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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이 무너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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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리포트 - 편집실 1998년 04월 194호
불교를 지키고 이어가는 주체는 승단僧團이지만, 그 승단이 유지되도록 하는 역할을 해 준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과 승단이 형성되고 유지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규율이나 질서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규율이나 질서가 효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근본적인 것은 오염되지 않은 양심良心이나 선의지善意志일 것이다.
사실 규율 또는 질서의 유지를 담당하는 자체 경찰기능이나, 이러한 규율과 질서를 해치는 당사자를 강제로 격리하거나 또 그러한 기능과 규제를 할 수 있는 세속 법적 권한도 갖고 있지 않은 종교집단에서 양심이나 선의지가 차지하는 비중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양심과 선의지가 무너지고 난 뒤에는 제아무리 훌륭한 가르침도, 규율도, 질서도 별무소용別無所用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승단의 규율이나 질서, 그리고 승단의 이념적 기준이자 텍스트인 가르침은 양심이라고 하는 기초 위에 서 있는 건물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규율이나 질서 , 가르침과 같은 것을 우리 승단에서는 흔히 법法이라고 부른다. 여기서의 법이 란 단순히 다르마Dharma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다르마를 포함해서 과거로부터 현재, 또 미래에까지 승단을 지켜주고 발전시켜 줄 일정한 기준이자 원칙을 통칭해 이르는 것이다. 설사 승단이 사라진다 해도 다르마는 남는다. 기록으로 문화로, 구전으로 다르마는 언제까지나 존재할 수가 있다. 그러나 좀더 생동적․포괄적 의미에서의 법은 그렇지가 않다. 전통적으로 불교를 신봉해왔던 히말라야 인근의 마을주민 전체가 어느 순간 알라신을 신봉하게 된 것을 우리는 매스컴을 통해 가끔 만나볼 수 있다. 마을의 회관이나 집의 벽에 그려져 있는 불화와 불교 관련 글귀들이 한낱 과거의 흔적으로 남아있을 수 있음을 보았을 때의 충격이란. 진리는 사라질 수 없는 것이지만 그 진리를 실천하고 이어가야 할 법은 얼마든지 사라질 수 있음을 눈으로 확인했을 때의 놀라움이란. 이런 이유 등으로 현실적 의미에 있어서는 다르마보다 법이 더 절실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금 우리의 승단에는 바로 이 법이 무너지고 있다는 우려가 많다. 더 걱정스러운 것은 날이 갈수록 이 같은 우려가 확산 일로에 있으며 빠르게 악성으로 변질되고 있다. 이런 연유로 한국불교의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불자의 숫자는 늘어나고. 절은 번듯하게 커지고 있을지는 몰라도 진정한 의미의 불교 그리고 진정한 의미의 승단은 쇠락하고 있다는 게 불교를 걱정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인식이다.
그러면 지금부터 법이 무너지고 있는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기로 하자. 그런데, 굳이 법이 무너지고 있는 사례를 들고자하는 것은 현재의 불교를 부정적으로 보아 깎아 내리려는데 있지 않음을 밝혀둔다. 양약良藥은 고구苦口의 차원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그만큼 우리의 승단이 더 이상 스러져 가는 법을 곧추 세우지 않으면 안될 지경의 위기에 처해 있음을 드러내 지적하고 하는 것이다.
승가는 화합 대중을 의미한다. 그 화합은 공의제에 근거한다. 모든 문제에 대하여 독단에 의한 결정보다는 대중 전체의 뜻을 묻고 그 뜻에 의해 대중의 문제를 결정하는 것이 절 집의 풍토였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승가에서는 이러한 화합의 정신을 찾아 볼 수가 없다. 그 결과 문제의 해결 방식에 있어서도 자비와 이해의 정신과는 정반대의 양상이 벌어지고 있다. 그것이 못내 안타깝다.
조계종은 3월부터 사미(니)와 비구(니)의 의제를 구분해 시행하고 있다. 사미(니)는 의복의 동정과 소매에 가사색(밤색)의 띠를 둘러야 한다. 또 사미(니)에게는 스님이라는 호칭도 부를 수 없도록 했다. 이렇게 의제와 호칭을 제도로 구분한 이유는 무엇일까. 다름 아닌 위계질서의 혼란이다. 여기서 의제구분을 찬동하는 한 스님의 말을 들어보자. “아주 의젓한 품새를 한 스님이 절에 왔길래 무심코 절집 관례대로 예의를 갖춰 절을 했어요. 그런데 가만히 보니 얼굴이 많이 익었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그 사람이 얼마 전에 우리 절에서 행자를 살다가 행자교육원을 마친 뒤 사미가 된 것이더라구. 사미가 되어 어느 선방에 가서 한철을 나고 온 것이라. ‘이거 이래서는 안 되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더군요. 나는 절대 찬성합니다.” 사실 이 이야기는 승단 내에 팽배해 있는 위계(질서)문란 사례의 아주 평범한 한 가지에 지나지 않는다. 그만큼 우리 승단의 위계는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이다.
