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에 잠긴 별을 하나만 건져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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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이야기 - 김채원
1999년 07월 209호
‘호수에 잠긴 별을 하나만 건져 주세요.’
어느 절의 행자님이 쓴 시 구절이다. 이십대에 우연히 불교신문에서 읽었는데 이직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다. 나는 그때 대학을 졸업하고 이 절 저 절 한 달씩 다니며 지내고 있었다. 절 방을 선뜻 내어 주는 곳이 많지 않아 절 밑에 하숙을 정하고 있으면, 여자 혼자 다니는 것이 수상쩍어 집주인은 나 몰래 우리 집에 전화를 걸어 보기도 했다.
요행히 들어간 절 방에 누워서 바람이 솔나무 숲을 쓸어가는 소리를 비 오는 소리인 줄 알고 댓돌에 있는 신발을 들여 놓으려고 방문을 열었던 적이 많다. 그 때 어둠 속에서 허공으로 불던 바람을 문고리를 잡은 채 내다보던 기억이 어제인 듯하다. 지금은 절 이름들을 잊었으나 독수리도 쉬어가면서 올라왔으리라 여겨지는 높은 암자, 그 깎아지른 암벽에 독수리와 함께 앉아 있기도 했다. 또 어딘가 전혀 이 세상 같지도 않던, 옛날인지 지금인지 미래인지도 모르겠던 높이 솟은 암자의 꼭대기에서 저 아래 세상을 까마득하게 내려다보던 기억도 있다.
무작정 버스를 타고 종점에 이르면 대개 산이 있었고 산으로 오르면 절이 있었다. 한번은 몸이 많이 아픈 채로 떠났는데 도저히 안 될 것 같아 종로에서 버스를 내려 아무 병원이나 찾아 들어가 주사를 맞고 다시 아무 버스나 타고 종점으로 갔다. 그리하여 어느 절에 이르렀는데 절에서 오르는 저녁 연기, 군불냄새, 공양 짓는 아주머니가 많이 아파 보인다고 죽을 쑤어 주던 일, 그 고향 같던 손길도 지금생각 난다. 결국 견디지 못하고 그 이튿날 다시 집으로 돌아오던 일도, 또 절로 올라가는 길이 많은 비에 무너져 내려가던 길을 포기하고 돌아서던 때,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져 인근 마을 집으로 피해 툇마루에 앉아 맨드라미 꽃밭을 보고 있던 때, 소나기가 걷힌 뒤에 그렇게도 맑은 햇빛과 숲속의 오솔길, 풀잎 사이로 흐르는 도랑물의 황홀함이 생각난다.
그 무렵 행자님이 쓴 시 구절을 본 것이다.
‘호수에 잠긴 별 하나만 내게 건져 주세요.’
맑은 호수에서 건지는 별을 상상해 보았는가. ‘하늘의 별을 따다가’는 동요에도 노래에서도 많이 들어 왔지만, 이것은 전혀 다른 어떤 것이었다. 함부로 어디에 내놓을 수 없는 아주 비밀스럽고 신비스런 그 정경. 왜 그런지 모르게 가슴을 에이는-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듯한-그 구절은 내가 멀리 떠나가는 데에 힘을 보태 주었다.
나는 동경, 뉴욕, 파리로 갔다. 꼬박 칠 년 동안 헤매다가 파리에서 뉴욕을 거쳐 귀국하였다. 뉴욕에 언니 집이 있었기 때문이다. 언니는 남편과 두 아이와 함께 가난한 이민 생활을 하고 있었다.
언니 식구들이 다 잠든 뒤에 언니와 나는 스탠드 불빛 하나만 켜 놓고 그 동안의 밀린 얘기를 하였다. 나는 파리에서 가져온 도우넛판을 언니집 포터블 전축에 얹었다. 어느 연극에 나오는 노래였는데 그 극장 앞에서 산 것이었다. 인생의 빛깔을 바꾸고 싶다는 내용의 노래였다.
그 노래가 흘러나오자 뜻하지 않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것은 정말 예상치 못한 눈물이었고 멈출 수가 없었다. 혼자 있는 것도 아니어서 수치스러워 멈추려고 애를 써도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그 때 창피를 무릅쓰고 흐느껴 울던 그 긴 시간이 내게 있었음을 살아오면서 문득문득 떠올리곤 한다. 눈물이 내 안의 무엇인가를 풀어내어 하염없이 흘러가게 한 듯한 그 긴 시간
그 뒤 집에 돌아와 도우넛판이 다 닳을 때까지 그 노래를 들었다. 테이프에 다시 녹음시켜 놓았으나 테이프마저 낡아 버려 지금은 책상 서랍 어딘가에 깊숙이 간직되어 있다. 그러니까 행자님의 시구나 그 노래는 힘들고 방황할 때-이제 보니 그것이 방황이었다-무슨 인연으로인지 내게 닿아온 것들이다. 그것은 내게 닿아 와 힘든 나를 더욱 떠밀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떠밀음과 동시에 그것 자체에 보유 된 힘이 이미 손을 내밀어 주고 있었던 듯하다. 또한 아직 진정으로 절망을 느끼는 지점까지 가 보지 못했음을 일깨워 주었던 듯도 하다.
나는 물론 호수 속에 잠긴 별을 건지지 못했다. 아마 끝까지 건지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정말, 정말 건지고자 한다면 혹 건질 수도 있는 것일까?
맑은 물 속에 손을 넣어 별을 잡고 그리고 건져올릴 때, 물 속에서부터 화아악 물기를 머금고 물기를 떨구며 건져 올려지는 그 비밀스럽고 신비스러운 정경을 마음 깊이 그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