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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 지금은 여름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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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이야기 - 자현 1998년 07월 197호
삼천리외三千里外 심친일편心親一片
운간명월雲間明月
삼천리 밖에서 한 조각 구름 사이
밝은 달과 친히 지내고 싶소.
양사언
계룡산은 주봉인 상봉에서 삼불봉三佛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닭의 벼슬을 쓴 용과 같다 하여 계룡산이라 한다. 이 산하에 닭이 알을 품은 듯 자리잡은 진인출어동방眞人出於東方이라 하여 동東, 사판국청학귀접형寺版局靑鶴歸接形이라 하여 학鶴을 따서 ‘동학사東鶴寺’ 라 한다.
또한 문필봉文筆峰의 기를 받아 책을 열심히 읽으면 문리文理가 나서 강백이 된다는데, 그래서인지 옛부터 대강백은 동학사를 거치지 않은 분이 없다.
천 년 어둠을 한순간에 밝힐 수 있고, 세상의 모든 업식이 녹아 내릴 듯 옥과같이 흐르는 동학계곡 물소리에 여름 산자락은 눈부시게 푸르러 찾는 이의 마음을 맑혀 준다.
이러한 곳을 찾아 세상 사람들은 더위를 피해 오는데 스님들은 더위를 피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또 피한들 피할 수 있는 더위인지.
여름날 학인 스님들이 경전 삼매에 드는 것은 더위를 피하는 방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계곡에 물이 있다고 관광거리로 발을 담글 수도 없고, 넓고 푸른 바다를 찾아갈 수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시원한 에어컨이 가동되는 곳을 찾아 휴식을 취할 수도 없으니, 다만 지금 처해 있는 이 자리에서 오롯이 수행하는 마음으로 더위를 견딜 뿐이다.
원효스님의「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에 보면, ‘참기 어려운 것을 능히 참는 것이 보살의 행이요. 말할 수 있는 것을 능히 말하지 않는 것이 대인의 마음이다’ 하셨다. 출가 사문의 공부는 참고 견디는 그 자체가 목적이며 수행일 뿐이다.
새벽 3시. 우주 법계의 미혹함을 깨우는 목탁이 하루를 열고 삼경 방선 죽비 일성一聲과 함께 하루를 닫는다.
특히 동학사의 여름철은 유난히 비가 잦다. 새벽이면 안개비, 아침이면 보슬비, 낮이면 가랑비, 오후면 주룩비, 장대비… (늘 그렇지는 않지만). 장대 같은 빗줄기가 쏟아지는 오후. 그 속에서도 더위와 습기를 벗어버리기라도 하는 듯 목청껏 ‘관세음보살’을 외치는 스님이 있는가 하면, 통강統講을 바쳐야 하는 부담감 때문에 미리 대비하느라 우산을 받쳐들고 열심히 학과목을 외우는 스님도 있다. 가장 학인스님다운 마음가짐이며, 또한 강원생활의 모습이기도 하다.

뙤약볕이 쪼이는 날이면 다반사가 예사롭지 않다. 공양을 장작불로 짓는 관계로 새벽이면 이불을 갠 뒤 바로 달궈진 큰방 바닥에 예불을 하기 위해 앉아서 땀으로 샤워도 아닌 목욕을 해야 한다. ‘부처님, 예불은 이렇게 해야 합니까?’ 바닥에 조그마한 손수건이라도 깔고 앉으려면 상반 스님들과 소임자 스님에게 보일새라 가슴이 조마조마하니 아예 생각으로만 그쳐야 한다. 또 방사가 협소하여 발우공양을 하려면 무릎과 무릎을 좁혀야 하는 것도 더운 여름날에는 마음 쓰이는 부분인데 그 가운데에서도 상반 스님과 소임자 스님들의 경책은 끊이지 않는다. 취침을 위해 큰방에 한쪽 발만 들여 놓아도 더운 공기가 ‘훅’ 하고 숨막히게 다가온다. 잠이 들 때까지는 오로지 주력에 힘을 기울여 세상의 소리를 들어 주시는 분을 부른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그런 가운데도 어쩌다 수업이 없는 날이면 경經반 스님들은 경전과 다구茶具를 바랑에 담아 한적한 계곡을 찾아 산다회山茶會를 열며 깊은 정신의 지인智人이 되어 보기도 한다. 아직 도량이 익숙하지 않은 치문반 스님들은 솔밭에서 다음날 배울 학과목 공부를 하며 모처럼 한바탕 소리내어 웃기도 한다. 서장반 스님들은 상반 스님들 눈치 보고 아랫반 스님들 배려하느라 우왕좌왕 도량의 안식처를 찾다가,「서장」을 챙겨들고 그늘진 강설전 뒤에 모여 대혜스님께서 말씀하신 선도리禪道理를 다시 새긴다. 어딜 가든 옆에 놓고 보아야 한다는 선의 열 가지 병통病通을 놓고 ‘이 도리道理가 무엇인고?’ 알음알이 짓지 말라고 다시 확인시켜 주시는 중강 스님의 말씀도 잊은 채 또다시 문자에 빠져 ‘아하! 이것이 바로 이것인가’, 사량으로도 잡히는 대답. 하지만 그 대답은 금방 사라져 간다. 깨달음은 결코 관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언어도단의 자리에 있는 깨달음. 그 길에 이르는 것은 무엇일까. 그 길에 이르고파 서장을 배우는 학인 스님들은 몇 번이고 걸망을 쌌다 풀고, 쌌다 풀어 보지만 그렇게 쉬이 길을 떠날 수는 없다. 서장반이면 누구나 한 번쯤 그려보는 선방에서의 입선. 떠날 듯 머물러 있는 자리이기에 서장반 스님들의 눈빛엔 더욱더 산빛이 푸르게 다가오는 것은 아닌지.
