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눌린 사람들에게 평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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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동화 - 곽재구
1992년 12월 130호
첫눈이 왔습니다.
맑고 깨끗한 눈가루들이 세상을 하얗게 뒤덮었습니다.
숲 속에서는 작은 산새들이 발가락이 시려운 줄도 모르고 눈 속에 빨갛게 익은 맹감나무 열매를 콕콕 쪼았습니다. 올해에 태어난 나뭇가지들이 처음 입게 된 솜옷이 너무 신기해 자꾸만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었습니다. 멧돼지 일가족이 씩씩거리며 비자나무 밑둥을 들이받기도 하고 청솔모들이 긴 꼬리로 나뭇가지에 쌓인 눈들을 쓸어 내렸습니다. 소나무 껍질 속에서는 아기 송충이의 유충들이 눈을 몇 차례 껌벅거리다가 이내 다시 포근한 잠 속에 빠졌습니다. 개울물들은 눈발이 내리는 곳이면 어디든 졸졸거리며 쫓아갔지요.
도시에서는 자동차들이 엉금엉금 기어갔답니다. 가로등이 왕방울 같은 두 눈을 뚝 뜨고 되도록 먼 곳의 눈발들이 포근하게 땅에 내려 앉는 것을 지켜보았으며 군고구마 장수는 자신이 여태껏 불러 본 일 없는 가락의 콧 노래를 흥얼흥얼 불렀습니다. 괴물처럼 어둠 속에 웅크리고 섰던 아파트들도 이 날만은 히말라야산맥 속의 설인처럼 무슨 신비한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 거대한 설인에게 “거기 한 자리에만 서 있지 말고 좀 움직여봐. 여행을 한 번 해보라구.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은 여행을 하게 되어있어. 맞아. 삶은 여행의 다른 표현이라구.” 누군가 이렇게 말을 건넨다면 정말로 강이나 들판을 뚜벅뚜벅 걸어 먼 여행에 나설 것만 같았습니다.
숙제를 안한 아이들도, 며칠째 피아노 레슨을 빼먹은 친구들도, 엄마 몰래 술값을 많이 지출한 아빠들도 이 날만은 포근한 눈길로 내리는 눈발들을 지켜보았습니다. 모든 사물들이 다 신나고 조금씩은 가슴이 설레였지요.
그런데, 단 한 사람 신나지 않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바로 경찰대장이었습니다.
웬 낯선 꼬마 녀석이 나타나 자신이 가장 아끼는 장비인 물대포와 최루탄 발사기들을 못쓰게 만들어 버리기 전까지 그는 상관들에게 가장 신임받는 경찰대장이었습니다.
특히 그의 데모 진압 솜씨는 일품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직접 고안한 여러 가지 방법으로 데모에 나선 사람들을 포위하여 물대포와 최루탄을 쏘았는데 한 번 포위에 걸린 사람은 빠져 나가기가 힘들었습니다. 어떤 경우엔 쓰러진 사람들을 곤봉으로 두들겨 패기도 했지요.
그러나 경찰대장의 이러한 행동은 신문이나 텔레비전에 잘 보도되지 않았답니다. 경찰대장이 신문이나 텔레비전의 기자들에게 데모 진압 전후에 하얀 봉투를 하나씩 돌렸는데 그 봉투 속에는 텔레비전을 한 대 사고도 남을 돈이 들어 있기 마련이었습니다. 그래서 국민들은 그를 아주 싫어했습니다. 국민들이 그를 싫어할수록 그의 상관들은 그를 더 좋아했지요.
“경찰대장만 믿겠어. 잘해 봐.”
상관들은 경찰대장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경찰대장은 그가 기자들에게 준 봉투 속의 돈보다 몇 배쯤 많은 돈을 상관들로부터 건네 받았습니다.
그런 경찰대장이 처음으로 상관들에게 꾸중을 받게 된 것입니다.
“얼간이 같으니라고. 그래 꼬마 한 녀석에게 당했단 말이야. 이런,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시킨다더니. 당장 녀석을 붙잡아 와. 그렇지 않으면 옷을 벗을 생각을 하라구.”
경찰대장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습니다. 조금만 더 잘해 내면 자신도 언젠가 내무장관이 되어 상관이 될거라는 꿈에 부풀어 있는데 웬 이상한 꼬마 녀석이 나타나 모든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고 말았던 것입니다.
“잡긴 잡아야 할 텐데 무슨 수로 녀석을 잡지? 젠장 물대포에서 꽃다발이 쏟아져 나가다니... 오십 평생에 처음 보았어. 그런데 내무장관은 텔레비전도 안 봤나? 정비 불량이라니. 내 참 기가 막혀서.”
