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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연속성에 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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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의 방 - 임진택 1992년 12월 130호
나는 환경 문제에 관심이 참 많다. 아니, ‘환경 문제’ 라기보다는 ‘공해 문제’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환경이나 공해가 그게 그거 아니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나는 요즈음 이 두 낱말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과 더불어 미묘한 차이점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있다.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라기 보다는 생명에 관한 나름대로의 깨달음(?), 좀더 구체적으로는 생명 본연의 확장 과정인 ‘생식生植’에 관한 것이다.
내가 공해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순전히 아기 때문이었다. 아니, 내가 아기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차라리 공해 문제 때문이었다고 하는 편이 더 옳을 것 같다. 79년 봄에 결혼한 우리 부부가 아기를 낳은 것은 87년 가을이니, 아기 하나 낳는 데 팔 년 반이나 걸린 셈이다. 아기를 좀 빨리 낳는 사람은 여덟 달 반만에도 낳는 수가 있다고 하는데, 그에 비하면 우리 부부는 열두 배나 되는 시간을 들인 것이다. 그렇듯 시간을 들여 낳은 딸아이가 이제 여섯 살이 되어 지금 바로 옆에서 떼를 쓰면서 나를 귀찮게 하고 있다.
나는 아내와 결혼할 때 얼마 동안 아기를 낳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 때는 유신 독재 정권 말기였고, 나는 독재 정권과 맞서 싸워야 하는 어떤 책무를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용을 전공한 아내는 나와 동갑나기로 나이가 비교적 많은 편이었지만 때마침 무용발표회를 계획하고 있던 터라, 아기 갖기를 잠시 보류하자는 나의 제안을 선뜻 받아 주었다. 이렇게 신혼 생활을 보내던 나는 80년 봄 광주항쟁이 일어나 정국을 휩쓸던 격랑의 간접적인 여파로 다니던 방송국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 무렵 다행히 아내가 대학에 전임 자리를 얻어서 나와 안팎을 바꾸어 살고 보니, ‘생계 문제’는 별 지장이 없었으나 ‘생식 문제’는 현실적으로 더욱 난처하게 되고 말았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무리하게 살림을 도맡아 하던 집사람이 그만 고약한 병을 얻어 건강이 몹시 나빠졌다. 갑상선에 이상이 생겼다는데, 이약 저약 다 먹어보고 이병원 저병원 다 찾아다니면서 낫기를 기다렸지만 좀처럼 차도가 없었다. 내가 공해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 바로 이 무렵이다. 아내를 따라 종합병원엘 가 보니 원인을 도무지 알 수 없는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다. ‘대체 이게 무슨 고행들인가. 이 많은 병들에 뭔가 공통점이 있긴 있을 텐데’ 하고 곰곰 생각하다가, 밖으로 나타나는 증세는 가지각색이지만 현대의 모든 문명병이 사실은 광범위한 공해병 초기 증상에 다름 아니라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예컨대 오늘날 가장 치명적인 질병으로 공인 받고 있는 각종 ‘암’ 종류들도 사실은 오염 물질의 호흡이나 식음 때문에 생기는 하나의 공해병이라고 밖에 달리 해명할 방도가 없지 않은가.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대부분 공해 문제에 대해서 관심이 없던 때였다. 사람들의 가치관이 무조건 건설이나 수출을 하자는 따위의 경제 발전 논리에만 빠져 있거나, 기껏해야 더 많은 임금 아니면 바캉스 같은 쪽으로 쏠려 있었다. 사회 의식이 꽤 있는 사람들은 당시의 폭압적인 군부독재에 대항하는 싸움만으로도 벅찬 때였다. 그런데도 나는 그 무렵 아내의 질긴 병고생을 접하면서 오히려 생명의 근원적인 본성, 나아가 생명의 연속성에 대하여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런 관심은 점차 내 아이를 갖고 싶다는 욕구로 점차 바뀌었다. 게다가 주변에서는 결혼한지 몇 년이 되도록 아이를 갖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수근대기도 하고 심지어는 사내인 나의 능력(?)에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농담을 거는 괘씸한 친구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런 오해를 깨끗이 풀어 주기로 마음먹었다.
