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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대학교 호진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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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삼소 - 박연진 1992년 12월 130호
“여행 한 번 마음먹고 다녀 본 적이 거의 없어요. 얼마 전 오랜 바람으로 이루어진 인도 여행 말고는... 사실 아름다운 곳을 여행하는 것보다 하고 싶은 공부를 할 때가 어느 때보다 가장 행복합니다.”
외국에서 공부하였으면 여행하는 것도 좋아하겠다는 물음에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를 웃음에 담아 내며 자신을 학승으로 소개하는 호진스님을 경주 동국대학교에 있는 스님의 연구실에서 만나 보았다.
조금은 차가운 초겨울 바람을 맞으며 교정을 들어서는 일행을 맞이하는 것은 여기저기 펄럭이는 대자보와 플랭카드이다. 80년대에 무수히 나부끼던 민주화 투쟁의 구호가 아닌가 하고 지나치려다 얼핏 보니 경부고속전철의 학교 안 통과를 저지하자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드넓은 교정 어디에서 스님을 만날까 하는 걱정으로 여기저기 수소문하다가 다행히도 학교 한가운데의 청색 코끼리상 앞에서 만날 수 있었다. 스님은 무척 고운 회색빛 부정형 알로 만들어진 단주를 만지면서 아사餓死할 것 같으니 우선 점심공양을 하자며 웃으셨다. 두터운 안경을 쓰고 승복 안에 고동색 폴라를 단정하게 받쳐 입고서 작은 보폭으로 걸음하는 스님의 인상은 엄격함과 뚝뚝함이었다. 삶의 희로애락을 접어두고 오직 외길 수행의 길에 서 있는 스님의 모습에 다름 아니지 싶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았다. 자신이 나름대로 규정해 버린 이미지로 인식하다가 뜻밖의 모습과 상황에서 다른 모습으로 만날 때 잘 지워지지 않는 감정을 갖게 되는데, 스님의 웃음은 놀랍게도 소년의 미소와 너무도 닮아 있다. 웃음짓는 얼굴이 참다운 공양구라고 하던가... 햇살 속에 유난히 빛나는 반백의 머리와 웃을 때 손을 입가에 올리는 모습에서 두껍고 딱딱한 경전 갈피마다 미소짓는 부처님의 몸짓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먹물옷 입고 부처님 법 아래 지내온 세월이 만 이십팔 년이라고 한다. 그 세월 동안 한눈 팔지 않고 학문의 길만을 걸어 온 것이다. 반드시 학문을 하리라는 뜻을 둔 적도 없는데 이십팔 년을 책과 함께 해 온 것이다. 스님은 인연이나 업의 지중함을 들어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의 삶을 “거름밭에 우연히 삐죽 생겨난 참외 같은 격입니다”하며 먹물옷 입게 된 불연에 감사한단다. 거름밭에 우연히 싹을 피운 참이라는 역설은 오히려 업과 인연의 순리를 절감하게 하는 비유이다. 진정 업이 두텁지 않고 인연이 조화롭지 않았다면, 어쩌다 고개를 내민 참외가 올곧고 건실한 결실을 맺을 수 있었겠는가. 스님은 1964년 스물세 살 나이로 입산하여 서울 수유리에 있는 화계사에서 계를 받았다. 다음 해에 동국대학교 종비생 2기로 불교학과에 입학해서 69년에 졸업했고 71년 대학원을 졸업한 뒤 72년에는 프랑스 파리로 떠났다. 스님의 경력을 이렇게 줄여서 짧게 말했지만 집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스님의 평생 도반인 법경스님과 프랑스인 여동찬 교수 와의 만남이다. 대학원 과정에서 만난 세 분은 서로에게 튼튼한 울타리가 되어 주었다. 여동찬 교수는 한국 불교의 단점으로 조직성과 체계성의 결여를 지적하면서, 프랑스에 있는 수도원에 들어가서 불교와 카톨릭을 비교 연구해 볼 것을 권유하였다. 이에 두 분은 ‘함께’ 라는 데 힘과 위안을 삼아 낯선 이국 땅에서 새로운 학문의 길을 가게 된 것이다. 당시 승단에서는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절친하게 지내는 신부가 추천하는 수도원으로 들어간다니 오해가 있을 법한 사건(?)이지 않은가. 어쨌든 두 분은 여동찬 교수의 도움으로 간 파리에서 어렵고 힘겨운 세월을 오래도록 보내야만 했다.