경찰대장은 하루 종일 궁리에 중리를 거듭했으나 무슨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기가 막힌 것은 그날 한강에 출동했던 모든 장비들이 발사만 하면 여전히 꽃을 쏘아대는 것이었습니다. 정말로 정비 불량이 아닌가 하여 엔진이며 조준기며 발사기며 모든 부품들을 새로 정비하고 바꾸었는데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궁지에 빠진 경찰대장은 물대포의 탱크에 물 대신 꽃을, 최루탄 발사기에도 최루탄 대신 꽃을 가득 채우고 발사를 해 보았습니다.
결과는 더욱 기가 막혔습니다. 이번에도 꽃다발과 오색 테이프가 쏟아져 나오는 것은 예전과 마찬가지인데 다른 점은 꽃다발과 테이프 사이 사이에 캔디와 풍선껌, 사과 들이 섞인 채 쏟아지는 것이었습니다.
“우와, 풍선껌이다 풍선껌.”
“이렇게 굵고 맛있는 사과는 첨인데.”
“또 뽑기 캔디도 들어있어. ‘또’를 뽑으면 캔디 하나를 덤으로 더 준다구.”
“뭐? 그게 정말이야? 야! 신난다 신나. 내 캔디엔 ‘또’가 세 장이나 들었어.”
경찰대장의 부하들은 마치 보물찾기하는 아이들처럼 꽃다발 사이를 이리저리 뛰었습니다.
“모두 제자리! 제자리!”
경찰대장이 아무리 악을 써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우리 복돌이에게 또뽑기 캔디를 가져다 주어야겠어. 난 벌써 보름째 집에 못 들어갔다구.”
“나도 마찬가지야. 어제가 큰딸 아이 생일인데 케이크 하나도 사 주지 못했다구. 풍선껌이랑 사과랑 많이많이 주워 가야겠어.”
“다 예쁘지만 이 꽃다발은 정말 예쁘군. 꼭 하와이안 레이스 같애. 자네 딸에게 선물함세.”
“고맙네. 역시 자넨 내 친구야.”
부하들이 정신없이 뛰어 다니는 것을 바라보면서 경찰대장은 그만 엉엉 울고 말았습니다.
“저게 뭐지? 오랑우탄 아니야?”
“글세, 동물원에 있어야 할 오랑우탄이 어떻게 여기 나타났지?”
덩치가 큰 경찰대장이 주저앉아 가슴을 치며 우는 모습을 보고 부하들이 나눈 말이었습니다.
“할 수 없어. 옷을 벗는 수밖에. 하긴 그 동안 내가 국민들에게 너무 했지. 나를 원망할 사람들도 많이 있을 거야.”
경찰대장은 자신의 방 안에서 생각에 잠겼습니다. 내일이면 상관들에게 이상한 꼬마를 잡아 올리겠다고 약속한 날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오늘까지 꼬마의 그림자도 못 잡았으니, 이젠 별 도리 없이 경찰대장의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습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흑흑, 저는 고향에 돌아가 사과나무도 심고 흑흑, 밤나무도 심고 흑흑, 또 감나무도 심고 흑흑흑...”
경찰대장은 감정을 죽여 가며 자신이 국민들 앞에서 읽을 퇴역의 말을 연습했습니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경찰대장의 비서가 헉헉거리며 방으로 뛰어들었습니다.
“뭐야? 이상한 꼬마 녀석이라도 나타났어?” “예. 꼬마는 아닌데 이상한 녀석은 분명 이상한 녀석입니다.”
경찰대장을 찾아온 친구는 외국인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에서 왔다고 소개했습니다. 찾아온 목적을 묻기도 전에 그가 말했습니다.
“내 이름은 마리화요. 암스테르담에는 알다시피 세계에서 가장 큰 꽃시장이 있소. 난 이를테면 그 꽃시장을 움직이는 큰손이요. 흐흐. 듣자하니 경찰대장에게 꽃을 쏘는 물대포가 있다고 하던데 내게 그걸 파시오. 값은 얼마든지 주겠소.”
사내의 말을 들은 경찰대장은 부아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재수가 없으려니 망신을 사도 국제적으로 망신을 사는 격이었습니다.
“나가시오. 당장 나가!”
주먹으로 책상을 꽝 치려다 말고 경찰대장은 사내의 얼굴을 한 번 보았습니다. 그 순간 경찰대장의 머리 속을 스쳐 가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꼭 사겠소? 그렇다면 값을 백 배로 주시오.”
“물론이오. 당장 사겠소.”
경찰대장은 곧장 그의 상관에게 달려갔습니다.
경찰대장의 말을 들은 상관은 얼굴에 웃음을 가득 띄었습니다.
