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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장경 해인사 이운 육백 년, 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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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 최세영 1998년 07월 197호
1398년 병진일(음력 5월10일)
강화도 선원사에서 배가 떠났다. 고려대장경을 실은 배였다. 꼭 육백 년 전의 일이었다. 그 배에 실렸던 고려 대장경판이 지금 해인사에 모셔져 있는 고려대장경이다.
언제 어떤 경로를 통해 고려대장경이 해인사에 모셔졌는지 그 경로에 대해서는 아직도 풀리지 않는 의문으로 남아 있다. 다만 올해가 고려대장경이 강화 선원사를 떠나 해인사로 이운된 지 꼭 육백 년이 되는 해임은 틀림없다.
지난 6월 4일, 전국적으로 4대 선거가 치러지던 날, 강화도에선 뜻밖의 행렬이 이어졌다. 스님들과 곱게 한복으로 단장한 불자들의 길고 긴 행렬. 바로 이 날이 육백 년 전 고려대장경이 해인사로 이운 된 첫날이었다. 육백 년 전의 그 날이 바로 오늘의 일처럼 일시에 다가오는 것이었다.
합창단의 찬불가와 염불과 더불어 경판, 인경된 경전을 머리에 이고 강화 선원사에서 더리미 나루터까지 삼십여 분 거리의 좁다란 시골길을 걸어가는 이운행사. 사물패가 앞서고 큰북을 울리며 경판과 경전을 머리에 인 행렬의 장관은 대장경이 강화에서 서울로 옮겨진 지 꼭 육백 년이 되는 날 치러졌던 것이다.
조선 태조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태조 7년 5월 10일 임금이 용산강에 행차했다.
대장경판을 강화 선원사에서 운반하였다.
태조 7년 5월 11일 비가 내렸다.
태조 7년 5월 12일 비가 내렸다.
능장과 대부 이천 명으로 대장경판을 지천사로 운반하였다. 검교참찬문 하대사 유광우에게 명하여 향로를 잡고 따라오게 하고 오교 양종의 승려에게 불경을 외게 하며 의장대가 북을 치고 피리를 불면서 앞에서 인도하게 하였다. 임금이 서강에 행차하여 전라도에서 온 조운선을 시찰하였다.
태조 7년 5월 13일 비가 내렸다.
조선왕조실록 태조 7년 조

강화 선원사에서 대장경판이 이운돼 지금의 6.3빌딩 부근에 도착한 것이 1398년 음력 5월 10일이었다. 여전히 해인사 장경각까지 대장경이 어떻게 이운됐는지 학자들의 해석은 구구한 편이지만 앞의 조선왕조실록에 기초해 해석해 보면 해인사로 옮겨지기 위해 강화도에서 팔만여 장의 경판이 용산강까지 닿았으며 다시 뱃길따라 가기 위해 서강에 조운선을 띄워 놓고 그 배가 온전히 잘 갈 수 있는지를 왕이 친히 살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연일 내리는 비를 피해 강화 선원사에서 출발한 경판은 서울의 지천사에서 쉬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듬해 정월에 해인사에서 인경작업이 있었다는 기록이 나타나기 전까지 언제 어느때 해인사로 옮겨졌는지 그 누구도 알 길이 없다. 다만 우기가 그치기를 기다렸다가 옮겨졌으리란 추정만이 가능하다.
대장경의 고향 강화도. 강화도로 천도한 당시 최고 권력자 최우 정권은 몽고군의 말발굽 아래 놓인 현실 속에서 “나라를 구한다” 는 호국의 이념으로 전국민의 정신적 지주였던 대장경 조성 대작불사에 들어간다. 세계 제패를 향한 몽고군 앞에 팔만 대장경을 조성해 문화민족으로서의 자존심을 회복하고 그렇게 이루어진 일체감 속에 대몽항쟁의식을 고취하려는 취지였다.
당대의 문호 이규보가 쓴「대장경각판 군신 기고문」(1237년)에는 호국의 정신으로 대장경을 조성하며 부처님 전에 아뢰는 뜻이 간곡하게 담겨 전하고 있으며「고려사」권 24, 고종 38년인 1251년 9월 임오조에는 왕이 성 서문 밖에 있는 대장경 판당에 백관을 거느리고 가서 향을 올렸고 현종 때 대장경 판본이 1232년 몽고병에 의해 불타 버린 것을 다시 서원해 도감을 세워 십육 년 걸려 완성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고려대장경의 조성은 이처럼 어려운 시대상황 속에서 이 땅의 스님과 관료에서부터 천민에 이르는 수많은 이들이 오직 불보살의 가피 속에 몽고군이 다시는 우리 국토를 밟는 일이 없기를 발원하며 한마음 한뜻으로 동참해 이루어진 것이다.

