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서지학자다. 최근 성암 고서박물관에서 발견된 필사본 불경인「무구정광 대다라니경」에 ‘측천무후 글자’ 가 많이 발견됐음을 확인한 것도 그의 몫이었다. 이로써 필사본 무구정광 대다라니경이 석가탑에서 나온 다라니경보다 훨씬 앞서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고문서며 중국의 다라니경보다 앞서 우리 불경이 중국 것의 영향을 받지 않고 주체적 발전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탄생된 것임을 입증한 것이다.
박상국 씨는 동국대에서 불교학을 전공했다. 대학원에 들어가 보조 국사의 직지심체요절을 붙들고 이 년 동안 매달렸다. 강원교재를 풀어 쓰고 주석을 단 영담사기를 집중적으로 공부하면서 초서라 읽기 어려워 원본을 보고 싶어 했지만 모두들 ‘판본이 전하지 않는다’ 했다. 그러나 백방으로 노력한 끝에 학교도서관에서 이를 찾아 낸다. 본래 있었던 것이나 ‘발굴’ 한 것과 진배 없던 그 사건은 학교 신문에 톱기사로 실리고 일간지에 게재될 정도로 떠들썩했다. 사람들 앞에서는 ‘내가 진실되게 사니까 부처님의 가피를 입는구나’ 라고 했지만 내심 그는 ‘애써 찾아 공부하는 학자가 없었으니 지금까지 도서관에서 먼지 뒤집어쓰고 있었구나’ 싶었다.
일간지에 그의 기사가 나가자 대흥사의 스님에게서 편지가 왔다. 판본이 없다고 알려진 영담사기의 목판본을 절에서 보았다는 사연이었다. 사찰의 목판본과의 첫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불교학에선 자료의 ‘기초조사’ 가 가장 절실하다는 판단으로 가슴에 원을 세웠다. 사찰에 잘 모셔지고 있거나 빨래판으로 쓰여지고 있거나 절에 있는 목판본 자료는 내가 다 해내야겠다라는.
그 때부터 박상국 씨는 경판 조사를 시작한다. 전국 사찰 경판 조사계획서를 갖고 절을 찾아다녔다. 전국 방방곡곡에 산재한 목판을 두루 만났다. 미흡한 듯하여 갔던 곳도 다시 홀로 찾아가 작업하기도 했다. 공주 갑사의 경판조사도 그렇게 홀로 했던 일이었다. 보물인 월인 석보 경판을 그가 다시 한장한장 정리하다 보니 열여섯 장이 더 확인된 것이다. 그는 ‘보물 528호 월인석보 목판 추가 발견을 계기로’ 란 부제를 단 논문을 발표해 학계에 또다른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십 년 세월 걸린 연구 결과는「전국 사찰 소장 목판집」이란 한 권의 방대한 책자로 세상에 나왔다. 문화재관리국이란 이름 옆에 문화재전문위원 박상국이란 이름 석 자도 당당하게 실렸다. 유례없는 일이었다.
먹물 한 짐 들고 종이 한 보따리 들고 몇 날 며칠 절을 돌다 보면 옷차림부터 꾀죄죄해 있을 건 당연지사다. 그런 허름한 옷차림만으로 하대하던 절집도 다반사였다. 그러나 그렇게 떠돌며 그의 손이 닿지 않은 경판이 없다는 것, 그가 정리해 내지 못한 사찰 목판이 없다는 것, 그로서는 참으로 고마운 일이었다.
“이 작업을 하면서 성격이 많이 변했습니다. 덜렁거리던 성격이 치밀해졌지요. 경판 한 장 잘못 헤아리고 잘못 놓아두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거든요. 인부가 상전이고 본인이 인부가 돼 작업해야 했지요. 그러나 먼지 가득한 판전에서 일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는 건 불보살과 호법신장의 가피라는 생각도 들고, 인복이 꽤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십여 년 세월 동안 토요일, 일요일도 없이 절에서 절로 떠돌아다니던 시간의 공을 불보살과 더불어 사는 이웃들에게 돌리는 걸 보면 그는 이미 인과의 도리를 터득한 경지인지도 모르겠다.
1976년에 고려대장경 영인본이 완간됐다. 학자들이 방점 찍혀 보기 편한 일본의 신수대장경을 선호하는 사이 박상국 씨는 영인본을 펼쳐들고 첫장부터 끝장까지 펼쳐 읽기 시작한다. 읽으면서 대장경 경판 말미에 등장한 간기를 조사 분류하는 작업부터 했다. 서지학에 있어 간기는 기본이자 가장 핵심 사항이었기 때문이다. 수십 권의 영인본을 한 줄도 빠짐없이 읽어 밝혀낸 고려대장경의 간기는 1237년부터 1248년까지였다. 맨 마지막 해에 판각된 경판은 1종으로 수기스님이 정리한 대장목록뿐이었다. 고려대장경이 판각된 것이 꼭 십이 년 걸려 이루어진 것을 확인한 셈이다.
