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이 뭣고(是什麽)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유마의 방 - 신규탁 1998년 08월 198호
올 4월 도서출판 장경각에서「선사들이 가려는 세상」을 출판하였다. 이 책의 인연으로 지난달부터 불교방송국의 ‘무명을 밝히고’ 시간에 선문답禪問答을 해설하게 되었다.
목요일마다 오후 5시 15분에 방송하는데, 선문답을 요즈음의 우리말로 온전하게 옮겨서 그 뜻을 분석한다. 물론 이 일은 위험하고도 어려운 일이지만 이것을 하는 데에는 내 나름대로의 신념이 있다. 세상에서 뜻이 전혀 통하지 않는 말을 주고 받을 때에 선문답한다고 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뜻 없는 말은 없다. 다만 세월이 많이 흘렀고 게다가 먼 이국 땅에서 그 나라 말로 주고 받은 말이라 제대로 번역하기 어려울 뿐이다. 이런 입장에서「선학사전」과「선림고경총서」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선어록에 대한 이런 나의 입장은 얼마동안 변함이 없을 것이다.
방송 내용은 일반인들이 궁금해할 만한 선문답을 중심 주제로 뽑아서 번역하고 해설한다. 생방송이다 보니 긴장도 되지만 그 나름대로의 짜릿함도 있다. 지난 7월 16일자 방송에는 ‘이 뭣고’ 라는 말을 중심으로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방송이다 보니 시간 제약도 있고 해서 자세하게 논거를 들지는 못했지만, 그 뜻하는 바는 상대방을 질책할 때에 쓰는 의문문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따라서 ‘이 뭣고’ 라는 화두는 그 자체로는 아무 뜻도 없는 단순한 의문문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뭣고’ 가 대단한 화두인 양 이것만 깨달으면 부처가 되는 것처럼 생각하여 거기에다 갖가지 형이상학적 해설을 붙이는 것은 잘못이다. ‘이 뭣고?’ 라는 말만으로는 화두가 될 수 없다.
「해인」지에는 오래전부터 ‘유마의 방’ 이라는 고정란이 있다. 여기에는 출가 수행자가 아닌 일반인들이 불교나 세간의 여러 현상을 설명하는 내용이 실린다. 마치 유마거사가 거사의 몸으로 불교를 설명하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나는 유마에 견줄 만한 인물은 못 된다. 같은 점이라고는 머리를 삭발하지 않은 겉모습뿐이다. 참선이라고는 단 십 분도 해본 적이 없는 필자이지만, 문헌학도로서 그리고 불교학 연구자의 입장에서 ‘이 뭣고’ 라는 말의 의미를 고증하려고 한다.
‘이 뭣고’ 는 중국어의 ‘시습마是什麽’ 를 번역한 말이다. 이 말은 선어록에는 물론, 성리학의 선구자인 정이천 정명도의 어록인 「이정어록」을 비롯하여「수호지」에도 많이 나온다. 어디에 쓰였든 뜻은 같지만 이 글에서는 「벽암록」을 중심으로 분석해 보기로 한다.
「벽암록」제2칙은 조주스님의 선문답을 싣고 있다. “조주스님이 대중에게 법문하였다.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다. 그저 이러니 저러니 간택하지만 않으면 된다.’” 이 말에 대해 원오 선사는 이렇게 논평을 한다. “3조 승찬 대사가 이 자리에 계시는데, 이 어른 앞에서 이 뭣고? 안전시습마眼前是什紘, 삼조유재三祖猶在.” 인용문의 내용은 알려진 바대로 3조 승찬 대사의「신심명」의 첫구절이다. 원오 선사는 승찬 대사의 말을 인용하는 조주 선사를 꾸짖는다. 제소리 못하고 남의 말이나 끌어다가 법문이랍시고 하는 조주 선사를 비판하는 것이다. 여기에서의 ‘이 뭣고?’ 는 몰라서 묻는 게 아니다. 의문 형식을 통해서 상대를 꾸짖는 말이다.
이런 용례는「임제록」에도 나온다. 임제 선사가 대중에게 설법하였다. “여러분의 몸 속에 등급을 매길 수 없는 참 사람이 있는데 왜 그걸 모르고 중생 놀이 하고 있는가?” 그러자 이 말을 듣던 사람이 물었다. “등급을 매길 수 없는 참사람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임제스님은 “등급을 매길 수 없는 참사람이라고? 이 뭐 더러운 것인고? 무위진인無位眞人, 시십마부정지물是什麽不淨之物?” 참사람을 더러운 것이라고 임제스님은 꾸짖는다. 이 꾸짖음의 저의는 참사람을 내면화시키거나 실재론적으로 실체화시킨 상대방을 꾸짖는 말이다.