막상 아기를 낳자고 결심했지만 아내는 몸이 너무 쇠약해져서 우리는 여러 가지 신경을 써야 했다. 좀 역설적인 얘기지만 내가 정작 염려한 것은 집사람의 ‘병’이 아니라 그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먹어야 하는 ‘약’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맨 처음 관심을 가진 공해 문제는 대기 오염이나 식수 오염 따위가 아니라 약품 공해 쪽이었다. 아내는 몇 해 동안이나 약을 먹다가 효과가 없어 결국 목에 칼을 들이대는 수술을 하고 다시 일 년 동안을 기다려 약을 천천히 끊었다. 일 년이 지나서야 우리는 아이를 가졌다. 얼마나 기쁜 일인가. 하지만 아이를 밴 뒤 무사히 아이를 낳기까지 우리 부부는 얼마나 전전긍긍했는지... 옛날에는 아들인지 딸인지 하는 걱정이 앞섰다지만 요즘은 아기가 정상인지 아닌지를 걱정해야 하니, 정말 이런 세상이 제대로 된 세상은 아닐 것이다. 어떻든 우리는 엄마보다는 아빠를 빼닮은 딸내미를 낳았고, 그 아이는 무럭무럭 건강하게 자라서 이제는 꽤 성가신 존재가 되어 있다.
아이 낳은 얘기를 이처럼 자랑하듯 장황하게 늘어 놓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더구나 이 글을 읽는 분들 가운데는 속세를 떠나신 분도 많을 터인데, 어쩌면 가장 관심 밖의 얘깃거리일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아이를 낳으면서 비로소 세상에 대해서 새로이 눈을 뜨게 되었다고 자부한다. 어느 시대나 정치가니 사회운동가니 아는 사람들이 ‘혁명’을 애타게 외쳐보았지만 새 생명의 탄생이야말로 진짜 혁명적인 사건이요, 그 자체가 ‘개벽’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적은 생명의 탄생이라도 그 안에는 우주 생명의 긴 역사와 그 숨겨진 과정이 압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모든 어머니는, 아니 모든 암컷은 ‘혁명가’요 ‘개벽꾼’이다. 마찬가지로 모든 아버지, 온갖 수컷은 혁명가와 공조하는 ‘통일정신’을 이룬다. 그리고 그러한 혁명은 날마다 다반사로 일어난다. 다만 생명의 번식에서도 생명 자체의 본성에 거스르거나 당대 사회 규범에 크게 어긋나는 생식행위는 결코 혁명이 될 수 없다. 우리의 정치 현실에 빗대어 표현한다면 그것은 일종의 반란이요 쿠데타이다. 혁명은 생명과 통하지만 반란은 음란, 쾌락, 자학, 변태, 낙태 들과 같은 궤도에 놓여있다.
생명은 끊임없이 이어지면서 순환한다고 한다. 나는 종교에 대해서 문외한이지만 아마도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설이나 연기설 같은 것이 바로 그러한 생명의 영원성과 확장성, 연속성 들을 간파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고 생각해 본다. 그런데 나는 이 같은 생명의 순환과 확장이 두 가지의 서로 다른 궤도를 따라서 실현된다고 느끼고 있다. 그 하나는 인간이 무기물에서 생성하여 유기물로 합성되면서 활동하는 하나의 생명체를 형성하였다가 다시 해체되어 무기물로 돌아가는 순환 과정일 터이요, 다른 하나는 인간이 각 개체마다 자기의 분신인 후손을 통해 끊임없이 생명을 이어 나가는 다름 아닌 생식 과정이라고 본다. 마치 지구가 자전하면서 다시 태양의 둘레를 공전하고 있듯이 생명의 활동도 그와 같은 우주 자연의 법칙에서 결코 벗어날 수가 없을 터이다.
주제넘게 생명이 어떻고 깨달음이 어떻다고 떠들고 보니 민망하다. 더구나 서두는 환경이 어떻고 공해가 어떻고 제법 그럴싸 하게 꺼내 놓고 말미는 흐지부지 하고 말았으니 더욱 그렇다. 별수없이 결론 삼아 한 마디 덧붙여 본다. 자식 낳아 키우는 일이야 세상 누군들 소홀히 하리요마는 날마다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는 ‘낳고’ ‘먹고’ ‘일하고’ ‘자고’ ‘놀고’ ‘죽는’ 일 안에 생명의 본성이 스며 있나니, 이러한 생명의 본성에 어긋나는 발상이나 행동 혹은 그 어떤 신앙이나 이념이나 체제도 결코 올바른 삶의 방식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