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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주사 혜광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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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삼소 - 김영옥 1998년 07월 197호
산이 숨을 쉰다. 땅은 얼어붙고 짐승도 긴 겨울잠에 들어 근기를 아낄 때, 그 이치를 따라 초목은 나뭇잎을 떨구고 땅의 물기를 자아올리는 일을 그칠 때, 천지가 백골만 남아 본체를 드러내 보일 때가 바로 엊그제 같더니, 고개 한번 숙였다 문득 눈을 들고 본즉 산야가 판이해졌다. 뭇생명 그렇게 품 깊이 보듬어 강퍅하더니 하늘 아래 그려 놓는 산의 선이 그다지도 포근해졌다. 수명은 한정되나 생명은 끝이 없다 하였다. 묵은 등걸의 기억은 간 데 없고, 이 철에 보여 주는 저들의 자태는 생명감으로 가득 차 눈부시다. 가파른 계곡 사이로는 그늘이 깊어 웃자란 초목이, 충만히 볕을 받는 곳에는 다부지게 잎을 피운 것들이 저마다 다른 형상으로, 그러나 초록 한가지로 어우러져 부푼 몸이다.
낮이 가장 길 무렵, 자라기를 멈추고 한숨 돌리는 밤은 짧으니, 땅에 뿌리를 박고 사는 것들이 한낮에 보여 주는 몸짓은 저토록 생생하다. 사람으로 치면 장년을 넘보는 청년의 때이다. 그맘때야 겨냥하는 과녁이 분별없이 멀고 높을 때이니, 제가 스스로 지어 놓는 광풍에 어지러이 휩쓸리기 잦을 때이다. 그렇구 말구. 저기 저 산 좀 보아라. 평지는 고요하건만 먼뎃 산에는 바람이라도 지나는지, 그 일률이던 초록색이 파도처럼 허연 물결로 젖혀진다.
그러나 이 철을 온전히 제 철로 삼는 것은 땅에 뿌리를 묻는 것들에 한정되는 것은 아닌지. 숙면하지 못하는 날 잦은 사람에게는 긴 낮이 더욱 고단한 것도 이 때이다.
청주에서 속리산 법주사로 내처 달리는 25번 국도를 탄다. 계곡 가장 낮은 곳으로 강처럼 희게 흐르는 길도 지나고, 길 옆에 사열하고 섰는 흰 개망초 무리도 버리고, 반듯이 가둔 물에 제 모습 고요히 비추고 섰는 모낸 논도 뒤로 떠나 보낸다.
출가 사문이거나 우바이 우바새거나 날마다 출가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할 터였다. 그러나 어찌 속리해야만 제 마음 속에 법주法住가 가능하게 되는 것일까. 출가 사문의 길을 작정하고 이 길을 거쳐갔을 사람, 속리하고 떠났다 하나 뒤에 남은 질긴 인연들이 갑절로 제 가슴에 얹혀 와 발길 주춤거렸던 일은 없었던지, 수리치고개를 넘으며 생각한다. 산 깊은 곳에 틀고 앉은 절로 이끄는 길에 험한 고개 둔 곳이 여기뿐이겠는가. 그러나 눈 아래 연봉 첩첩하니 나 비로소 속리 중이라고 자신에게 타일렀을까.
가슴을 들먹이며 숨을 쉬어 보이던 산이 멀리로 달아나면서 의연해진다. 그저 윤곽뿐. 그 너머로 펼쳐진 또 한 줄 연봉은 그리움이고, 그 너머 더 옅어진 또 한 줄 연봉은 회한이다. 그 너머는 보이지 않으니 망각이리라.
작정한 길이기는 하나 그것이 쉽기만 하겠느냐고, 보은에 이르러 평탄했던 길이 속리산 초입의 열두 구비 말치고개로 접어들면서 가팔라진다. 마지막 고비다. 주라발이다. 금강도로 처음 머리를 자를 때, 마지막으로 삭발되는 정수리 부분이다. 마지막으로 넘어서야 첫발 뗄 수 있는 고개이다.
말치고개를 멀미가 나게 꼬불거리고 넘고 나면 바로 절의 입구가 된다. 산중이면서 가람이 자리잡은 터가 이토록 평평한 곳이 다시 없으니 허탈할 지경이 된다.

