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무늬를 남기며 사라지는 해인사의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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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이야기 - 호산
1998년 07월 197호
기와의 골을 타고 추녀 가득 쏟아지는 빗물. 여름은 그렇게 봄의 잔해를 씻어 내리며 온다. 빗물에 번뇌의 흔적들 또한 씻겨 간다. 비가 내린 뒤 산이 맑은 것은 그 속에 살고 있는 스님들의 심성이 맑게 개기 때문이다. 스님들의 마음과 함께 맑게 깨어나는 산. 일체가 오직 마음이라는 이 말씀 한 마디가 비가 내린 뒤 산사에서는 더욱 또렷하다.
내가 해인사에 들어온 지도 여러 해. 계절은 내 등 뒤에서 때로는 꽃으로 때로는 태양과 낙엽으로 그리고 눈으로 사라져 갔다. 계절마다 지니고 있는 독특한 향내와 빛깔들. 시간은 그 때마다 나는 계절의 향연 속으로 안내했다. 그것은 결코 산 중에 살지 않으면 맛볼 수 없는 계절의 선명한 다가섬이었다. 언젠가 도시에서 어느 스님을 만났을 때였다. “도시는 너무 무료해. 계절이 지나는 자취를 볼 수 없으니 말이야. 산에 살 때는 이렇지는 않았어. 사계가 지나는 자취들이 선명하게 보였으니 말이야.” 허탈하게 내던지던 스님의 말씀. 도시, 그 곳은 사람들의 삶을 위한 자리는 분명 아니다. 그 곳은 다만 생활을 위한 공간일 뿐이다. 흙의 부드러움을 잃고 바람소리마저 들리지 않는 집에서 그들이 꾸는 꿈이란 콘크리트처럼 건조할 뿐이다.
산은 아늑하다. 내가 꿈을 꾸면 산은 그 꿈을 노래로 들려 주기도 하고 그림으로 그려 주기도 한다. 위대한 성악가이기도 하고 화가이기도 한 산. 내 생각 속을 떠 다니는 꿈을 노래하고 그릴 수 있는 산 속에서 나는 다시 여름을 맞는다. 해인사의 여름, 그것은 언제나 홍류동 계곡의 물소리와 함께 시작된다. 고운 최치원 선생이 신발 벗고 사라졌다는 홍류동 계곡은 비경이다.
사람이 사라져 신선이 될 수 있는 홍류동 계곡. 나도 이 계곡에 발 담구고 있다가 사라지면 신선이 될 수 있는 것일까. 하 하 하. 괜한 생각이다. 성불을 구하는 이에게 신선은 너무 먼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홍류동 계곡에 발 담구고 있으면 누구나 한번쯤 신선에의 유혹에 빠진다. 길게 드리운 나뭇잎 아래로 가슴을 다 열고 흐르는 물빛. 스님들은 여름이면 그 물빛에 몸을 담구고 한 여름의 더위를 잊는다. 조용히 말없이 물에 몸을 담구고 들어보는 화두. 그 물빛 만큼이나 화두 역시 투명하다. 수중삼매(?) 여름 홍류동 계곡에서 드는 화두는 또 다른 신종어를 만들기에 충분하다. 그렇다. 수행자는 어디에 있어도 수행자일 수밖에 없다. 스님들은 꿈 속에서도 화두를 놓치 않으려 애쓴다. 그것을 몽중삼매라 한다. 꿈 속에서도 물 속에서도 화두가 언제나 성성할 때 수행자는 자신이 수행자임을 스스로 확인할 수있다. 앉거나, 서거나, 눕거나 간에 언제나 화두 하나로 일관할 수 있다면 그 삶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일까.
여름날 홍류동 계곡의 새벽은 물안개로 가득하다. 밤새 어디에 있다 밀려 오는 것인지. 돌연 출현한 안개는 계곡의 물소리만을 남겨둔 채 계곡을 자신의 품속 깊숙한 곳에 묻는다. 안개의 가슴을 한참 헤집고서야 만나는 홍류동 계곡. 그것은 아득히 먼 곳의 풍경처럼 내 시계를 느리고 더디게 밟으며 온다. 계곡이 내 망막에 자리잡기까지 밀려드는 안개의 흩어지는 언어들. 밤새 계곡은 홀로 바위와 무슨 말을 나눈 것일까. 마음 없는 자연의 말들을 나는 알아들을 수가 없다. 아직 마음을 비우지 못한 때문일까. 마음을 텅 비우고 내가 바위가 되고 계곡이 될 수 있다면 안개로 피어난 이 무수한 언어를 다 이해할 수 있을 텐데. 저 멀리서 느리고 더디게 다가오는 안개 속의 계곡처럼 내 가야 할 수행의 길은 여전히 멀기만 하다.