이제 육백 년 만에 팔만대장경이 이운된 날을 기려 다시금 머리에 경판과 경전을 이고 길 떠나는 의식을 가진 것은 오늘의 우리에게 많은 시사를 주고 있다.
“팔만대장경 해인사 이운 육백주년 대법회와 이운식” 은 선원사 발굴터에서 봉행됐다. 특히 고려대장경의 한글 번역 작업에 평생을 바쳐온 월운스님은 이 자리에서 축사와 함께 이규보의 ‘군신기고문’ 을 즉석에서 낭독해 참석자들이 다시 한번 고려대장경 조성의 정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노보살님들부터 임시 공휴일을 맞아 부모를 따라온 어린 불자까지 경판과 경전을 머리에 이고 황토 흙바람 이는 길을 걷는 모습은 자못 숙연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경전의 가르침 따라 살겠다는 발원이었고, 육백 년 전 그 시절, 한 장의 경판이라도 손상시키지 않고 옮겼던 선조들의 정성스러움을 돌아보는 발걸음이었다. 육백 년 만에 처음으로 옛길을 따라 대열을 이루어 걷는 과정, 그것은 육이오 이래 최대의 국난이라는 위기의 현실을 대장경을 조성했던 국난극복의 그 정신으로 이겨나가자는 것이며 21세기를 앞두고 고려인의 그 기상을 계승하자는 의미가 담긴 것이기도 했다.
행렬에 이어 또하나의 백미는 범패와 바라춤이 펼쳐지는 가운데 더리미 나루터에 세워진 배를 연등으로 장엄을 하고 배 위까지 경판을 정성스레 나르는 행렬이었다. 남아 전하는 자료의 부족으로 결코 고증될 수 없는 것이긴 했지만 육백 년 전 당시에 팔만여 장의 경판을 조심스레 이운했던 장면을 상상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불자들이 이고 온 경판을 스님들이 한 장 한 장 받아서 정갈하게 쌓아두는 장면은 취재진의 가장 많은 플래쉬를 받았다. 그 날은 육백년 만에 긴잠을 자던 팔만 대장경이 대장경의 고향 강화에서 새롭게 잠을 깨 고통받는 이웃들의 가슴속으로 들어오는 날이었다.
고려대장경 연구소에서는 고려대장경의 해인사 이운 육백주년을 맞아 이 어려운 시대 고려대장경의 정신을 드높이기 위한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지난 음력 5월 10일, 강화 선원사에서 용산강까지 대장경이 옮겨진 날 행사가 그 입제식이었다면 고려대장경이 완간된 10월 11일을 즈음해 고려대장경 이운과 관련된 행사들을 두루 펼칠 예정이다.
용산강에서 지천사까지 이운됐을 행렬을 재현하고, 전 국민들에게 대장경 판각에서 인경에 이르는 조성 과정을 보이고, 참여하게 하는 행사 프로그램이 준비되고 있다. 칠백 년 전 고려인의 정신을 되살려 오늘의 어려움을 다시금 온 국민이 하나돼 이겨나가자는 취지의 행사다.
언제나 이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을 때 우리 불교는 맨 먼저 고통 치유의 불사를 다양하게 펼쳐왔다. 그 소중한 역사를 이제 다시 고려대장경의 정신으로 다시금 행해야 할 시기다. 고려대장경 이운 육백주년, 그 깊은 의미를 되새기면서 불교가 앞장서서 호국의 등불이 되고 국난 극복의 정신을 바로 세우는 계기를 만들기 위해 이천만 불자의 원력을 모아야 할 것 같다.
날이면 날마다 잠머리맡에 고려대장경을 이고 깨어나는 해인사 학인 스님들이시여, 그대들의 잠머리맡에 새 한 마리가 날아와 앉았다. 어디서 날아왔는가? 육백 년 전 그대들의 잠머리맡으로 날아온 새의 소리를 무심히 듣고 말 것인가?
이제 이 새는 오늘 아니면 백 년이나 지나서야 그대들의 머리맡에서 울지도 모를일이다.
고려대장경이 선원사에서 떠난 지 육백 년이 된 그 날, 1998년 6월 4일. 비가 내렸다.
육백 년 전 그 날도 비가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