베네딕트 수도원. 그곳은 프랑스에 있는 여러 수도원 가운데서도 가장 조직적이고 적극적으로 수도 생활을 하는 곳이다. 하루 일과는 규칙적으로 일곱 번 기도하고,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하루가 노동을 위해 쓰여진다. 인쇄소, 목장, 목공소, 호텔 등 모든 것이 신부들의 손과 노력을 통해서 운영된다. 그들은 자급 자족을 철저하게 지켜서 수도 생활을 치밀하게 꾸려 갔다. 바로 이곳에서 스님은 이 년 반 동안 수도원 생활을 익혔고 무언지 미진한 생각에 폭넓게 공부해보고 싶어서 그 곳을 나왔다. “공부를 해 보고 싶어 파리에 있는 대학 도서관에 갔다가 불교 연구의 방대함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당시 한국에는 원시 불교에 대한 연구가 거의 없었는데 그곳에서는 이미 매우 깊게 연구가 이루어진 상태였습니다.” 한국에서 아직 개척되지 않은 분야를 공부하기로 마음먹고서 법경스님과 호진스님은 각각 역사와 교리를 중심으로 인도 불교를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75년부터 소르본느대학에서 박사 과정의 불교 청강을 허락받아 수업에 참여하게 된 것이 그 첫걸음이었다. 책만 읽고 사람들과 별로 말을 하지 않아서 불어 회화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며, 이에 얽힌 에피소드를 말씀하시며 웃으신다. 학교에서 받는 장학금 말고 수입처라고는 한 곳도 없는 열악한 상황에서 마침내 81년 종교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논문은 불교의 무아 사상과 윤회 이론이 합치되지 않는 모순점이 있다고 보아 신앙이 아닌 학문으로서 이를 연구한 ‘나선비구경에서의 무아 윤회 문제’였다. 통과만 되면 만족하겠다고 했는데 예상 밖으로 최고의 평점을 받았다.
“돈만 조금 더 있었다면 훨씬 많이 공부할 수 있었을 것 같아요. 불어 회화가 특히 아쉬워요. 그리고 십 년 동안 파리 외엔 별로 가보지 못했거든요.” 십 년이란 세월이 결코 짧은 세월은 아니리라. 십 년이나 지내고 온 사람이 그 나라 말을 잘하지 못하는 사실이 못내 아쉽다고 한다. 그곳에서의 생활이 짐작되고도 남는다. 낯설은 이국 땅에서 고개를 앞으로만 향한 채 걸었을 터이다. 옆을 돌아볼 여유란 없었으니. 그래서 스님은 “참 외로웠습니다. 어느 누구도 안부 한 번 묻지를 않아요. 썰렁한 카톨릭 단체의 건물에 여름이면 혼자 남아 있고 크리스마스 때면 떠들썩한 사람들 소리에 더욱 외로웠으니까요” 하며 스님답지 않게 외로움이란 말을 멋적게 꺼낸다. 먹물옷을 입고 파란 머리빛을 하고 거리를 작은 걸음으로 오가는 스님의 모습이 떠오르고 그 위에 외로움의 물빛이 번진다. 하지만 스님의 외로움은 낯선 세계 속에서 우리가 젖어 들어가 쉴 수 있는 우리의 외로움과 닮은 것이라 한결 따뜻하게 느껴진다.
책상 정리를 오랫만에 하셨다고 한다. 스님은 높게 기둥을 틀고 쌓여 있는 서적들을 고마운 눈빛으로 둘러본다. 한 달 용돈을 아껴 책 한 권 산 날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모듬어 볼 만큼 기뻐했다고 한다. 이 연구실에 있은 지 사 년이 된다. 사실 프랑스에서 돌아오고 나서는 산중에 있는 큰 총림에 가서 세상 속에서 묻어난 세속적인 냄새를 빼고 싶었다고 한다. 그러나 전생의 업이야 그냥 두고라도 이승에서 그 동안 행한 것이 학문에 있던 까닭인지 강단으로 향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정신문화연구원에서 이 년쯤 연구하다 84년 중앙승가대학 강의를 맡게 되었다. 당시 승가대학의 시설은 형편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승가 교육의 현실은 스님의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때는 열정적이었어요. 하나씩 일이 진척되어 갈 땐 정말 신났어요” 하며 아이처럼 웃는 스님의 표정에는 망각의 강을 채 건너지 못하고 서성이는 안타까움이 보인다. 스님들에 대한 교육만이 불교를 발전시킬 수 있다는 확신으로 스님은 열심히 매진하였다. 그러나 사람이 사는 곳에는 반드시 있기 마련인 오해와 인연의 부조화가 얽혀서 스님은 많이 지치고 얼마쯤 상처받은 채로 승가대학에서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열정과 희망이 컸던 만큼 그 상처도 컸을 것이다. 잠시 일본에 갔다가 88년부터 오늘까지 이곳 경주 동국대학교에서 강의해 왔다. 일본의 불교 교리 연구는 최고라고 할 만큼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 불교가 지나치게 일본 번역서에 의존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질문에 스님은 배워야 할 것이 있다면 배워야 한다고 한다. “상업적이라거나 세속적이라는 일본 불교의 단면에는 신경쓸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우리 것보다 뛰어나다는 점이 인정되면 마땅히 이를 수용하고 배워야지요.” 바쁘게 되짚어 본 이십 팔 년의 세월을 말하는 호진스님의 배려는 참으로 자상하였다. 손수 대추차를 뜨겁게 달여서 내 주었는데 말씀 중간중간 찻잔 바닥이 맑게 드러나면 스님은 조용히 일어나서 잔을 가득 채워 준다. 혼자 그 오랜 세월을 보낸 분에게 어떻게 이러한 모습이 있을까 싶다. 스님은 기억의 저편을 말하며 그리움에 젖은 웃음을 한참 웃다가는 우리가 시간이 촉박한 것을 배려하여 서둘러 말씀을 이어가곤 하였다.
