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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철-대장경아, 어디 갔다 이제 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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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장경과 사람들 - 이윤수 1998년 04월 194호
스님 두 분이 지난95년 12월 초에 김수철(42세)을 찾아왔다. 종림스님과 현기스님. 고려대장경의 정신을 세계에 알리는 작곡을 맡아달라는 부탁이었다.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고려대장경을 상징하는 테마음악이라는 엄청난 작업. 그 쉽지 않은 작업에 이내 마음이 끌려 허락했다. 김수철씨가 필요하다ꡑ 는 한마디 스님의 말씀을 영광으로 받아들였다. 우리 고전음악에 대해 진취적으로 고민하는 스님들이 계신 것도 여간 감사한 일이 아니었다. 그는 곧바로 제작에 들어갔다.
고려대장경 테마음악 작업 중에 다시 스님을 만났다. 스님은 맨 처음 이야기된 제작비를 다 줄수 없는 형편이라며 멋적게 웃으셨다. 이미 시작된 작업, 야무진 청사진을 짜놓은 작업 . 김수철은 대작불사가 되는 이번 작업을 위해 스스로가 마음을 비운다. 고려대장경과 음악, 그리고 나, 김수철---인연이란 이런 것이구나, 정말 제작비와 상관없이 일해야 하지 않는가, 그의 속대답이었다.
눌변의 종림스님이 얼굴 가득 계면쩍은 미소만 띠고 있는 것도 웬지 좋았다. 그저 존경스런 스님과의 인연이라 소중하였다. 민족 문화유산이며 세계 문화유산을 음악으로 빚어내는 엄청난 역사적 작업을 말없이 수행해 내자, 단단한 각오를 하고 스님께 답했다.
“tm님 , 미력하나마 봉사하는 마음으로 하겠습니다.”
난 그에게 대가도 받지 않고 일하는 게 후회스럽지는 않느냐고 물었다.
“영광스럽습니다. 이 어려운 시기, 국난 극복을 위해 온 국민이 하나 돼 조성했던 대장경의 정신을 음악으로 되살려 내는 일이잖습니까? 복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춘추좌씨전에 이르길 세상에 썩지 않는 세 가지가 있다고 했다. 덕을 세우고 공을 세우며 말을 세우는 일이 그것이다. 그는 그 세 가지를 바로 고려대장경 음악으로 일궈가고 있는 것이다. 그를 두고 세간에서 “작은 거인”이라 부르는 의미도 알 것 같다.

그를 만나러 간 곳은 포이동의 번잡한 상가부근 빌딩 지하실이었다. 건물 밖의 번잡스러움과는 거리 멀게, 바깥 공간에 장정 예닐곱 명이 자기 작업을 해도, 땀내 나는 밀폐된 스튜디오는 마치 산사처럼 고요하다. 그러나 그가 홀로 작업하는 도중엔 난장이 펼쳐진다. 수백 가지의 소리를 섞어서, 그것이 우리 악기와 어떻게 어우러지는지 알아보기 위해 컴퓨터를 동원해 조율하기도 하고 캐비넷 위에 올려진 북을 꺼내 소리를 맞춰 본다.
김수철은 수치심 때문에 국악을 하게 됐다고 했다. 그 부끄러움은 1980년 소형영화 ‘탈’ 의 배경음악으로 프랑스 청소년 영화제 본선에 진출하면서 비롯된 것이다. 한국적인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오는 외국 언론관계자 앞에서 느꼈던 ‘내가 우리 것을 너무도 모르고 있다’ 는 냉엄한 인식. 그는 곧바로 박범훈 선생을 찾아간다. 가수가 돈이나 벌지 웬 국악이냐며 문전박대를 당했다. 그러나 그가 몇 달을 묵묵히 고집스레 찾아가자 박범훈 선생은 마음의 문을 열었다. 그렇게 해서 국악 작곡법을 배웠다. 김덕수씨에게는 중부 호남 영남의 삼도 장단을 공부했다. 그 뒤 김수철은 몇 분의 스승을 모시게 된다. 아쟁, 태평소, 피리, 가야금, 대금과 같은 우리 악기 열두 가지를 지도 받기도 했다.
흔히 그의 음악을 두고, 동서양 소리의 대화라고 부르는 것은 선재동자가 스승을 찾아 구도행각을 떠나듯 이처럼 스스로 득음을 향해 길 떠남에서 찾아질 것 같다.