비가 오고 난 뒤에 땅이 굳어 진다고 했던가. 이러한 가운데서도 호흡을 다듬어 서예와 사군자를 그리며 먹색의 조화로움과 붓끝의 놀림 속에서 흐르는 땀방울을 잊기도 한다.
이렇게 갖가지 방편으로써 문필봉을 두드리는데 ‘북바위는 언제나 울릴 것인가. 우리가 듣지 못하는 것일까?’ .
또한 시간에 따라 온도의 차이가 커 동학사 학인 스님들은 겨울 누비를 여름에도 입는다. 누비를 입은 채 덥다고 말하는 스님. 여름이라는 사실을 잊은 것일까. 여름이라고 말해 주었을 때야 비로소 여름? 하며 웃던 스님들.

‘나무 대교주 청정법신 비로자나불…’로 좇아 역대 조사 스님들께 상강례를 올림으로부터 또다시 경전 속으로 긴 여름 피서를 떠난다. 그렇게 또 입선 그래도 그 사이 잠깐의 방선 속에서 탁구도 하고 배드민턴도 하며 더위를 오히려 부르기도 한다.
때로 날씨가 무척 좋으면 분위기 파악(이 눈치 저 눈치를 살펴서)을 하여 치문반 막내 스님들에게 귀띔을 한다. 그러면 입승 스님 졸라서 책과 차담을 챙겨 우리의 정학 코스인 향아교를 넘어 다섯 성인이 깨친 좌대라 하여 붙여진 ‘오성대’ 에 앉아 자유 입선의 즐거움도 맛본다.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그 시간은 아주 큰 기쁨으로 다가온다.
산에 살면서도 늘 산이 그리운 것은 그 곳이 바로 우리의 정학 코스로 정해져 있어서일까!
여름 좋은 날 가운데 하나는 소풍 가는 날이다. 바랑을 메고 발걸음 가벼웁게 나서는 산문. 성지순례를 겸해서 떠나는 소풍은 초등학교 시절 잠못 이루며 하얗게 온밤을 새우고 소풍갔던 시절과 똑같다. 차에 오르자마자 하루의 무장애를 기원하는 뜻에서 기도를 하고, 산문 나설 때의 들뜬 마음은 오고 간데 없이 저마다 잠 삼매에 빠지기도 한다. 함께 오지 못한 소임자에게 조금은 미안해 하며 고프지도 않은 배를 채우기 시작한다.
유일하게 하룻동안 바깥 세상을 구경하지만 일주문이 다가올수록 ‘집에 다 왔다.’ 하며 반가움에 빠른 발걸음을 떼는 것을 보면 ‘우리는 역시 먹물옷 입은 동업중생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또 다시 보인다. 우리 걸어 가야 할 아득히 먼 구도의 길이. 낙락 장송이 되기까지는 모진 더위와 비바람 혹한의 추위도 겪어야 되듯이 우리 또한 그렇게 깨달음을 향해 걸어가야 하는 것은 아닌지.
어느덧 더위가 약간 수그러지는 어스름이 깔리고 ‘책 많이 읽었나‘ 하시는 강주 스님의 말씀이 들려온다. 이렇게 우리는 성글은 것은 익게 하고 익은 것은 성글게 하는 법을 다지며 수행의 결실을 맺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