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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역舊譯과 신역新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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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권적축 - 원철 1998년 07월 197호
언어는 끊임없이 변해 간다
부처님의 유언인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해 간다. 게으름 없이 정진하라” 란 말씀은 역경에 있어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사실 언어라고 하는 것은 끊임없이 변해 간다. 그래서 한번 번역한 것이라고 해서 그대로 두었다가는 금방 골동품이 되어 버린다. 훈민정음 서문의 우리말 번역인 한글 고문古文을 읽다 보면 아무리 오백 년 전 언어라고 해도 그 원문인 한문보다 더 어렵게 느껴지니 이쯤되면 우리말이라고 해도 외국어나 진배 없게 된다. 언어학자들의 말을 빌리자면 언어는 삼십 년을 주기로 바뀐다고 한다. 언어의 수명 또한 한 세대에 불과하다. 따라서 번역도 삼십 년을 주기로 다시 해야 한다. 그래야 살아 있는 경전 언어가 될 수 있다. 번역도 게으름 없이 끊임없이 정진해야 할 대상인 것이다.

구역과 신역
선종의 대표적 경전인 금강경은 그 번역본이 여섯 가지나 된다. 구마라집본鳩摩羅什本(402년 번역), 보리유지본시菩提流支本(509년 번역), 진제본眞諦本(562년 번역), 급다본笈多本(590년 번역), 현장본玄獎本(663년 번역), 의정본義淨本(703년 번역)이 그것이다. 물론 각 번역본은 그 나름대로의 특징을 가진다. 특히 급다본은 범본에 충실한 직역본이며, 구마라집본은 의역이면서도 아주 읽기 좋도록 만들어져 있다. 현장본은 구마라집본에 오류가 있어 다시 번역했다고 밝히고 있다.
구마라집과 현장 법사는 역경사譯經史의 두 최고봉이다. 한 사람은 서역인을 대표하는 역경가요, 또 한 사람은 중국을 대표하는 역경가이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자기의 번역에 대하여 최고의 자부심을 가지고 기존의 다른 번역본과 차별화를 선언한 점이다.
승우僧祐의「출삼장기집出三藏記集」(대정장55․No2145)에 따르면 서진西晉(265~316) 이전의 번역을 ‘구경舊經’ 이라고 하고 후진後秦(384~417) 이후의 번역을 ‘신경新經’ 이라고 한다. 구경과 신경의 분수령은 물론 구마라집이다. 곧 구마라집 번역 이전의 경전은 ‘구경’ 이고 구마라집 번역 뒤의 경전은 ‘신경’ 이라고 불렀다. 근본적인 차이는 구마라집 이전의 번역은 개인의 원력에 의한 일종의 ‘뒷방 번역’ 인데 반하여 구마라집은 장안長安의 소요원逍遙院이라는 공식적인 국가적 역경기관을 통한 ‘큰방 번역’ 이 차이라면 차이라 하겠다.
구역舊譯과 신역新譯이라는 구분 표현을 쓴 사람은 현장 법사다. 이 또한 현장이 구마라집의 서역적 시각 번역을 중국적 시각으로 다시 번역했다는 자부심의 표현일 것이다. 곧 ‘중국인에 의한 중국인을 위한 번역’ 이라는 말이 된다. 그러나 구마라집 번역을 ‘구역’ 이라고 하고, 당신의 번역을 ‘신역’이라고 한 현장 법사의 금강경 또한 오늘날의 입장에서 보면 또 까마득한 ‘구역’ 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보다 더 재미있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독송하고 있는 금강경은 현장스님이 ‘구역’ 이라고 치부해 버린 구마라집본을 읽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 대중의 입장에서 본다면 구마라집본이 다시 우리에게는 ‘신경新經’ 이 된 것이다. ‘구경舊經’ 이니 ‘신경新經’ 이니 하는 것도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번역의 구조적 한계와 방편적 번역 원칙,「삼불이三不易」와「오종불번五種不飜」
초창기 번역자들이 가장 애로를 느꼈던 것은 시대적 차이로 인한 언어적 이질감이었다. ‘빵’ 이란 말을 ‘밥’ 으로 번역해야 하는지 ‘떡’ 으로 번역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주식이라는 점에서는 ‘밥’ 의 의미가 강하지만 생긴 모양은 오히려 ‘떡’ 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처럼 번역은 문화의 차이는 말할 것도 없고 시간상의 공백마저 줄여야 하는 이중고의 부담을 동시에 극복해야 했다. 게다가 경전을 깨친 자의 언어를 못깨친 자에게 전달해야 하는 애로가 하나 더 겹쳐지니 제대로 된 안목과 사명감이 없으면 할 수도 없는 일인 것이다. 이런 애로를 도안道安 법사(312~385)는 ‘세 가지 바꾸기 어려운 일(三不易)’ 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첫째, 부처님은 그 시대 사람들의 의식意識에 부응하여 경을 설하였다. 그러나 시대의 풍속은 세월에 따라 변하는 것이므로 옛 문장을 현대의 문장으로 바꾸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둘째, 천 년 이전의 성인의 가르침을 백 세대가 지난 말법 시대의 범부들에게 맞게 표현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셋째, 오백 아라한이 모여 결집한 것을 천 년 뒤인 오늘날 몇 명의 역경인의 사고 방식으로 경문을 간단히 취사 선택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점들을 극복하기 위한 가지가지 묘안의 결정체가 현장 법사의 ‘다섯 가지 번역원칙(五種不飜)’ 이라 하겠다.
첫째 ‘다라니’ 류와 같은 비밀스러운 말은 번역하지 않았으며, 둘째 ‘박가범 薄伽梵’ 같은 여러 가지 뜻을 지닌 말은 번역하지 않았으며, 셋째 ‘염부제閻浮提’ 같은 중국에 없는 말은 번역하지 않았으며, 넷째 ‘아뇩다라삼먁삼보리’ 같은 음역으로 이미 보편화된 말은 그대로 사용하였으며, 다섯째 ‘반야’ 를 ‘지혜’ 로 번역할 때처럼 뉘앙스가 가벼워지는 말은 번역하지 않았던 것이다.

과잉 번역은 오히려 대중에게 외면 당한다
한글 대장경을 읽으면서 느끼는 것은 원어를 확인해야만 무슨 말인지 알 수 있는 단어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생사生死’ 를 ‘죽살이’, ‘육안肉眼’ 을 ‘살눈’ 등으로 번역한 것은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비행기를 ‘날틀’ 이라고 번역하는 순수 국어주의는 경국 말을 쓰는 대중(言衆)으로부터 오히려 외면당하게 된다. 지나친 과잉 번역은 결국 생경한 언어가 되어 외국어보다 더 낯설게 느껴진다면 번역어로서의 의미가 없다. 없는 말을 만들어 내는 것보다는 있는 말들이 없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 오히려 더 시급한 일이다.
그 예로 ‘전심專心’ 을 ‘오롯한 마음’ 이라고 한 번역은 참으로 잘된 번역어이다. 신역어인 현장 법사의 ‘관자재보살’ 이라는 말보다 구역어인 구마라집 법사의 ‘관세음보살’ 이 더 대중화된 용어가 된 비력은 무엇일까? 그것도 모자라 지금의 첨단 시대에 와서 어느 PCS 광고 문안으로도 인용될 정도이니.
관음觀音? 소리가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