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은 ‘자연’ 이었다. 자연 속에서, 자연과 함께, 자연처럼, 자연스럽게 살았다. 봄이 오면 산과 들을 헤매며 삐비풀 뽑아 먹고, 진달래 꽃 따 먹고, 솔나무나 찔레꽃 새 순 따 먹고, 송화가루 입가에 묻히고, 칡뿌리 캐먹고, 아카시아 꽃 따 먹으며 꿀 냄새 찾아 윙윙거리는 벌들을 피해 다니며, ‘자연식’ 만 하며 놀다가, 저녁 무렵 어머니가 ‘밥 먹으라’ 부르면, 그것으로 하루를 보내며, 정말 ‘자연처럼 살았다’.
그러나 시절은 ‘슉 슉’ 지나가 산이나 들에서 놀던 시간이 점차 줄어들었다. 학교나 책상 앞에 앉아 있어야 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리고 자연은 조금씩 멀어져 갔다. 코 끝에 풀 냄새, 꽃 냄새, 흙 냄새 대신 잉크 냄새가 더 많이 풍기게 됐다. 한여름 훅!, 코 속을 자극하는 아스팔트 냄새와 함께 도회의 냄새에 차츰 익숙해져 갔다. 도회에서의 삶은 그리움만 쌓여 갔다. 그러나 생활은 그리움마저 잊어버리게 했다. 그러는 사이, 계절은 언제 왔다 갔는지조차 모르게 지나가 버렸다. 세월은 그렇게 흘러 오고 또 흘러 갔다.
요즘은 봄이 언제 왔다 가는지도 모른다. 봄인 듯싶게 바로 여름이 시작된다. 도회의 봄은 특히 그렇다. 굳이 ‘엘니뇨현상’ 이 아니더라도 요즈음 봄은 그토록 빨라 왔다 간다. 그러나 올해 봄은 산하를 아름답게 수놓는 꽃 잔치 못지 않은 또 다른 잔치가 있었다. 사람들이 이루어 놓은 잔치였다. 현란한 ‘말’ 들의 잔치였다. 선거였다. 세치 혀 끝에서 나오는 말들이 세상을 온통 장엄했다. 그러나 그 잔치는 울적한 것이었다. 사람들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공업용 미싱으로 입을 드륵드륵 박아야 한다’ 는 말은 극치였다. 그런 말은 보통 사람에게 해도 화날 말이다. 멱살 잡고 한판 싸울만 한 말이다. 아무 이해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라도 ‘너무 했다’ 고 느낄 만한 말이었다. 그 말을 한 사람도 속으론 ‘아차!’ 했을 것이다. 그러나 쏟은 물 다시 주워 담을 수 있을까. 문제가 되면 변명이 있게 마련이다. 편싸움 하는 동안이라면 자기쪽 사람 편을 들게 된다. 그러나 이번 경우, 편을 든다는 것은 옹색해 보인다. 그것은 인격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말은 사람의 인격을 나타내 준다. 그러나 세상에는 인격까지 포기해야 할 경우는 없다.
그 뒤로 재미있는 일이 일어났다. 꼭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 하는 생각이었지만 사법처리를 한다고 하자 변호사가 나섰다. 그것도 한 시절 ‘인권변호사’ 로 불리는 유명인사였다. 보도에 따르면 ‘진정한 민주화는 말하는 자유를 보장하는 것인데, 말같지 않는 일로 고생이 많으니 내가 변호해 주겠다’ 고 변호를 자청한 전화를 걸어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어지는 보도 내용이 묘한 생각을 갖게 한다. 그 ‘인권변호사’ 는 김대중 대통령의 민주화 운동 동지였으나 아들인 홍모 전의원의 공천문제로 지금은 김대통령과 소원한 관계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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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모 의언은 인권변호사의 말대로 정말 ‘말같지 않은 일’ 로 고생하는 것 같다. 그러나 아무도 그에게 ‘말같지 않은 일’로 고생을 하라고 내친 적은 없다.
갑자기 ‘민주화’ 라는 단어가 나를 혼란스럽게 한다. ‘민주화’ 는 지난 시대, 우리의 꿈이요, 이상理想이었다. 문민시대 이후 민주화와 함께 ‘말하는 자유’ 는 많이 신장되었다. 그리고 오십 년 만의 정권교체를 이룬 ‘국민의 정부’ 아래서 더욱 신장되고 있다. 그러나 나의 ‘자유’ 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준다면? 그런 종류의 말은 민주화나 자유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자유에는 책임도 따른다는 것은 맨날 듣던 말이다. 상식이라는 얘기다. 얼마 뒤 김대통령이 기자 간담회에서 ‘갑자기 입이 이상해지는 것 같더라’ 고 한 우스갯 소리는 아마 ‘미싱으로 입이 드륵드륵 박히는 것 같은 기분 나쁨’ 에 대한 유머였을 것이다.
계절은 벌써 장마철에 접어 들었다. 올해는 장마가 일 주일쯤 빠르다는 기상청의 예보다. 그 동안 엘니뇨인지 뭔지 하는 놈이 지구촌을 온통 헤집어 놓았다. 매일처럼 세계 곳곳에서 자연재해로 큰 피해를 입고 있다는 보도다. 그러나 지난 이, 삼 년 동안 계속되던 엘니뇨가 이젠 점차 소멸돼 간다고 한다. 엘니뇨로 인한 갖가지 자연재해를 세기말의 불길한 징조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자연재해도, 불길한 징조도 모두, 우리 인간들의 상대적 가치에서 비롯된 말이다.
경기도 일산에 사는 사람들은 아침 저녁으로 자유로를 따라 난지도 옆을 지난다. 난지도는 잘 알다시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쓰레기처리장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숲이 무성한 조그만 산이다.
가끔 텔레비전에서 비춰 주는 난지도를 보면 그 곳이 쓰레기로 뒤덮였던 곳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누가 심지도, 가꾸지도 않고 버려 뒀는데 자연은 스스로 심고 가꿔 거친 땅을 푸르게 만들었다. 물론 조금만 파면 쓰레기더미가 나온다. 그러나 그것은 묻어 버려야 할 우리 사람들의 허물이다. 흉측한 자화상이다. 그것들을 무엇하러 파내리. 천 년이든 만 년이든 묻혀져야 할 것들을. 자연은 사람들의 허물조차 넉넉하게 감싸고 안아 푸르름으로 다시 보여 준다.
자연은 건들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라고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냥 두지 않는다. 자연이 아직은 양보할 것이 남아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더 이상 그렇지 못할 지경에 이르면?… 그 때가 되면 자연은 적당한 만큼 인류를 절멸시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