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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님들, 이제 그만 깨어나시는 게 어떻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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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비평 - 장휘옥 1998년 04월 194호
불자들이 사찰을 찾는 이유가 무엇인가. 사찰이라는 경건한 장소로 몸을 옳김으로써, 주체할 수 없이 쌓여만 가는 욕망과 집착의 때를 씻어내어 참다운 불자가 되려는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서가 아닌가. 기도나 보시의 공덕은 이런 선한 마음을 통하여 집착과 욕망이 소멸할 때 비로소 얻어지는 것이다. 대지를 적시는 빗물 같은 부처님의 자비를 욕망과 집착으로 오염시키는 우를 범하지 않도록 불자들은 노력해야 한다. -편집부


부처님께서 가르침을 펴신 뜻은 단 하나. 괴로움의 완전한 소멸 바로 그것이다. 나뿐 아니라 뭇중생의 괴로움이 한점 남김 없이 소진되었을 때, 부처님의 뜻은 마침내 온전하게 전해지는 것이다. 다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부처님의 뜻이 성취되느냐 않느냐는 우리 삶 속에서 하찮게 생각하는 일들의 올곧은 실천수행 여하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
부처님께서는 괴로움은 불타는 욕망을 잠재워야 그 뿌리가 뽑힌다고 설하셨다. 욕망은 집착을 가져오고, 이 집착은 갖가지 형태의 괴로움을 일으킨다. 스스로 부처님 제자라 생각하는 사람은 이 점을 사무치고 사무치게 마음 속에 새겨, 눈을 감고 걸어도 떠오르는 얼굴만큼이나 늘 가슴에 담아 두어야 한다. 그래야만 누가 보지 않는 일상 생활의 한 모퉁이에서도 집착에 물들지 않는 모습을 유지할 수 있고, 비로소 부처님 제자가 될 수 있다.
불교계의 모 신문에 실린 한 독자의 투고문이 생각난다. 어머니와 함께 철야기도에 동참했던 독자는 법당에서 신도들이 서로 방석을 차지하기 위해 다투고, 여러 개의 방석을 차지한 사람은 빼앗기지 않으려고 모른 척 기도만 하고 있는 것이 너무 속상해서 투고했다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광경은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일이기에 새삼 충격 받을 일도 없는데 굳이 여기서 다시 언급하는 까닭은, 한국 불자들의 자질을 논할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이 점이기 때문이다. 차가운 바닥에서 방석 없이 서 있는 사람들을 모른 채 하며 두, 세 개의 방석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 그들은 도대체 자신들의 그러한 이기적인 행위에도 불구하고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리라 믿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혹시 남들보다 많은 방석 수만큼이나 지신들의 정성이 더 지극하다고 믿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한마디 해 주고 싶다. 당신들이 차지하고 있는 방석 수만큼이나 복은커녕 죄만 짓고 있다는 것을. 남들이 보지 않는 생활 한켠에서도 욕망을 버리고 집착에 물들지 않으려 애써야 부처님 제자라 할 수 있거늘, 부처님 면전에서 방석에 대한 욕망으로 추잡스럽게 오염되어 버린 몰골로 무슨 복을 빈다는 말인가 부처님 제자 될 자격조차 의심스러운 자세로는 아무리 향 사르고 절해도 소원성취는 고사하고 업장만 두텁게 쌓아 갈 뿐이다.
내친 김에 한, 두 가지 예를 더 들어 보자. 지난해 사윌 초파일 인근 사찰에 등을 달러 갔다. 빼곡이 들어찬 등 사이를 지나가고 있는데, 한 중년 여성이 자기 등을 뽑아 들더니 법당 가까이 좋은 자리(?)로 가서는, 마치 도둑질이나 하듯이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이미 걸려있던 등을 슬쩍 밀쳐내고 자기 등을 다는 것이었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한 신자가 그렇지 않아도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는 듯이 똑같이 자신의 등을 법당 가까운 자리로 슬그머니 옮겨 놓았다. 연세 많은 할머니도 아니고, 더구나 두 사람은 행색이나 행동으로 미루어보아 불교교양대학이나 법회에 나가면서 행세께나 하는 사람들로 보였으므로 화가 치밀어 올랐다. 분명히 구석진 곳에 등을 단다고 해서 공덕 짓는 순위가 밀려난다고 배우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에 불교를 가르치는 입장에서 한마디 할 까도 생각했지만 좋은 날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도 내키는 일이 아니라서 그만두었다. 불법은 먼 곳 어느 곳에 초월적으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생활 속에서의 이 하찮은 일들의 실천이 바로 불도 수행의 기본이고 근본이다. 삶의 기본적인 예의조차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무슨 불도를 닦겠다는 말인가?
씁쓸해진 기분으로 법당으로 들어갔다. 아기 부처님을 목욕시키기 위해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줄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줄 한쪽에서 앞뒤가 바뀌었다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오해를 받고 있던 노보살이 곱게 늙은 얼굴에 미소를 지으시며 인자하게 말씀하셨다. “그런 의심하지 말아요, 내 칠십 평생 절에 다녔지만 아직 한번도 새치기한 적 없어요. 절에 복지으러 왔는데 도리어 죄 짓는 행동을 하면 되겠어요.” 노보살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아! 저런 보살님들이 계시니까 한국불교가 이 정도나마 유지되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불교교리를 많이 알면 뭣학, 시주나 보시 많이 하면 무엇하나, 진실성이 없는 마음으로 그저 욕심만 채워가는데, 불자들이 사찰을 찾는 이유가 무엇인가, 사찰이라는 경건한 장소로 몸을 옮김으로써, 주체할 수 없이 쌓여만 가는 욕망과 집착의 대를 씻어내어 참다운 불자가 되려는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서가 아닌가. 기도나 보시의 공덕은 얻어지는 것이다. 기껏 공덕 닦으러 왔다가 공덕은 고사하고 욕망과 집착만 늘려 괴로움을 초래한다면 이 보다 더 안타까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이것은 독을 약으로 알고 마시는 것과 같다. 봄비가 온누리를 두루 적시듯이 부처님의 자비는 앞에서 절하는 사람이나 뒤에서 절하는 사람이나 차별없이 미친다. 하지만 어찌하랴, 하늘에서 내린 똑같은 빗물이나도 연꽃이 머금으면 향기로 바뀌지만 뱀이 먹으면 독으로 변하는 것을.
대지를 적시는 빗물 같은 부처님의 자비를 욕망과 집착으로 오염시키는 우를 범하지 않도록 불자들은 노력해야 한다. 그것은 머리로 헤아리는 알량한 지식의 습득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비록 하찮은 일이라도 실천 수행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나 욕망과 집착을 여의어 괴로움의 싹을 끊으려 해야 비로소 부처님 제자라 할 수 있음을 사무치게 가슴에 담고 살아야 한다. 남은 아랑곳 하지 않고 여러 장의 방석을 독차지하는 신자들, 법당 가까이로 연등을 옮기는 보살(?)들, 시주 좀 했다고 거들먹거리는 사람들, 남의 초 뽑아내고 자기 초로 갈아 꽂아야 직성이 풀리는 분들…. 해도 중천에 올랐으니 이제 그만 깨어나시는 게 어떻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