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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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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을 위한 동화 - 안도현 1998년 07월 197호
어느 깊은 산골짜기에 옹달샘이 하나 있습니다. 옹달샘은 오랫동안 흐르지 않고 그저 고여 있었던 듯 싶습니다. 만약에 누군가 이 산 속의 옹달샘를 발견했다면 혽서 이렇게 중얼거릴지도 모릅니다. 마치 자연의 신神이 물을 마시다가 가만히 내려 놓고 간 바가지 같구나.
그런데 아주 가끔씩이지만 옹달샘의 평화가 깨질 때도 있습니다. 잠자리가 제 발을 물에 담궜다가 소스라치며 날아오를 때라든지 나뭇잎이 팔랑 떨어져내릴 때면 고요하던 수면이 잠깐 동안 파르르 떨기도 합니다. 소나기가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갈 때도 그렇습니다. 옹달샘은 두드러기 난 듯 온몸이 가렵고 쑤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뿐, 옹달샘은 곧바로 평정을 되찾습니다. 자연의 신이 다시 와서 바가지를 들어 올리기 전에는 물살이 요동치며 크게 일렁이는 일 따위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조금 전에 소나기가 수면을 두드리고 지나간 뒤, 옹달샘은 가까스로 한숨을 돌리는 참입니다.
“여보세요, 저 좀 내려 주세요!”
어디에선가 애절한 목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새 소리도 날벌레 소리도 아니었습니다. 그 소리는 여러 군데에서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가는 잦아들고, 잦아들었다 싶으면 또 터져 나오는 것이엇습니다.
소나기가 뿌린 뒤에는 어김없이 찾아오는 그 소리의 주인을 옹달샘은 알고 있습니다. 바로 풀잎 끝에 매달린 빗방울들이 내는 소리입니다. 옹달샘을 향해 내려왔으나 샘에는 닿지 못한, 물이 되어 흐르고 싶었으나 풀잎 끝에 하나의 물방울이 되어 맺혀 있는.
“눈을 꼭 감고 뛰어내려 봐.”
옹달샘은 풀잎 끝에 맺힌 물방울들에게 소리를 쳤습니다.
“무서워서 꼼짝도 할 수 없어요. 어떻게 좀 도와주세요!”
숲 속으로 햇볕이 비춰들자 물방울들은 더 마음이 다급해졌습니다. 그렇다고 옹달샘라고 뾰족한 방도가 있을 리 없었습니다. 바람이라도 한 줄기 불어 풀잎을 흔들어 준다면 다행이겠지만, 바람이 불 것 같은 기색은 숲 속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물방울들은 입술이 바삭바삭 타들어갔습니다. 그 동그랗던 물방울의 모양도 일그러지기 시작하였고, 몸은 미지근하게 달아오르는 것이었습니다. 햇볕한테 조금 더 몸을 내놓았다가는 물방울은 그 존재마저 사라져 버릴 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 때였습니다.
“내가 어떻게든 몸을 흔들어 볼게.”
그 동안 물방울을 매달고 있던 풀잎이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옆에 있던 풀잎들이, 또 그 옆에 있던 풀잎들이, 그리고 또 그 옆에 있던 풀잎들이 일제히 몸을 흔들었습니다. 풀잎들이 제 몸에서 구슬을 털어내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자 풀잎 끝에 맺혀 있던 물방울들이 퐁퐁, 소리를 내며 옹달샘으로 떨어져 내렸습니다.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물방울은 마침내 옹달샘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흥, 설마 풀잎들이 몸을 흔들었을 리가 없어. 때마침 바람이 불었던 게야. 이렇게 섣불리 말하지 마십시오. 그런 사람들은 오늘 당장 당신의 사전에서 가능성이라는 말을 지워 버리시기 바랍니다.
자, 이제 모든 것이 해결되었습니다. 벌써 이야기가 끝났냐구요? 아닙니다. 지금부터 새로운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옹달샘으로 떨어져 내린 물방울들은 또 다른 물방울들과 몸을 섞었습니다. 너와 내가 따로 없는 세상이 아마 그런 세상이겠지요.
옹달샘이 말했습니다.
“여기서 오래 머무를 순 없어.”
“나는 이 곳이 맑고 시원해서 좋은데….”
“그래, 옹달샘의 물은 언제든지 맑고 시원하지. 그것은 누군가 고여 있지 않고 자꾸 떠나기 때문이란다.”
“그렇다면 나도 곧 떠나야 한다는 말인가요?”
물방울은 더럭 겁이 났습니다. 풀잎 끝에 대롱대롱 머무를 때 그랬던 것처럼.
“이 세상의 모든 물은 서로 손을 잡고 있단다. 우리는 또 만날 때가 있을 거야. 잘 가….”
옹달샘은 물방울이 미처 이해하지 못할 말을 하며 물방울의 등을 가만히 밀었습니다. 그리하여 물방울은 옹달샘을 빠져나왔습니다.
물방울은 산골짜기를 타고 흐르는 물에 몸을 맡겼습니다. 다른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만나 몸집도 꽤 불어났습니다. 산 중턱쯤에 이르렀을까. 물방울은 전에 한 번도 듣지 못했던 소리가 앞을 가로막는 것을 느꼈습니다. 온 산을 다 집어삼킬 듯 그르렁대는 그 소리는 폭포가 벼랑 아래로 떨어지며 내는 소리였습니다.
“나는 저 폭포를 뛰어내려 본 적이 있어. 저 소리는 폭포가 내는 소리가 아니야.”
두려움으로 떨고 있는 물방울에게 다가와 누군가 말했습니다.
“저건 물방울들이 내는 소리야.”
“우리 같은 물방울이 어떻게 저런 큰 소리를 내는지 믿을 수 없는 걸.”
“지금부터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돼. 우리는 폭포를 뛰어내려야 하거든. 아니, 우리가 폭포가 되는 거야.”
“아니야! 나는 절대 못해!”
물방울은 갑자기 소리를 꽥 질렀습니다.
언제인가 폭포를 뛰어내려 본 적이 있다는 물방울이 말했습니다.
“우리 스스로 몸을 터뜨리지 않으면 물소리가 나지 않아. 부딪치고 깨질 줄알아야 우리는 물소리를 내는 물방울이 될 수 있어. 그건 혼자서 되는 일도 아니지.”
물방울은 눈을 질끈 감았습니다.
물방울은 자신을 터뜨려 폭포 소리를 내려는 것입니다.
자, 이제 모든 것이 해결되었습니다. 벌써 이야기가 끝났냐구요? 아닙니다. 지금부터 새로운 이야기는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