제 뜻이라고 할 만한 것이 아직 서기 전, 이목구비가 그저 한가지로 둥굴둥굴하기만 한 아이 태를 벗기 전, 열세 살 어린 나이로 어미 손에 붙들리어 산문에 들이어졌으니 겹쳐져 희미해져 가는 산을 회한으로 볼 일도 없었을 것이다. 키가 작아 앞줄 신세를 면치 못하는 체구이나 성품은 불 같아 뒷줄 덩치 큰 아이를 일쑤 때려 눕히니, 갑절로 호된 되갚음을 당하곤 하는 자식의 앞날이 염려되어 속가의 어머니는 그를 뚝섬 봉은사에 “갖다 맡겼다.” 그리 시작된 인연이라고 그 뜻이 경박할 것인가. 이 곳 법주사의 주지 소임을 맡은 지 두 해가 넘는 혜광스님. 42년생이니 올해로 속랍이 쉰여섯, 승랍이 마흔 해를 훌쩍 넘겼다. 그 동안 몸은 크게 키우지 못했다 하나 “시주밥 축내고” 살았음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이 공심 하나로 살아온 바, 그의 삶은 여법하고도 다부지다.
그 동안 서른 해 가까이 사숙들이 주지 소임을 맡아 홍법과 대중 외호에 애를 써 왔지마는, 그의 부임은 그 뒤를 잇되 “세대 교체” 라 할 만한 것이어서 문도들뿐 아니라 사부대중이 그에게 거는 기대가 작지 않다. 이 곳에 머무는 대중의 수효는 일흔 명 남짓, 일을 거드는 속인만도 예순이나 된다니 본절이라 하나 식솔 거둘 일도 만만치 않을 터였다. 경허-만공-보월-금오스님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금오문중”, 선교겸수와 포교라는 문중의 세 가지 전통을 받들어, 소임을 맡은 뒤로 첫번째로 한 일이 선방의 문을 다시금 연 것이었다. 그 동안 청동미륵불을 조성하면서 재정이 어려워져 일시적으로 폐방이 되었던 것을 총지당 넓은 당우를 선방으로 삼게 함으로써 선사였던 금오스님의 손상좌된 도리를 다했다. 혜남 강주 스님을 모시고서 학인도 서른 명으로 늘였으니, 개혁 종단 이후 엄격해진 강원 규모에는 아직 조금 못 미친다 하나 올 여름쯤이면 큰 무리 없이 성원이 될 것이라 했다.
강원의 경우, 학인의 수효가 모자라 폐강 지경까지 간 것을 교육원을 상대로 끈질긴 노려을 한 끝에 유예 기간을 얻어 낸 것이다. 사세나 전통에 따라 방부를 들이려는 학인의 수효가 절마다 질정이 없으니, 종단이 그 동안 애를 썼다고는 하나 사전 조사와 심사 기간이 그가 보기에는 미흡하고 성급하여 결정에 따르기에는 섭섭한 마음이 컸다. 그러나 그 자신도 이즈음 나라 안에서 방부 들이려는 학인의 수효가 가장 많다는 해인사 강원 출신이다.
불제자로서 첫째 가는 공덕은 불법을 제대로 그리고 널리 펴는 것일 터이니, 부처님이 깨닫고 난 뒤에 다섯 수행자를 상대로 법륜을 굴린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 일을 처음으로 시작하시기 전에 얼마간 침묵을 지킨 것은 법륜을 멀리, 그리고 힘차게 굴리기 위한 심호흡 기간이었을 것이다.
지난해 사월, 청주에 나라 안에서 네번째 불교 방송국이 개국되었다. 이로써 충청권 일백이십만 중생들이 법음을 손쉽고도 가까이 접할 수 있게 되었으니, 부임 뒤 그가 일궈 낸 성과 가운데 손꼽을 만한 것이 되었다.
그 옛날, 경주가 연이어 지어진 기와집 처마 아래로 비를 맞지 않고도 지나다닐 수 있던 시절, 가람은 평지 한가운데 지어져 부처님을 경배하는 일을 삶의 중심축으로 삼았던 때와는 시속이 엄청나게 달라진 이 때에 전파 매체는 가장 효율적인 포교 방법으로 볼 만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일방적으로 전하기만 하는 방편이 아니라, 온전하고도 살아 있는 매체로서의 기능을 다하게 되는 것은 운영위원장 소임을 맡고 있는 그의 몫으로 남을 터였다.