모든 일에서 가장 먼저 앞서야 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확실한 인식이다. 이것이 바탕이 되어야 적절한 방법론이 성립되고 효과적인 방법에 의해 깨달음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고 한다. 그와 더불어 변하지 않는 진리에 다가서려면 우선 그 시대와 장소에 맞는 방법이 있어야만 하는 필연성을 강조한다. “오늘날 한국 불교가 살아남으려면 우선 승려 교육의 현대화와 불교 교리의 현대적 재해석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보기를 들면 초발심자경문을 그대로 배우는 것은 현실과 너무 맞지 않는 억지 논리를 강요하는 것뿐입니다. 경전에서 보여주는 세계가 지금과 많이 다르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압니다. 지금은 현대입니다. 스님이 돼서 십 년만 산중에 들어갔다 오면 현대인이 오히려 고대인이 됩니다.” 시대를 역행하면서는 교세가 확장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리라. 시대에 맞는 종교가 되어야만 생활 종교로서 자리할 수 있다는 사실에는 모두 공감한다. 그러나 뿌리 깊은 선 중심의 불교를 현대화하는 것인가에 대한 의구심을 보이자, 스님은 변화의 필요성을 인식한다면 그 방법은 반드시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요즘 불교 포교의 현대화가 얼마쯤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불교의 현대화가 자칫 기독교화되는 것이 아닌가 싶은 거부 반응이 있기도 한다. “승려와 불자들의 현대화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쥐를 잡으려면 고양이가 필요합니다. 반드시 검은 고양이일 필요는 없지요. 하얀 고양이라도 쥐를 잡기만 하면 되지 않겠어요.”
스님은 요즘 걱정이 있다. 경부고속전철이 학교를 가로질러 놓이기 때문이다. “여기 경주에 공장이 열 개 생기는 것보다 천 년의 민족 문화가 숨쉬고 보존되고 참다운 교육의 현장이 있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정부의 이번 고속전철 건설 계획은 이러한 경주의 중요성을 모두 망가뜨릴 위험이 있습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최단 거리를 잇는다는 고속 전철에 대한 국민의 기대는 크다. 한국의 교통 문제가 순식간에 해결되리라는 환상이 있다. 그런데 그 고속전철 때문에 동국대학교에 있는 한방병원과 이대와 공대 건물이 사라져야만 한다. 그리고 그 소음을 학생 모두가 감수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일본에 오래된 울창한 숲이 있었답니다. 그런데 그 숲 한가운데로 고속도로가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막대한 예산을 더 들여서 도로를 우회하도록 계획을 바꿨답니다. 돈이야 벌면 되지만 나무는 수십 년 수백 년의 세월이 필요한 소중한 자산이니까요. 그리고 사막에서 오아시스 물을 파는 사람이 있었는데, 갑자기 그 물을 흡수하는 나무들이 괘씸해졌습니다. 그래서 나무들을 모두 베어 버렸습니다. 그 결과야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전통의 도시 경주. 불국사의 역사가 호흡하고 그 정기로 건재하는 그곳을 우리나라 사람이면 한두 번은 반드시 가 보리라. 바로 이러한 곳에서 교육은 앞으로도 영원히 민족의 숨결이 곱게 지켜질 수 있도록 하는 큰 힘이 될 것은 분명하리라. 보통 학교 강의가 다 끝나고도 스님은 연구실에서 늦도록 혼자 남아 책을 보는데 그때가 가장 좋단다. 산사에서의 생활이 그립지 않은지 여쭈어 보니 스님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그립기도 합니다. 사실 저는 수행자라는 표현이 편하지가 않아요. 학승으로 불리는 것이 더 좋아요. 한때는 이 많은 책들이 무슨 소용있는가 하는 회의에 빠지기도 했지만 지금은 단지 다르게 살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루 종일 부처님 말씀만 읽고 말하는 것도 수행하는 사람의 길이지 싶습니다” 하며 예의 그 웃음을 보인다.
눈부시던 하늘에서 스물스물 낮게 교정 위로 내려앉은 검은 구름은 금방 진눈깨비라도 뿌릴 것 같다. 오후 내내 학교를 들뜨게 했던 학생 부부의 결혼식도 흥취만 남겨 놓은 채 조용하다. 자전거로 통학하는 학생들의 건강함에서 느껴지는 초겨울의 여유와 낭만이 좋다. 학교와 인연이 다하면 깊은 산중에 들어가겠다며 웃는 스님의 미소가 오래도록 우리의 곁에 남아서 지치기 쉬운 우리 일상에서 늘 청량한 아름다움으로 피어났으면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