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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암古庵대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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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의 향기 - 시명 1992년 12월 130호
고암 큰스님은 사 년 전 한국에서 올림픽이 치루어졌던 1988년, 가야산에 단풍이 절정을 이루던 시월에 세연을 다하고 우리 곁을 떠나셨다.
선사에 대한 인상을 한 마디로 요약하건대, 그 후학들이 큰스님을 기리기 위하여 스님의 행장과 언행을 모아 놓은 책 이름 그대로 ‘자비보살의 길’이었다.
선사를 평소에 존경했던 많은 사부대중들은 한결같이 스님의 삶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스님의 일생은 그저 천진무구했고 무욕 청정했으며 따뜻하고 겸손하고 또 부드럽고 선순했으며 인욕으로 하심下心하고 부지런하고 검소하였다. 그렇듯 스님은 무소유의 빈가슴으로 중생의 마음을 이끌고 나라의 평안을 위해서 언제나 밝은 지혜를 펼치셨다. 또한 스님의 법문은 대체로 길고 지루한 것보다는 짧고 간명했다. 물론 하근기의 중생으로 진리의 소식을 짧은 이야기 속에서 깨우칠 수 없는 것이었으나 또 그 때문에 자상하고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한 경우도 결코 드문 것은 아니었다. 스님은 주로 불법의 핵심을 짧게 엮어서 중생의 가슴에 전하고자 했다.” (공종원의 추모 글)
공종원 씨의 글은 선사의 행덕行德과 평소의 삶을 적절하게 표현한 글로서, 조금도 과장된 이야기가 아니다.
이렇듯 평생을 참 수행자로 살았던 선사는 1899년 10월 5일 경기도 파주군 적성면 식현리 425번지에서 양주 윤씨 문炆 거사를 부친으로, 하동 정씨를 모친으로 태어났다.
선사의 아명兒名은 지호志豪였으며 어릴 때는 한학을 공부했다. 선사는 속세의 인연이 있었던지 어릴 적부터 스님만 보면 그 뒤를 따라가 보고 싶었다. 그리고 선사는 출가 수행에 대한 동경을 버리지 못해 열일곱 살 되던 가을에 출가의 뜻을 세워 삼각산 도선사와 도봉산 망월사 등지에서 행자 생활을 했다.
열아홉 살이 되던 1917년 7월에 해인사에서 제산霽山화상을 은사로 득도하여 사미계를 받으니, 법명이 상언祥彦이었다. 곧 해인사에서 사미과를 이수했지만, 은사이신 제산스님이 직지사로 옮김에 따라서 운수행각을 떠나게 되었다.
마침 삼일 운동 즈음이었으므로 서울과 개성을 드나들면서 비밀 활동을 하다가 1922년 4월 8일 다시 해인사로 돌아가 백용성 스님을 계사로 대승보살계와 비구계를 수지한 뒤 용성선사를 법사로 모시고 수행에 전념하였다.
1918년 3월 15일 해인사 강원에서 사집과를 이수하는 것을 시작으로 1921년 3월에 대교과를 졸업함으로써 내전內典의 과정을 이수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하안거 결제를 시작으로 황악산 천불선원에서 정진한 뒤 통도사 극락선원, 덕숭산 정혜선원, 도봉산 망월선원, 백양사 운문선원, 천성산, 오대산, 금강산, 묘향산 등 남북의 제방선원에서 25안거를 성취하는 동안 용성, 한암, 만공, 혜월, 제산선사 등 여러 선지식에게서 일념으로 수행 정진을 쌓아 나갔다.
선사는 오후 불식과 묵언을 지키며 아침 공양은 죽과 찬 두 가지, 사시 공양은 찬 세 가지로 하는 고행을 거듭했다. 특히 금강산 유점사에서 만공스님을 모시고 수행할 때였다. 그 때 스님은 선방의 고참이었으나 스스로 대중을 시봉하는 공양주 소임을 자청했다. 금강산의 엄동설한은 그냥 보내기도 힘들었으나 스님은 대중스님들의 신발을 언제나 깨끗하게 닦아 놓았다. 또 새벽이면 물을 데워 대중에 올렸다. 부처님 당시의 우직한 제자 주리반특가가 비구들이 외출하고 돌아오면 언제나 발 씻을 물을 떠다 바친 것을 본받아, 스님은 자신의 내면에 자라고 있는 아만심을 경계하기 위해서 스스로 하심수행을 거듭했던 것이다.