호서 제일 가람, 일주문에 걸린 편액에 적힌 글귀이다. 그것이 편액의 글자로만 머무르지 않기 위해 또 한 가지 구상 중인 것은 군, 시, 도 단위의 청소년 법회를 발대하는 일이다. 그 일과 병행하여 교육과 실천행을 아우를 대단위 종합 수련원을 건립하려 한다니, 그 일이 이루어지면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포교의 든든한 근거지가 마련되는 셈이겠다. 그러나 나라 전체가 유래 없이 어려운 형편에 빠져서, 그의 구상대로라면 적잖은 경비가 들 이 일은 언제 마무리를 보게 될지. 법회를 거르는 일이 없던 신도가 어느 날부터 얼굴이 보이지 않아 알고 보면 부도를 당했다는 것, 사찰의 수입은 “딱” 절반으로 줄어 버려 그가 구상 중이던 이런 저런 일들을 밀쳐 두고 볼 수밖에 없는 어려운 때, 그는 탄식한다. 석복惜福하지 않은 업보 탓이라! 출가자나 재가자나 할 것 없이 “비상 걸린 줄도 모르고” 참회커녕 아직도 요순 시를 살고 있는 줄로만 안다고 그는 한탄했다. 피할 수 없는 일 아니면 외국 나들이도 삼가고, 이즈음까지 급한 볼일 아니면 대중 교통을 이용하기 주저하지 않으니, 검약이 별난 미덕으로 떠받들리는 법이 없던 어려운 시절을 겪어 냈기 때문일까.
요즘이야 행자들이 공양간에서 여섯 달 겪어 내기도 힘들어 하지만, 옛날에는 석삼년 공양주 노릇을 해야만 수계를 받을 수 있었다. 어머니가 바라던 대로, 노스님 모시고서 어울릴 만한 또래도 없이 살다 보니 결기가 눅어지고 “푹 삭아서” 중노릇할 만해졌을 때가 언제인지 자신도 가늠하기 어렵다. 그저, 오늘 이만큼 살게 된 것은 행자 때 지은 복 때문이 아닌가 싶다니, 그가 오늘에 펼쳐 보이는 평상심과 경륜에 이르기까지 어린 나이에 겪어냈을 어려움을 짐작만 할 뿐이다.
해인사보다는 여기가 공양이 나을 게야. 해인사 스님을 앞에 앉혀 놓고 웃으며 그가 하는 말이다. 돌아가며 별좌나 원주를 살아야 했던 60년대 해인사 강원 시절, 산비탈을 훑어 나물을 뜯어서라도 국을 바특하게 끓여 내고, 절이 살림을 잘못 살아 망하면 망했지, 잘 먹어서 망하는 법은 없다며 재무 스님과 싸움까지 해 가며 원주 소임을 보았던 것은 우선 자신의 배고픔 때문은 아니었던지. 그렇게 어렵던 시절이었다.
자운, 영암, 월산 스님 등, 노스님 모시기에도 큰 어려움이 없더라 했다. 지성을 다하다 보면 어른이 이르기 전에 의중이 앞서 짐작되었기 때문이더라 했다. 한 번 눈에 나면 두 번 다시 눈앞에 두고 보지 않는다 알려진 영암 스님은 그 매운 성정대로 살림 사는 것이 깔끔하여 오늘에까지 “소태 김치” 로 회자되거니와, 그 어른에게 큰 공경을 치른 것도 그 무렵이었다. 수각의 상통 아래 하통에다 생각 없이 신던 양말을 빨다가 들키어 대중 공사에까지 붙여졌던 것이다.
그러나 스무 해도 넘는 세월 보낸 뒤로, 영암스님이 총무원장으로 있을 때에 조계사 재무를 보던 그에게 결재 도장을 맡기어 주위를 놀라게 했다. “자칫하면 업을 짓는 자리” 임을 알아서, 그만둬 달라는 말 듣기까지 소임 맡아 눌러 지낸 적이 없는 깍듯한 공심을 영암스님이 모르게 되지 않게 된 연후의 일이었을 것이다. 법주사, 조계사, 불국사, 석굴암 등, 또래에 비해 큰 절 재무를 그이만큼 많이 산 사람도 없으니 그 소이가 그러했다.