그의 삶에 주된 관심사는 소리다. 사물을 눈으로 듣고 귀로 새긴다. 김수철은 ‘음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소리를 찾는다 고했다. 그는 철저하게 우리 음악을 ‘민족혼의 소리’ 라고 규정한다.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의 소리. 사람 사는 힘은 그들이 발딛고 사는 땅에서 나온다는 진리를 아는 그는 음악 또한 그러하다고 믿는다.
음악이 이름다움이라면 소리는 진실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디스크 삼십여 개, 영화음악 삼십여 편, 주요 예술상 십여 개를 차지한 그이지만 돈도 명예도, 인기도 버린 지 오래다. 우리 음악, 민족혼의 소리를 찾고자하는 것이 김수철의 진면목이다. 오직 자신에겐 고려대장경에 음악이란 옷을 입히는 작업만이 본연의 작업이라 했다. 그의 십팔 년 우리소리 찾기에 획을 긋는 화두인 것이다.

대하 공식보다 더 어렵고 복잡해 보이는오선지 위에 음표들이 들어앉아 어지럽게 춤춘다. 김수철의 고려대장경 테마음악 작곡 작품이다. 오선지 위에 저들이 자리잡기까지 김수철은 어떤 싸움을 치러야 했을까?
“교과서에서 배운 민족유산이라는 박제화된 것을 김수철의 음악을 통해 오늘날 온기 감도는 민족유산으로 거리를 좁히려 하는 게 제 몫입니다. 우리 소리에 뿌리를 둔 대중화 작업이지요. 그게 제가 하려는 일입니다. 국내외로 우리 문화유산에 물음표를 달고 관심 갖게 하는 일 말입니다.”
김수철은 우리 이웃들이 고려대장경이 대체 무엇인가 궁금히 여길 수 있는 음악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아이들 입에서조차 절로 흥얼거리며 “장경아, 너 어디 갔다 이제 왔니?” 라고 친근하게 여길 수 있는 음악이 됐으면 좋겠다고 한다.
그런 연유로 김수철은 고려대장경 음악이 너무 국악적이어도 세계화가 어렵다고 본다. 당시 시대에 빠져들고 고려대장경에 천착해서도 접근이 어려워진다고 여긴다. 고려인의 정신과 현대인의 정신을 접목이 아닌 ꡐ조화ꡑ로 이끌기 위한 재창조의 작업. 그래서 그는 좁디 좁은 골방에서 자장면을 배달해 먹어가며 ‘영광스런’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겨울, 그는 동료 일곱 명과 함께 방송용 기자재인 32채널 콘솔과 고성능 마이크 스물다섯 개를 들고 해인사로 향했다. 산사의 소리를 담기 위해서였다. 주지 스님께 허락을 받고서도 강원, 선원 등 방방을 다니며 대중스님 전체의 허락을 받는 과정을 거치며 낯선 절집 풍속도를 익혔다. 새벽 예불 전에 수십 명이 언손 불어가며 기계를 설치하느라 부산해야 했고, 스님들의 일과 시간 이후에 소리를 담느라 날밤 지내는 날이 이주나 계속됐다.
살포시 부는 바람에도 맑은 소리를 내는 풍경, 어둠 속에서 밤새워 산사를 울리는 바람소리 물소리, 천근만근의 울림을 주는 종성---비어서 넘치는 산사의 소리를 고생 끝에 담았다. 간경이며 진언은 하나같이 스님의 목청이 아니었다. 그것은 천상에서 울리는 소리였다. 그 작업 끝에 스스로 절망과 성찰을 배운다.
하나 그렇게 정성 기울여 담은 산사의 소리는 라이브 장비로 녹음하다보니 새벽바람과 같은 그의 말마따나 ‘잡’소리가 많이 들어가 버려 전혀 쓸모 없게 되버린 것이다.
구십분짜리, 오십 개 분량의 테입에 담긴 소리를 놓아둔 채 그 소리와 닮은 음악을 작곡해냈다. 그는 절실하지 않으면 이처럼 철저하게 버린다. 사랑하지 않는 것을 보여줄 수 없기 때문이다. 혼 깃든 음악이 돼야 한다는 태도다. 최선의 것을 선택하는 작업. 예술가의 창작이란 그런 것이 아닌가.
해인사에서 녹음을 마치고 돌아오던 날, 그는 술과 담배를 끊었다. 성보 유산을 음악으로 빚어내는 내 마음가짐, 삶의 자세부터 달라져야 한다는 각오 때문이었다.
