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단상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스님의 숲 - 무무생
1998년 07월 197호
一打(無一物)
만약 사바세계에 부처가 없었다면 중생도 없었을 것이요, 중생이 없었다면 부처 또한 없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와 중생은 악연입니다. 그러나 악연도 인연이기에 부처와 중생은 한바탕 꿈같은 사바세계를 이루는 것이겠지요. 중생이 부처를 이루려는 것도 꿈이요, 부처가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것도 또한 꿈입니다. 그러나 부처가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것도 중생이 부처가 되겠다는 것도 다 인연의 소취이니 이 인연의 굴레에 물들지 않을 수만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참자유인이라 할만하지 않겠습니까.
내세와 현세 또한 이와 같은 인연소작에 의해 지어져 지옥이니 천당이니 집착하니, 이 인연에 얽매이지 않으면 생生과 사死에 대한 두려움 또한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가는 곳마다 세상일에 얽매이고 물들어 쫓기고 엎어지고 넘어집니다. 그 까닭은 무엇입니까 운문스님이 쌀을 지고 가는 학인에게 물었습니다.
네가 쌀을 지고 가는가 쌀이 너를 지고 가는가? 다시 제가 묻습니다. 번뇌가 너를 지고 다니는가? 네가 번뇌를 이끌고 다니는가? 인연에의 집은 나에서 비롯된 것. 본시 너라는 놈 나라는 놈 그 한물건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인연에 물들지도 인과에 떨어지지도 않을 것입니다. 오늘 당신들 이 물음에 답해 보시오.
二打(還歸本處)
나는 너무 오랜 동안 세상 숲 속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 숲 속에서 나는 너무 분주하였습니다.
몸이 바쁜 것이 아니라 마음이 너무나 바빴습니다. 내 마음은 한결 같이 세상잡사에 물들어 있었습니다. 내가 성취하려는 불사도 꿈이었고 나의 인생도 거품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숲 속에서는 내가 나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 숲 밖을 벗어나는 길을 찾았을 때 나는 너무 깊은 어둠속에 갇혀 있었음을 알았습니다. 길이 보이질 않았습니다. 나는 너무도 사람들에 취해 있었고 역사에 취해 있었고 세상에 취해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마음이 자유롭다면 가는 것도 오는 것도 떠남도 만남도 돌아오는 것도 돌아가는 것도 세상일도 진리의 세계도 오뉴월 아침, 소낙비 내리고 그치는 일인 것을 무엇이 그리 오늘 나의 아침을 속박하고 있었는지요. 민들레 꽃씨는 그저 바람에 몸을 맡기이다. 풀싹은 손길을 주지 않아도 저 스스로 자라다가 지다가 하더이다. 하물며 사람이라면 나고 죽음에 그리 연연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환귀본처, 이것도 또한 꿈 밖에서 꿈을 꾸는 일. 당신은 어디로 돌아가고자 합니까?
三打(自由)
신발이 발에 꼭 맞으면 발은 신발을 잊습니다. 허리띠가 허리에 꼭 맞으면 몸은 허리띠를 잊습니다. 정치가 사람에게 꼭 맞으면 사람은 정치를 잊습니다. 도道가 천하에 넘치면 세상은 지옥과 극락을 잊습니다. 모양과 꾸밈은 모든 것을 불편하게 합니다. 꽃이 피는 것은 모양과 꾸밈 때문이 아니요. 잡초가 논두렁 길가에 무성하게 일어나는 것 또한 꾸밈이 아닙니다. 마음 안에 있는 모든 것 드러내 보일 때 꽃은 다시 길을 만듭니다. 그 길은 당신의 편안한 신발이 당신을 이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