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위를 피하는 법과 잊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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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이야기 - 만우(시인)
1998년 07월 197호
게으를 수 있는 권리가 있다면 머뭇거릴 때가 아니다. 지금이야말로 나른함과 게으름이 시간을 평정할 최적기다. 움직임과 멈춤, 그 사이에서 움직임의 비중에 의해 가늠되는 인간의 삶이, 멈추어 고요함으로 당당할 수 있는 시간이 지금이다. 우주의 움직임이 그치자 두루 퍼져 있던 질료들이 모여 해와 달 각양의 생명체를 이루었다면, 움직임은 멈춤에 의해 생명을 얻는다. 그리고 멈춰 있는 자세는 움직이는 몸짓에 견주어 결코 편안한 상태가 아니다. 자신의 몸짓을 살펴보라. 어떤 자세를 취해 정지된 상황을 유지해 나간다는 것이 어떤 격렬한 움직임보다도 힘들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멈출 때를 알아 멈출 수 있는 사람. 바로 부처의 지위에 오른 사람이다.
균형은 감지할 수 없는 움직임의 다름 아니다. 고요함은 일체의 움직임이 멈춘 상태가 아니라 작용이 정지상태에 가깝도록 빠르기 때문에 움직이되 움직이지 않는 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여름은 움직이되 움직이지 않는 상으로 대처해야만 균형을 잃지 않고 건너갈 수 있다. 몸 담고 있는 이 세계가 가장 뜨거워질 때, 평형을 이루기 위해서는 작은 움직임으로 냉정하게 지켜보는 것이 활로活路다.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풀, 나무들은 이 세계의 격렬한 움직임에 뜨겁게 동참하는 것이 살 길이다. 더위를 일 분도 놓치지 않고 온몸으로 받아들임으로써 비로소 물 많고 나무다운 모습을 갖출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을 포함한 일체의 움직이는 생명체는 이와 반대다. 이 세계가 뜨겁게 달아오를 때 최소의 몸짓으로 식어 있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세계의 체온이 나의 체온이 됐을 때 살아 있음이 아니다. 세계의 체온과 상관없이 불변의 체온을 유지해 나가는 것이 묘용妙用이다.
겨울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이 세계가 차갑게 식어 있을 때 불변의 체온이 삶을 유지하려면 격렬하게 움직여 일정한 체온을 지키든지 아니면 보온장치를 갖추어야 한다. 더위는 멈춤으로 활로를 열고 추위는 움직임이 활로다.
더위를 이기는 방법에는 피서避暑와 망서忘暑가 있다.
더위를 피하는 법을 아는 대표적인 사람이 이태백이다. 이태백의 시 가운데 산중하일山中夏日(산중의 여름날)이라는 시가 있다.
부채 부치기도 귀찮다
웃통을 벗고 숲 속에 들어가
두건은 벗어 석벽에 걸어 놓고
이마에 솔 바람이나 쐐자.
움직여서 더위를 이길 수는 없다. 한순간 시원함을 느낄 수는 있어도 결국 균형은 흔들리고 만다.
부채질은 뜨거움을 식히기 위해 격렬하게 움직이는 몸부림일 뿐이다. 부채바람이 닿는 얼굴은 시원하지만 부채질하는 팔은 더 뜨거워진다. 결국은 부채를 놓고 숲 속에 들어가 이마에 시원한 솔바람을 맞을 일이다.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현대 문명이 개발한 더위를 피하는 방법이 부채질보다 못하다는 데 있다. 대표적인 피서 기기인 선풍기나 에어콘은 뜨거움을 식히기 위해 더 뜨거운 열을 발산한다. 한 쪽의 더위를 식히기 위해 다른 한 쪽에서 엄청난 에너지를 소비하고 있는 것이다. 에너지는 뜨거움의 다른 이름이다.
열을 식히려고 다른 열을 사용하는 것은 전체적으로 볼 때 생명의 낭비일 뿐이다.
한여름 도심의 거리를 걷다 보면 자동차와 대형빌딩에서 뿜어내는 에어콘 열기가 대단함을 느낄 수 있다. 에어콘 냉기보다 에어컨 열기가 도시를 지배한다. 이것은 어리석음의 표본이다. 인간의 두뇌가 문명을 이런 관점으로 이끌고 간다면 말세는 현실로 다가올 수 있다. 조화와 균형에 대한 거시적 안목이 필요한 때다.
더위를 피하는 것(避暑)은 자신의 몸과 마음이 주체가 아닌 환경의 힘을 빌리는 수동적 입장이지만 더위를 잊는 것(忘暑)은 몸과 마음이 주체가 되어 환경의 힘을 이끌어 가는 능동적인 방법이다.
선사의 시詩를 보자.
사람들은 더위를 피해 미친듯 달리지만
선사는 홀로 방안에 있네
선방 역시 더위가 가득하지만
마음이 고요하니 몸 또한 시원하네.
선사는 더위를 피하기보다는 당당하게 더위에 맞서는 방법을 택하고 있다. 이 세계가 생사生死를 피할 곳이 없듯이 더위 또한 피할 곳이 없다. 생사가 고통이듯 더위 또한 고통이기 때문에 이 고통을 피할 수 있는 특별한 곳은 사바세계에 없다. 그렇다면 지금 서 있는 이 자리를 생사가 넘볼 수없고 더위가 엿볼 수 없는 청량지로 만들어야 한다. 뭇 고통이 다다를 수 없는 곳(衆苦不到處)은 억겁을 헤매어도 그 장소를 발견할 수 없다. 고통을 느끼는 이 몸을 부처로 바꾸고 이 땅을 정토로 바꾸는 수밖에 없다. 부처님은 일찍이 이런 상황을 잘 간파해서 한마디로 설하셨다.
“번뇌가 곧 보리요. 생과 사는 하나다.”
부처님이 태어나신 땅 인도는 어떤 곳보다도 차가움과 뜨거움이 격렬하게 부딪히는 곳이다. 고준한 설산의 매서운 추위와 낮은 대지의 맹렬한 더위를 몸소 겪으셨기 때문에 한 걸음 한 호흡도 움직이지 않고 추위와 더위의 고통을 극복하는 법을 깨달아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이다.
바로 무념無念, 무상無想의 언어로 나타낼 수밖에 없는 완벽한 세계의 살핌이 그것이다. 완전하게 자아를 해체함으로써 세계와 하나가 되는 부동의 경지, 추위와 더위를 포함한 어떤 고통도 충만한 법희法喜로 탈바꿈하는 자유자재의 경지라 이름할 수 있을까?
산사山寺는 이러한 경지를 체득하는 자기 발견의 장場이지만 환경적으로는 더위를 잊는 장소가 아니라 더위를 피하는 공간으로 환영 받고 있다. 울창한 숲, 맑은 공기와 물은 수동적으로 더위를 대처해 나가는 최상의 요건이다. 그러나 숲은 늘 중도中道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두려움과 편안함 양면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한쪽으로 기울지 않는 마음의 균형을 회복하는데 숲은 최고의 스승 역할을 한다.
우려하는 것은 숲의 일면만을 보고 능동적으로 더위에 대처해 나가는 망서忘暑의 법을 놓치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세간이 뜨겁다고 해서 산사에 안주해 자신만 시원함을 느끼는 것은 바른 안목이 아니다. 산사에 있든 세간에 있든 망념의 경지를 유지할 수 있을 때 산사는 뭇 삶들의 귀의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더위를 피하고 있는가. 더위를 잊고 있는가. 이 물음을 나 자신에게 던지고 보니 온몸이 화끈 달아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