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행자의 첫 삭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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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문리 일기 - 현진
1992년 12월 130호
전남 여수시 교동 468번지.
나이 28세.
키 170cm, 몸무게 65Kg.
육군 병장 제대.
질병 앓은 경험 없음.
불교와의 첫 인연은 군대 있을 때.
오늘 삭발한 박행자의 입산 원서에 적혀 있는 내용 일부분이다. 신체 건강한 청년임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본 박행자는 안경을 쓰고 있었고, 약간 곱슬머리라는 차이밖에 없었다. 박행자는 입산하여 출가의 뜻을 밝힌 지 꼭 일 주일째 되는 날, 삭발을 하고 행자복을 입었다. 그러니까 그에게는 첫 삭발이 되는 의식을 치르고 예비 수행자가 된 것이다. 큰 절의 입산 절차는 꽤 까다로운 게 사실이다. 그래서 원주실을 찾는 이는 많아도 박행자처럼 삭발하는 이가 드물다. 말하자면 일 주일이 유예 기간이 되는 셈인데, 날짜를 다 채우지 못하고 하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기간에는 한 마디의 말도 할 수 없으며 선 채로 반배하는 게 하루의 일이다. 출가 의지에 대한 진정한 물음이 다시 한 번 요구되는 시기. 괜한 호기심이나 일시적인 충동으로 산을 찾은 이들은 대개 이 때 가려지는 셈이다. 행자들을 지도하는 원주스님의 말이다. “입산할 때 대충 알 수 있지요. 짐보따리가 크다거나 옷을 깔끔하게 입고 오는 이들은 오래 있지 못하고 떠나는 걸 많이 보았어요. 이것저것 안 가리고 산다는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해요.”
출가하는 이들을 가만히 보면 몇 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간편한 복장을 하고 법당 주위를 왔다갔다 하는 이는 십중팔구 입산 후보들이다. 계절은 가을이 한 몫을 차지하고, 아침 일찍이나 늦은 오후쯤이 단골시간이다. 아침에 오는 이는 밤차를 타고 온 경우이고, 저녁 시간에는 이리저리 배회하다 용기를 낸 사람들. 서른 살이 평균 나이로 갈수록 늦어지는 추세를 보인다는 점이 좀 특이하다. 학력은 대졸이 우위. 호주머니에 차비정도의 현금뿐인 것도 거의 일치한다. 그리고 경상도에서는 전라도, 전라도에서는 경상도에 있는 사찰로 출가하는 비율이 높다. 예나 지금이나 자신의 출신지에서 멀리 떠나서 수행하고 싶은 건 공통된 심리인 것 같다. 세 사람이 거의 같은 시기에 입산하여 삼천 배까지 마친 이는 박행자 혼자뿐이다. 긴 머리를 자르기 전의 박행자는 아직 속복俗服도 벗지 못한 후줄근한 차림이었다. 세수대야에 맑은 물이 담기고, 비누 한 장과 면도칼이 놓이면 삭발 준비는 끝난다. 선행자先行者들도 삭발 의식에 빠지질 않고 모였다. 삼귀의를 하고 반야심경을 끝낼 때까지 박행자는 또박또박 잘 따라 외웠다. 일 주일을 그냥 지낸 게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내가 물었다. “아직 마음이 정리되지 않았으면 지금 일어나도 좋습니다.” 그의 결심을 마지막으로 확인하는 말이다. 잠잠한 것은 곧 긍정을 뜻하는 까닭에 다음 물음으로 넘어갔다. “아무개 행자님은 사미계를 받는 날까지 불퇴전의 신심으로 행법行法을 익혀 나갈 수 있겠습니까?” “예.” 무릎을 꿇고 머리를 적시자 참회진언이 시작되었다. 옴 살바못자 모지 사다야 사바하. 칼을 잡은 내 손이 움직일 때마다 머리카락이 까맣게 대야에 담기었다. 오늘같이 긴 머리를 깎는 일이 더 힘들다. 더군다나 박행자의 머리카락은 억센 편이어서 정교한 손놀림이 필요했다. 칼날을 두 번이나 바꾸면서 삭발을 끝낸 것만 봐도 짐작 가는 일이다. 어른스님의 말씀처럼 아직 삭도질이 제대로 나지 않은 탓인 것 같다. 맨머리가 된 박행자는 딴 사람처럼 모습이 달라져 있었다. 이목구비의 음영이 확실히 드러나 보인다. 훤칠한 대장부가 따로 없을 것 같다. “내 모습이 이상해 졌어요.” 박행자가 내게 던진 첫마디는 나를 웃게 만들었다. 머리를 깎고 처음으로 거울을 보았던 모양이다. 아직 실감이 나지 않을 게다. 그러나 곧 자신의 모습에 익숙해질 것이다. 몇 년 전엔 나도 기분이 그랬으니까.
지금쯤 박행자는 입방식을 하느라고 정신이 없을 게다. 입방식은 군대로 치면 신병 신고식에 해당되는 절차. 행자실에 식구가 한 명 늘어나는 날인 것이다. 행자수칙行者守則을 보면 무슨 군대 용어 같다. 엄격하기로 소문난 해인사 행자실에는 수칙을 커다랗게 적어 놓았다.
예불 철저. 대적광전 앞을 지날 땐 반배. 스님들께 인사 철저. 선배 행자에게 절대 복종. 소임, 차수 철저. 스님이 물어보면 반배로써 대답. 삼경전 취침 금지.
대개 신심과 하심에 해당되는 항목들이다. 무슨 일이든지 하나씩 배울 땐 힘든 줄 모른다. 그것이 어려운 행자 생활을 가늠하게 만든 어떤 힘이 아니었을까. 어쨌거나 행자 시절 지은 복으로 평생 중노릇한다는 말이 사실이다. 그 시절의 신심을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제 발심하여 중노릇의 예비 과정을 익히게 될 박행자는 내가 알고 지내는 스님의 동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