사찰이 세속과 다른 점들 중의 중요한 것은 대중 방이 있는 것이다. 대중 방이란 여러 스님들이 한방에 같이 살면서 공부도 하고 숙식도 하는 곳을 말한다. 여러 사람이 같이 살다보니 서로 견제도 되고 경쟁도 되어서 공부하는 데는 대중 방이 아주 중요한 기능을 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중생활을 하지 않고 독살이를 한 스님들은 별로 인정을 하지 않으려는 풍조도 스님들 사이에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오늘날 사찰에는 대중 방이 차츰 사라져가고 있다. 아직도 유수의 사찰에서는 철저한 대중 방 생활을 고수하고 있지만 대개는 그렇지가 못하다는 얘기다. 대중 방을 여러 칸으로 나누어 독방을 만든 절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 방마다 스님 한 분이 배정되어 있다. 방을 들여다보면 으레 고급 다기세트와 텔레비전, 오디오세트가 갖춰져 있다. 장소만 절일 뿐이지 세속의 가정집과 별반 다를 게 없다. 출가의 의미가 퇴색되는 정황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지금까지 나름대로 수행자의 본분을 충실히 지켜왔다고 생각합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아침, 저녁 예불을 거르지 않았고, 선방 안거는 하지 못했지만 나름대로 이 시대에 불교수행자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하며 살아왔습니다.” 최근 어느 스님으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다. 불교운동을 열심히 하며 살아 온 스님으로 자타가 공인할 정도인 이 스님의 말씀은 매우 고맙고 당연한 말씀이 아닐 수 없다. 이런 내용의 말은 스님들 사이에서 그리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만큼 온전하게 수행자 생활을 하는 것이 어려워졌다는 뜻이 함축돼 있다. 그런데 이 스님의 말 중에서 주의 깊게 살펴 보아야할 어휘가 하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바로 아침, 저녁 예불을 거르지 않았다ꡑ는 것이 부지불식간에 온전한 수행생활의 기준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조석예불은 스님으로서는 마땅히 해야 할 기본적인 것이 아닌가. 그런데 조석 예불을 빠짐없이 잘 올리는 것이 말거리가 된다는 것 자체가 그만큼 우리 승단이 기본부터 흔들리고 있음의 반증일 것이다.
불교학佛敎學도 법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학문적 바탕이 없을 때 그 집단의 발전은 있을 수가 없다. 역사적으로 많은 신흥종교(파)들이 한순간 무섭게 발호를 했다가 1, 2백 년 만에 스러져가곤 했음을 우리는 찾아볼 수 있다. 그렇게 된 가장 큰 까닭은 아마도 그 종교(파)를 받쳐 줄 종학宗學이 없었음에서 있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현재의 한국 불교의 미래는 참으로 암담하다. 어느 종단도 그 종단의 이념이나 방향, 종지나 종호를 학문적으로 정리하고 연구 ․ 발전시킬 종학연구소를 갖고 있지 못하다. 역사시대가 시작된 뒤에도 한 종단의 종지종풍을 구전으로, 아니면 관행식의 선사 시대적 수단으로 이어나가려 한다면 극단적으로 말해 그 종단의 발전을 기대하지 않는 게 낫다. 솔직히 말해 한국불교의 학문적 수준은 세계불교학 수준에 비교해 볼 때 빈약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도 이에 대한 심각성을 느끼는 사람은 늘어나지 않는다. 역시 법이 스러지고 있는 좋은 예이다. 법이 스러져가고 있는 예는 이 밖에도 얼마든지 많다. 이러한 상황들을 방치한다면 한국불교는 조만간 벼랑의 위기에 몰릴지도 모른다. 한국 불교가 살아나는 유일한 길은 이제 백척간두에서 진일보하는 확고한 의식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 백척간두에서 떨어져 소멸될 것이냐 아니면 진일보의 대전환을 이룰 것이냐는 순전히 오늘을 사는 승단과 불교도의 선택에 달려 있다.
앞서도 말하였지만 부정적 시각에서 법이 무너지고 있는 사례를 굳이 드러내는 것은 부처님이 이 세상을 고통으로 이해하면서 정법을 이룬 동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불교에도 얼마든지 희망에 차며 밝은 부분이 있다는 점을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여기서는 우리가 모른 새 갖고 있는 여러 가지 부정적 요인, 곧 법이 사라지고 있는 정황을 되새겨 반면 교사로 삼고자 함인 것이다.
법이 무너짐을 알 때 법을 다시 세울 수 있는 지혜도 나오는 것임을 거듭 강조하고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