새벽 안개는 풍경을 지우고 나를 만나게 한다. 내 앞에 서 있는 ‘나’. 나는 ‘나’와 대화를 한다. 하지만 서먹하다. 생소하게 서 있는 나에게 나는 건네야 할 어떠한 말도 준비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안다. 살아온 날들을 말하기에도 그리고 살아갈 날들을 말하기에도. 나는 새벽 물안개 속에서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 내 앞에 서 있는 나를 떠나 보낸다. 어떠한 다짐도 못하고 그저 부끄러운 마음 하나로. 단풍잎 같은 얼굴로 ‘나’ 를 떠나보내고 만나는 홍류동 계곡. 계곡은 예의 그 투명한 물빛으로 내 얼굴을 오래도록 닦아 준다.
볕이 뜨거워지고 잠자리가 더워질 때면 해인사는 대대적인 운력을 한다. 겨우내 찬 바람을 막아주던 문풍지를 뜯어내고 바람이 솔솔 통하는 망사천으로 문을 씌우는 작업이 그것이다. 오래 문에 붙어 있던 한지에 물을 잔뜩 먹이고 한참을 기다렸다가 문풍지를 뜯는다. 잘 뜯기지 않은 문틀 부분의 한지는 칼로 박박 긁어내고 물기 먹은 문을 다시 햇볕에 말린다. 그리고 나서 망사천을 문에 맞게 재단을 하고 스테풀러로 박아 뜯었던 문을 다시 제자리에 갖다 단다. 여름문을 해달음으로 해인사의 여름 준비는 끝난다. 문에 망사천을 대는 날 밤 행여 하늘에 달이 밝으면 잠 자리를 설치기 일쑤다. 솔솔 시원하게 스며드는 바람 그리고 하늘의 밝은 달빛. 상쾌하다. 누워서 하늘의 달을 바라보고 있으면 내가 하늘에 누워 있는지 아니면 방바닥에 누워 있는지, 구분할 수 없는 황홀경을 접하게 된다. 망사천을 투과해 누워서 바라보는 달은 서서 바라보는 하늘의 달과는 다른 느낌과 다른 세계를 펼쳐 보여 준다. 이렇게 넉넉할 수도 있구나, 그날 밤 내가 읊조린 독백은 그것이 전부였다.
단촐한 기쁨이 생활의 전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버린 사람의 삶은 언제나 행복하다. 산중의 삶은 우리에게 그것을 가르쳐 준다. 망사천 위에 달 하나 띄워 놓고 행복해 하는 삶. 눈을 감고 그 모습을 그려 보라. 동참하고 싶지 않은가.
해인사 여름의 절정은 하안거 용맹정진에서 찾을 수 있다. 칠일 밤낮을 눕거나 자지 않고 오롯한 마음으로 화두를 들고 성불의 길을 찾아 가는 사람들. 더위는 스님들의 구도의 열정 속에서 스스로 사라져 간다. 더위도, 밤도 낮도, 생명까지도 잊고자 애쓰는 수좌는, 여름 한 철의 공부를 해제를 보름여 남겨 두고 시작되는 용맹정진의 시간 속에서 다진다. 사람들이 모두 피서를 가는 그 때, 선방 스님들은 성불의 일념 속에서 망서의 지극한 경지를 구현한다. 백척간두에 선 스님들에게 더위는 한낱 사치로 전락할 뿐이다. 칠 일 낮 칠 일 밤을 잊은 수좌 스님들의 눈빛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뚫을 것만 같은 투시력으로 빛난다. 오싹하게 시려오는 그 눈빛의 푸르름. 여름날 벽안의 납자들이 뿜어내는 눈빛은 여름 무더위를 지우고 도량 가득 서늘함을 남긴다.
해인사의 여름은 그렇게 간다. 소탈한 사람들의 삶의 자리에서 때로는 아이처럼 또는 벽안 납자의 눈빛 속에서 스스로 자리를 물리는 다소곳한 색시처럼, 그렇게 사라져 간다.
아름다운 무늬를 남기며 사라지는 해인사의 여름. 내년 여름에는 홍류동 계곡의 새벽 물안개 소리에 답할 수 있을까. 새벽 숲 위로 새 한 마리 하늘을 향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