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덕사에 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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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해인삼매 - 박몽구
1992년 12월 130호
대천 바다로 가는 길 제 아무리 넓어도
정작 보이지 않는 손이 틀어쥔 아가리 앞에
우리는 묶이고 말았거니
어둠의 팔이 완강하게 가두어 버린 물안개 한켠
옷고름 푸는 처녀처럼 걷히며
열린 세상을 헤아려 본 적이 있는가
울 엄니 애잔한 등처럼 꼬부라진
산길 한가닥에 기대어
덕숭산 자락을 더듬으며
햇살이 노곤하게 반질거리는
풀밭에서 한나절 정신을 빼앗기기도 하고
내 여자의 허리처럼 잘 빠진
돌 틈새로 잦아드는 시냇물에 귀를 씻는 일이
우리네 들뜬 이마를 식혀 주지만
한 발짝 물러서면 망각의 강 저편으로
묻혀 돌아오지 않는 것을 너는 보느냐
부드럽고 매끄러운 일
다 흘러간 다음에야
한 말이나 땀 흘리게 한 고갯길이랑
네 여린 살을 물어뜯어
선연한 피 돋게 한
모난 돌이 오래된 지기처럼 다가오는 것을
팔팔한 것들은 우리들을 한 치도 움직이지 못해도
죽음을 앞두고 빨갛게 물들어 가는 단풍 몇 낱이
우리들의 막힌 속을 환히 여는 것을
시작노트
달포 전에 지기들과 함께 덕숭산을 찾은 적이 있다. 처음에는 그저 김일엽이 묵다 간 거소이거니 여기고 올랐다가, 내가 얼마나 눈앞밖에 보지 못하는 사람인가 하는 걸 절감한 적이 있다. 그러길래 옛사람들은 산에 천의 얼굴이 있다고 했겠지만, 물안개가 걷히며 여린 다홍치마 단풍의 장관이라니! 나 자신 세상살이에서도 너무나 쉽고 부드러운 것만 찾았지만, 우리들의 속눈은 오히려 응달에 숨어 있음을 새삼 느낀다. 그것이 나만의 경험은 아니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