그 때부터 그렇다면 과연「고려사」권 24, 고종 38년 조에 ‘십육 년에 걸려 완성했다’ 는 건 어떤 까닭일지 그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학계에선 1236년부터 1251년까지 십육 년 걸려 대장경이 판각됐다고 보던 터였다.
고려사를 뒤적이고 당대 문인들의 문집을 펼쳐 읽어 가며 고려대장경 관련 자료들을 총망라해 수집했다. 통설 십육 년의 판각기간과 그가 대장경판에 나온 간기로 살핀 십이 년의 판각기간과의 차이를 화두처럼 끌어안고 살았다. 마침내 그는 1251년의 기록, 곧 ‘왕이 성서문 밖에 있는 대장경판당에 백관을 거느리고 가서 향을 올렸다. 현종 때의 대장경 판본이 임진년 몽고병에 의해 불타버린 것을 왕과 군신이 다시 서원하고 도감을 세워 십육 년에 걸려 완성했다’ 는 대목에서, 해답을 발견한다.
1251년은 판각을 완료한 완성 연도가 아니라 대장경 판각이 완료됐음을 불보살에게 고하는 의식이라는 것이다. 마치 한해 전에 판각을 시작하고 다음해에 불보살님에게 판각조성을 알리는 군신기고문을 발표했던 의식의 화답처럼, 완성을 아뢰는 경축의식의 기록이라는 것이다.
박상국 씨의 주장대로 1248년에 완성하고 1251년에 완성을 알리는 의식을 가졌다면 삼 년이라는 기간은 왜 비어 있는 것일까?
“최우가 죽고 최향이 집권하는 과도기라 대장경 완성에 따른 경축 행사를 행할 겨를이 없었던 거죠. 대장경판을 한자리에 모아 정리하고 인경하고 제본하는 시기도 필요했을 겁니다.”
기존 대장경 관련 논문들이 나와 있는 자료만을 활용하는 편이었고, 자연 틀린 원문까지 베끼던 관례가 팽배하던 터라 박상국 씨는 결심을 한다. ‘결코 남의 논문은 거저 먹지 않으리라.’
꼼꼼히 공부하고 논문을 쓰면서 그가 체득한 진리가 있다. 문제가 풀리지 않을 때 해답은 그 문제에 들어 있다라는 것. 수학문제의 해답이 그 문제 속에 들어 있는 것과 한가지로, 고려대장경의 의문점과 신비 역시 경판 속에 해답이 있다는 것이 그가 말하는 진리다. 영인본만을 펼쳐 읽으면서도 시나브로 그는 대장경의 보유판이 어떻게 활용됐는지를 비롯해 대장경 관련 역사를 한눈으로 꿰는 경지가 된 것이다.
최근 해인사에서는 장경각 판전 보수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이의 걱정은 쉴 틈이 없다. 판전을 둘러싼 보수 또한 오늘의 지혜로 현명하게 풀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책임이 그에게 있는 것이 아닐지라도 그는 고려대장경이 망가져 갈 때 뭐하고 있었는가로 괴로워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했다. 그 때문에 마치 최일선에서 가장 큰 책임감을 안고 있는 사람같아 보였다.
서지학자로, 고려대장경에 대한 하염없는 외경심으로 하루를 사는 존재지만 문화재연구소 ‘예능 민족 연구실’ 실장을 직업으로 갖고 있기에 온전히 대장경 연구에만 매달릴 겨를은 없다. 중요 무형문화재 기록화 사업이라 현장에 가서 채록하는 것이 그의 일이다. 남들이 한 달 걸려 쓸 논문을 그가 여러 해 걸려 쓰는 것도 그런 까닭이 있다.
요즘도 대장경과 관련된 일이면 쉽게 혈압 올리고 분통 터뜨리며 살아가는 그가 새로운 작업에 들어갔다. 대장경의 사실과 진실을 모르고 대장경의 정신조차 돌아보지 않은 채 대장경을 말하는 이웃들에게 진정 대장경이란 무엇인지를 알려 주기 위한 ‘진상규명’의 글을 집필중이다. 어린 이웃들부터 대학자에 이르기까지, 대장경이란 이런 것이며 대장경의 진실은 이렇다라는 더욱 분명하고도 진솔한 이야길 들려 주고 싶어서이다. 그런 뜨거운 마음으로 그는 밤마다 ‘고려대장경 이야기’ 글을 다듬는다.
언젠가 한번 해인사 스님이 박상국 씨에게 장경각을 지키는 장주 생활을 해볼 의향이 없느냐고 물어왔다. ‘아직 장주될 복은 덜 지은 것 같다’는 것이 그의 답변이었지만 그건 누구도 모를 일이다. 언제 어느 때 그가 해인사 장경각에서 날마다 경판의 먼지를 떨어내며 영인본에서 채 인경되지 못한 각수의 이름을 뒤적이고 있을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