「조당집」의 석두희천선사장에 보면 본래면목을 거론하면서 그것은 일천 명의 성인이라도 모른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들어서 어떤 스님이 장남 선사에게 물었다. “성인이라면서 어찌 모릅니까?” 장남선사가 대답했다. “천 명의 성인이라니 이 뭐 찻잔 우는 소리인고? 천성시습마완명성千聖是什麽琬鳴聲?” 여기 이 순간에서 경험하는 수행자 일반을 떠나 절대적인 어떤 성인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성인? 이 뭐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인고? 대화의 앞에서 말한 내용이나 인물을 절대화시키는 것을 꾸짖는 말이다.
「벽암록」55칙은 도오(769~835)스님이 점원이라는 젊은 수자와 초상집에 문상을 간 일을 소개한다. 점원 수자가 송장이 들어 있는 관을 두드리며 스승에게 묻는다. “살았습니까? 죽었습니까?” 스승 도오가 대답한다. “죽어도 말 못하고 살아도 말 못한다. 말로는 안 된다.” 수행자들의 철저함을 잘 드러내 준다. 남의 초상집에 가서도 생사 문제를 깨치기 위해 애쓰는 철두철미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생사의 문제는 제각기 당사자가 깨달아야 할 자신의 몫이다. 결코 타자의 경험에 의존할 수 없다. 그러나 너무도 궁금한 점원 수자는 돌아오는 길에 스승의 멱살을 붙들고 다그친다. “말 안 해 주시면 때리겠습니다.” 그래도 말을 안 한 스승 도오 선사는 제자에게 호되게 매맞는다.
흐르는 세월 속에서 스승 도오 선사도 죽고 점원도 어느덧 나이를 먹었다. 생사문제로 화두 일념이 된 점원 수자가 하루는 도원 선사의 수제자 석상 선사를 찾는다. 젊었을 때 초상집에서 했던 질문을 다시 한다. 석상의 대답도 그 옛날 도오 선사의 대답과 마찬가지이다. “절대로 말로는 안 된다.” 이 말 끝에 점원은 생사문제를 깊이 체험을 한다.
하루는 점원 수자가 삽을 들고 법당 마당을 왔다갔다 했다. 석상 선사가 물었다. “뭐하는가?” 점원 왈 “은사 스님의 사리를 찾습니다.” 그러자 석상 선사가 말한다. “거대한 파도는 아득하고 흰 물결은 하늘까지 넘실거리는데 무슨 은사 스님의 사리를 찾겠다는 것이냐?” 이에 질세라 점원 왈 “그렇군요. 쓸데없이 애만 쓸 뿐이지요.” 깨달음을 절대시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체험하도록 지도한 스승조차도 절대시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석상과 점원은 같은 체험을 한 것이고 나아가 스승의 가르침을 제대로 계승한 것이다.
그러나 그 때 총림에서는 이 말을 절대시하여 누가 생사문제를 묻기만 하면 그 말을 외워서 반성 없이 그저 말 못한다고 대답했다. 그것을 태원의 부상좌는 못마땅하게 여겨 “도오스님의 사리가 아직도 남았다” 고 풍자한다. 이 풍자에 동감한 설두 중현스님이「설두송고」에 그 말을 인용했고, 원오스님은 다시「벽암록」에서 이렇게 설명을 붙인다. “이 뭐 떨어진 짚세기인고 시십마파초혜是什麽破草鞋” 스승의 사리라니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그거야말로 헤어진 짚신처럼 쓸모없는 물건이다.
‘이 뭣고?’ 는 하나의 의문문에 불과하다. 선문답을 하는 두 대화자 사이에 조금 전에 한 대화의 내용이나 단어를 들어서 그것이 무엇이냐고 질문하는 말이다. 그리고 이 질문의 내면에는 절대를 타파하려는 비수가 들어 있다. 깨달음을 절대화시키거나 초월적으로 이상화시키면 그것은 또 다시 우리를 얽어매는 말뚝이 되고 만다. ‘이 뭣고?’ 라는 말을 절대화시킨다면 그것 또한 어디고 갈 수 있는 허공에 말뚝을 박아 수행자의 자유를 박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