그 마음을 이 날까지 아침마다 예불에 참예하여 다잡는다. 예불 참예는 시은으로 사는 이의 기본이자, 그에 나태함은 “복 엷어질 길” 로 나서는 일이라 여기어 그런다. 서울 같은 큰 도시에서는 하룻밤 바깥 잠도 쉬 이루기 힘드니, 조용히 사는 것도 큰 병이라 생각해 본다. 한 달에 두 번 큰절 법회 말고는, “말주변이 없어서” 말사 법회 자리도 마다고 한가히 산다지만, 큰절 주지 소임이 말처럼 그렇게 한가히 날 보내게 할 자리이겠는가.
양명하고 원만히 살아가려 애쓰지만 자신도 모르게 “감정” 이 나버리는 나날, 어쩌면 그렇게 사람들은 벗겨도 또 벗겨지는 양파 같은지, 늘 저만 “밑천 드러내어” 밑지는 것 같은 나날, 근엄할 때는 근엄하고 악의 없는 “욕” 은 잘 하셨어도, 얼굴에 미소가 사라지는 법이 없던 자운스님이 다시금 그리워지는 나날을 보낸다. 그저 “구역을 잠깐 벗어나서” 연락도 없이 사형이나 도반의 절을 찾는 일을 유일한 낙으로 삼고 지낼 뿐이다. 기별 없이 찾아간 그가 부재중이라 허행하게 되더라도 그런다.

오늘 그가 객을 대하고 앉은 방은 별다른 세간도 꾸밈새도 그저 단촐하다. 창가의 좌탁 위에 “오렌지 구리무” 냄새가 난다는 난분 하나, 횃대 위에 두어 벌 걸린 가사 장삼, 그가 좋아하는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 붓글씨 한 점. 그리고 빈 벽과 방 안 가득한 햇살뿐. 끝 모르게 채우려 들기만 하는 속인들에게, 텅 비어 가득 차는 아름다움을 말없이 일깨워 준다.
집 뒤로 인부 서넛이 기와를 갈고 있더니, 방안에서 내다보이는 처마 선이 삐뚤빼뚤하다. 개보수할 예정이라는 낡은 요사채는 당호가 따로 없이 그저 “대방” 이라 부른다 했다. 아름들이 수목이 가람의 주위를 에워싸고 있기는 해도, 국보와 보물급 문화재가 널려 있으니 달리 장엄할 일 없기는 해도, 법당 앞 도량도 그러하고, 이 곳 미음 자 요사채 안도 쏟아지는 양명한 초여름 햇살뿐, 나무 한 그루가 없다. 이 곳이 배 형국인데 배 안에 누가 나무를 키우는가, 그가 말한다. 어려운 살림 꾸려 나가기도 벅찬데, 꽃타령 나무타령이나 하고 앉았는 한심한 객에게 그가 말한다. 조오 보이는 문 밖 앵두나무에 앵두가 열려 있으니 나가 따 잡수셔.
오늘 이 법주사 용선에는 중학생인 듯, 수학 여행 온 아이들이 한 무리 가득 찼다. 참관은 염두에도 없는 듯, 그저 과꽃처럼 웃고 서서 사진 찍기만 바쁘다. 기억이란 희미해지다 어느 때에 가뭇없이 사라지고 말 터임을 그들은 아나 보다. 스물다섯해 만에 이 곳을 다시 찾아왔어도, 민박집 곁을 흐르던 요란한 개울물 소리뿐, 기억 나는 것이라고는 한 가지도 없는 쓸쓸한 일도 있음을 그들은 미리 아나 보다.
저녁 공양 시각 직전, 팔상전 주위는 저녁 이내와도 같은 신비한 보라색 기운이 감돌고, 이 방 저 방에서 나온 스님들이 법당 앞 보리수나무 밑에 모여 앉아 있다가 약사전 맑은 토담 옆을 지나쳐 돌아간다. 그들의 염의 차림, 염의는 괴색壞色이니 청황적흑의 네 가지를 한데 섞어 만들되, 색의 낱낱을 모두 다 무너뜨려야 만들어지는 것이다. 색색의 뜨거운 번뇌를 모두 여의어 맑고 한적한 색이니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빛깔일 터였다. 염의 입은 스님들은 이 배의 힘찬 뱃사공일 터였다. 아이들이 과꽃처럼 환해 보임은 그 때문일 터였다.


글/김영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