“이상한 꼬마를 잡지 못한다면 그 방법이라도 좋소. 지금 당장 시행하시오.”
‘사람이 그냥 죽으라는 법은 없어. 암 그렇구 말고. 내가 어떤 사람인데, 으험.’
경찰대장은 사내를 데리고 물대포와 최루탄 발사기가 있는 곳으로 데려갔습니다.
“발사!” 하는 소리와 함께 꽃다발과 오색 테이프들이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암스테르담에서 온 사내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이건 세계적인 보물들이야. 몇 억 달러라고 해도 아까울 건 없지. 난 세계적인 갑부가 되는 거라구. 바보 같은 친구들. 이런 보물을 팔아 넘기다니...’
사내가 돌아간 지 정확히 일주일 뒤에 경찰대장은 훈장을 받게 되었습니다.
왜냐구요?
물대포와 최루탄 발사기를 판 돈으로 꼭 백 배의 물대포와 최루탄 발사기를 수입해 왔기 때문이었습니다. 경찰대장은 그 물대포와 최루탄 발사기를 전국 방방곡곡에 배치했지요. 경찰장비의 완전 현대화가 그의 공로 내용이었습니다. 그 현대화된 장비로 그는 전보다 더 혹독하게 국민들을 탄압했지요. 텔레비전에서는 연일 경찰대장이 나라를 위해 큰 일을 해냈다고 보도했습니다.
그런데 일은 엉뚱하게 번졌답니다.
암스테르담으로 돌아간 마리화가 경찰대장을 사기죄로 국제 사법재판소에 고발했습니다.
고발의 내용은 고철에 불과한 물대포와 최루탄 발사기를 무려 백 배나 되는 가격으로 속임수를 써서 팔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암스테르담으로 돌아온 마리화는 모든 꽃 도매상들을 한 광장에 모아 놓고 자신이 구입한 세계적인 보물 꽃대포를 관람시켰습니다. 도매상들 또한 한국에서 꽃을 쏘는 물대포가 나타났다는 이야기는 세계 뉴스 시간에 들었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좀 과장된 뉴스라고 생각했습니다.
마리화는 얼굴 가득 웃음을 띄며 “이제부터 여러분은 세기적인 광경을 직접 보는 행운을 갖게 될 것입니다” 하고 말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물대포의 발사기를 힘껏 잡아당겼습니다. 소동은 바로 일어났습니다.
물대포에서 쏟아져 나온 것은 분명 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오물덩어리였습니다. 야릇하고 구리한 냄새가 사람들을 향해 쏟아져 내렸습니다.
“이건 오물이야, 오물! 꽃이 아니라구!”
“누가 아니래. 마리화는 사기꾼이야, 사기꾼.”
“꽃을 쏘는 물대포가 있긴 어디 있어?”
국제사법재판소는 경찰대장에게 두 배의 손해배상을 해낼 것을 지시했습니다. 경찰대장에게 그런 많은 돈은 있을 수 없었습니다. 물론 경찰의 예산에도 그렇게 많은 돈을 지불할 능력은 없었습니다.
경찰대장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습니다. 경찰대장의 상관 또한 머리를 감쌌습니다.
흰 눈이 펑펑 쏟아졌습니다.
온 세상이 맑고 투명하게 빛나는 크리스마스 날 오후였습니다. 아사달과 민세는 하얗고 큰 건물 앞에서 다른 많은 사람들과 함께 서 있었습니다. 이윽고 큰 철문이 열리고 옷가지와 책보따리를 든 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사람들 속에는 민세의 엄마와 아빠도 섞여 있었습니다. 이 때 “펑펑” 하는 물대포 소리와 함께 하늘에 또 한 번 꽃다발의 축제가 벌어졌습니다. 흰 눈발을 배경삼아 노랗고 빨간 꽃송이들은 또한 하늘에 아름다운 글씨를 새겼습니다.
즐거운 크리스마스!
억눌린 사람들에게 평화를!
힘없는 사람들에게 자비를!
쓸쓸한 모든 이들에게 사랑을!
물대포의 포신 위에는 한 작은 소년이 서있었습니다. 이 날 오전 국제사법재판소의 증인 재판관과 마리화 일행, 그리고 경찰대장과 그의 상관이 함께 모인 자리에서 아사달은 힘껏 물대포의 발사기를 잡아 당겼습니다. 포신에서는 어김없이 꽃다발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모든 억압 받는 이들에게 자유를!”
“채찍을 든 모든 이들에게 자비를!”
꽃다발들은 하늘에 또렷한 글씨를 새겼습니다. 경찰대장과 그의 상관은 고개를 수그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