이 같은 수행은 만공스님에게 알려져 “이런 하심이면 뒷날 큰 선지식이 되어 인천人天의 복전이 되리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이렇듯 전국의 제방선원을 두루 거치며 정진하다가 선사의 세수 마흔 살 되던 해 천성산 천성선원에 주석하시던 용성선사를 참방했다.
고암스님에게 용성선사가 물었다.
“조주 무無자의 열 가지 병에 걸리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다만 칼날 위의 길을 갈 뿐입니다(但行劍上路)”
“세존이 영산회상에서 가섭에게 꽃을 들어 보인 뜻은 무엇인가?”
“사자굴 속에 다른 짐승이 있을 수 없습니다(獅子窟中無異獸)”
“육조스님이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 뜻은 무엇인가?”
일어나 삼 배三拜한 고암스님이 답하였다.
“하늘은 높고 땅은 두텁습니다(天高地厚)”
그러고는 스승인 용성선사께 고암스님이 물었다.
“스님의 가풍은 무엇입니까?”
용상선사는 주장자를 세 번 내치며 제자에게 반문하였다.
“너의 가풍은 무엇이냐?”
이 물음에 제자인 고암스님도 주장자를 세 번 내리쳤다. 이를 본 용성선사는 그제서야 ‘만고풍월 萬古風月’이라고 칭찬하고 이어서 전법게를 내려 인가하였다.
부처와 조사도 알지 못하고
머리를 흔들며 와도 또한 알지 못하며
운문의 호떡은 둥글고
진주의 무는 길기도 하지

그리고 송頌을 읊으셨다.
만고에 풍월을 아는 자 누구인가
고암을 독대하니 풍월이 만고로다
용성스님은 인가認可와 함께 고암古庵이라는 당호를 내렸다.
선사는 인가를 받기 전부터 용성선사를 평생의 스승으로 모셔서 스승의 율행을 이어받아 평생 율사로서 품위를 지켰다. 그뿐만 아니라 제산스님과 한암스님에게도 율맥을 받아서 제산스님의 율맥은 관응스님, 한암스님의 율맥은 탄허스님, 용성스님의 율맥은 광덕스님에게 각각 전하여 계맥을 길이 이어나가게 하여서 전계사로서 그 소임을 다하기도 하였다.
1939년 여름부터 해인사, 표충사, 직지사, 범어사 등의 선원 조실을 역임한 스님은 1944년 12월 15일 대선사 법계를 품수하였으며 1952년에는 대종사 법계를 품수하였다. 그리고 1958년에 직지사 주지에 취임한 뒤 나주 다보사, 진주 연화사, 성주사, 김해와 동래 제주 포교당, 해인사 용탑선원 조실 등 소임을 두루 역임하여 불법 홍포를 위해 정성을 다했고, 그 밖에도 각종 불사와 중생 교화에 진력하였다.
또한 1967년 7월에 3대, 1972년에 4대, 1978년에 6대 등 조계종 종정에 세 번 취임하였고 그밖에도 범어사 조실과 금강계단 전계사, 해인총림 제2대 방장과 대한불교총연합회 회장으로 취임하기도 했다.
만년에는 해외 포교에도 열성을 보여 미주 순회 포교를 하였고, 하와이 대원사 조실로서 대원사가 한국 불교의 해외 포교 최대 전당이 되도록 상좌인 대원스님을 도와서 헌신하였다.
1988년 10월 25일 큰스님의 세수 아흔 살에 이르러 문도들을 불러 놓고 후사를 부촉하면서 임종게를 말씀하셨다.
가야산에 단풍잎이 짙게 물들었으니
이로부터 천하는 가을이로세
상강이라 낙엽 지면 뿌리로 돌아가지
구월의 보름달은 허공에 빛나느니
그리고 돌아보며 “잘 살거라. 이 세상 모든 것의 인과는 분명한 법이니라”하며 편안히 입적하였다.
온 종도가 애도하고 종단장으로 다비를 모시고 10여 과의 사리를 내서는 문도들이 이를 해인사 서편에 탑을 세워 봉안하였다. 비문은 일타스님이 지었고 제봉 선생이 썼으며, 여기에는 성철 큰스님의 찬시讚詩도 들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