물관이라도 생기면 그 곳에 기증할 수도 있다고 여기는 것들이다.
방에서보다 흙에서 일을 할 때 화두가 더 잘 들린다. 장자도 물질변화(物化)의 궁극처는 큰 흙덩어리(大塊)라 했다. 제 몸이 돌아갈 곳이 이 흙 아니던가.
“사료소료死了燒了”, 그가 만지는 흙, 그가 붙들고 있는 화두이다. 찰라도 벗어날 수 없는 사실, 산다함은 나날이 죽음을 뺨 한 발자국씩 옮겨 놓는 일이다. 일타 은사스님에게서 받은 화두는 “세존 염화”였었다. 그것이 역사적인 일이었기는 하더라도, 그래서 고인들이 일천칠백 공안중의 하나로 삼은 것이기는 하더라도 자신의 구체적 삶과는 유리된 헛된 공안이기로, 그래서 간절한 의심이 지어지지 않기로 바꾸어 버린 것이다.

70년 정초에 열여덟 나이로 출가했다. 그러나 출가하려라는 마음은 없이 접어든 길이었다. 책이나 보면서 허약한 몸이나 좀 추스르리라. 처음 뵈온 경봉스님께 세속에서 하는 식으로 큰절을 올렸다. 넙죽 엎드린 그의 뒤통수에 대고 그를 데리고 옹 당숙이 일렀다. 하는 김에 두 번 더 올려라. 경봉스님께 아란야 토굴을 지어 드리는 등, 불심이 깊던 당숙은 속셈이 따로 있었던 것이다.
극락암에서 이룬 첫날 첫 밤, 달 밝은 창호문 밖에서 들려 오는 댓잎 소리가 좋았다. 별일이었다. 속가인 진주는 강변의 무성한 왕대로 호가 난 곳이다. 그 곳에서 듣던 대바람 소리는 그라 싫더니…
세찬 바람에 열려진 방문을 도량석 하던 스님이 가만히 닫아 주고 지나치던 일도 삼십 년 전 일이건만 어제 일처럼 기억에 환하다. 그렇게 떼놓은 발걸음이다. 일타스님을 은사로 해인사에서 수계한 뒤, 경상도, 강원도, 전라도, 제주도… 대중살이와 독살이 섞어 하는 가운데 그가 관심을 둔 것은 본분사뿐이었다. 어느 날 정定에 든 그가 본 제 모습, 석굴 안에서 턱수염에 고드름을 단 채 좌탈입망한 모습, 전생이 그러했다면 금생에 바라는 바 그저 부처님 슬하 떠나지 않고 애쓰며 살아가는 일이다.
옛 사람은 머리를 깎고 염의를 입은 것으로 출가라 말하지 말라 했다. 그것은 그저 두 조각 대문 달린 집에서 나온 데 불과할 뿐이라 했다. 삼계 화택의 집에서 나온 뒤에라야 대장부라고 이름할 수 있다 했다.
옛 사람은 뒤이어 이른다. 대장부의 뜻을 이룬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중생과 함께 삼계를 벗어나야만 비로소 대장부라 할 수 있다.
십 년 가까이 고 있으니
그에게 인연터라 할 만한 안동은 기독교, 천주교 등에 비해 불교가 낙후된 곳이다. 그 동안 그는 군부대를 위주로 불서를 보급해 왔다. 그냥 나눠 주는 식이다가, 군법당에 작은 도서관을 마련해 주는 식이다가, 불서 무료 대여점을 관리하는 식이었다. 그러나 그가 기울이는 노력에 비해 결과는 신통치 않아 제대로 된 규모의 도서관을 하나 지어보고 싶어한다. 국화밭이 만 평쯤으로만 늘어도 될 법하다고 그는 생각한다.

돌솥에서 찻물이 끓으려는데
객이 수레를 타고 들어온다.

글쓴이는 알 수 없으나 글체가 호방한 그의 방 벽에 붙은 도연명의 글이다. 수레를 타고 이 곳을 찾은 객들은 그가 만든 조선감국차말고도, 값싼 수입 잎차에 메주 등 “기상천외”의 재료를 가미해 손수 만든 남탑보이차, 그리고 말차, 사향보이차, 고차, 버섯차 등으로 밤 늦도록 “물고문”을 당했다. 밤새 비가 내렸고, 어쩌자고 뻐꾸기는 바가 오는데도 밤새 울었다.
그 소리를 돈수스님은 오동통 국화를 살찌우는 소리로 뜯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