“양심적으로 건강한 소리를 들려드리고 싶었습니다. 칠백 년 세월 온 국민이 합심해 조성하고 보존해 온 유산을 만드는 데, 제 태도부터 달라져야 하잖아요?“
그 바람에 몸이 불어 불혹의 나이에 걸맞는 몸집이 돼 버렸으나 그러나 그는 여전히 그의 동안童顔처럼 혈기왕성하다.
지난 95년부터 세 해 동안 계속된 밤낮없는 김수철의 작곡 작업에도 작은 변화가 생겼다. 만물이 생기도는 이른 새벽에 스님네들 처럼 일어나 열네 시간 동안 꼬박 고려대장경 테마음악 작업을 수행정진처럼 대신한다.

그가 수학여행 때 가본 해인사.
국악을 하면서 절 언저리에서 맴돌았지만 해인사를 참배하고 대장경의 존재를 인식하게 된 건 순전히 음악을 맡으면서부터다. 대장경 관련 다큐멘터리 영상물을 찾아보고, 대장경 관련 소설책도 몇 번을 읽었다. 스님의 설명도 수시로 듣는다. 가슴 두근거리며 장경각 안의 경판들을 쓰다듬고 안아보기도 했다. 장경각 보존의 신비에 놀라고, 전란의 와중에 한결같은 필체로 새겨둔 경판의 신비에도 감격한다. 오선지 앞에 앉았다가도 수시로 해인사로 달려간다. 감탄에 감탄을 하며 말문을 잊는 사이 그의 머리 속엔 또다른 선율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물론 악상이 떠오르지 않아 고심하는 시간도 많다. 음 하나로 몇 날 며칠을 지새기도 한다. 심적인 부담도 있다. 그러나 구상대로 되지 않아도 김수철은 자신의 작업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해본 일이 없다. 부처님께서도 진실되게 정진하면 낙수물이 바위 뚫듯 이루어진다고 이르시지 않았던가.
“고민하지 않아요. 제가 음악적 재주를 지니고 있다면 감사하게 받아 들이구요, 인간 김수철이 느끼는 고려대장경을 진솔하게 음악으로 만들면 되잖아요. 발표할 때까지 최선을 다하면 다 잘될 거에요.”
그를 버텨 주는 건 낙천성이라고 생각됐다. 무리하게 집착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며 마음 비우는 지혜를 터득한 모양이다.

마무리 작업이 한창인 고려대장경 시디 음반을 발매하는 것으로 그의 일이 끝나는 건 결코 아니다. 분기 탱천한 그는 앞으로 몇 년이 걸릴 지 모르는 고려대장경의 테마음반 시리즈 작업을 계획하고 있다. 최근 기초 녹음을 마친 해인사의 소리를 담은 1집은 그 길고 긴 행보의 첫 결과물일 뿐이다.
앞으로 소개될 음반엔 고려대장경의 역사와 정신을 담고, 청소년을 위한 고려대장경의 음악을 만들고, 서구인들에게 전해 줄 음악을 따로 제작할 예정이다. 우주적인 세계를 담어내는 그에겐 은하수 같은 악상들이 명멸한다. 이제 그에게 고려대장경은 절대의 삶이며 생명이다. 공기 없인 숨쉴 수 없는 것처럼 고려대장경과 그 음악이 없는 김수철은 이제 없다. 그 동안 노래를 하고 영화에 출연하고 영화음악을 만들었던 것들 모두 우리소리 찾기에 더 충실하기 위한 방편이었는지 모른다. 그에겐 그저 역사에 길이 남을 음악 제작만이 행복하고 즐거운 것만은 아니다. 이러한 재창조작업 과정을 통해 김수철의 음악세계는 새롭게 거듭나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 고려대장경은 멀리 있는 것도 아니고 어려운 것도 아니다.
마음먹기 따라서 그것은 가까이에 있는 아주 소중한 존재이며 그의 가슴 속에 살아있다고 믿는다.
삼라만상 두루 비치는 해인삼매의 김수철 고려대장경 테마음악은 오월이면 콤팩트 디스크로, 카세트테잎으로 선보일 예정이다. 칠백 년 전 고려인의 신심으로 빚어낸 고려대장경이 오늘의 음악으로, 새생명으로 그 모습을 나투는 것이다.
이 땅의 성보 유산 고려대장경이 세계 속에서 그 찬란한 가치를 인정받은 것처럼, 그의 음악은 우리에게 또 어떤 감동의 전율을 안겨 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