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틈에 놓여 있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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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기행 - 혜묵
1992년 11월 129호
“진여불성(眞如佛性), 마음속에 있다는 불성은 이렇게 모두 참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서서히 닦아 성불한다는 말(漸修成佛)도, 문득 깨달아 성불한다는 말(頓悟成佛)도 모두 헛소리일 뿐이다. 점수로는 성불할 수 없다. 돈오로는 더욱 성불할 수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 세계에 ‘佛’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수많은 중생들도 끝내 성불할 수 없다. 성불할 수 없음에도 불가 佛家가 있어 성불하라고 권한다. 또 성불하겠다고 발원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실을 도대체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그것은 현실 세계가 확실히 고난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고난 속에서 헤어날 수 없을 때, 종교라는 아편을 마실 수밖에 없고, 불국토에 왕생한다는 환상에 빠지거나 자기 마음속에 스스로를 위안하는 불국토를 건립하게 된다.” 근년에 출판된 한 권의 중국철학사에 나오는 말이다. 문화혁명의 와중에서 온갖 핍박을 받으면서 이 지식분자는 스무 해에 걸쳐 이 책을 완성했다고 한다.
인용한 부분은 수당隋唐시대를 대표하는 네 명의 불학자 지의智誼, 현장玄獎, 혜능惠能스님의 사상을 개괄하고 내린 최종 결론의 한 부분이다. 이 네분의 스님들이 실존했던 시기는 통털어야 백오십 년(智誼:서기 530년 출생, 惠能:서기 713년 입적) 정도이고, 그들의 활동 기간은 백 년 안팎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들의, 그 사상의 무게는 불교 사상사를 놓고 볼 때는 물론이고 전 중국 철학사 속에서도 가벼운 것이 아니다. 실제로 중국 불교 사상의 기본적인 골격은 대개 그들의 사고 범위 내에서 구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게다가, 조금 과장을 한다면, 한 백 년 안팎에 형성된 그들의 사상 이후로 불교 내부에서 일어난 사상적인 진보나 변화는 극히 미미하다고 볼 수 있다.
중국이야 그렇다고 치고, 한국의 처지는 더 심각하다고 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사상이 우리 불교계에 끼친 영향이 너무나 크고, 너무나 긴 세월동안 그들의 사상이나 경전 해석을 불교 그 자체라고 믿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의 긴 역사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불교학은 아직도 그들의 저술과 해석 주변을 맴돌고 있다. 뿐만 아니라 신앙이나 수행 면으로 보아도 한국 불교는 계승자임을 부정하기 어렵다. 그들이 모두 사라진 뒤로도 거의 천 삼백 년의 세월이 흘러갔지만, 그들은 여전히 불교를 대변하고, 우리는 그들이 번역한 불경을 읽고 그들의 틀대로 불경을 이해하며 그들의 가르침대로 충실한 불자의 삶을 산다. 측천무후는 「대운경大雲經」이라는 가짜 경전을 빌미로 황제의 자리를 빼앗는다. 부처님께서 중국의 여주인이 되기를 수기하셨다는 것인데, 당시의 스님들이 이 정치극의 연출을 맡고 있다. 화엄종의 종장이신 법장 스님께서도「신화엄경新華嚴經」을 강설하는 자리에서 거듭 그 수기를 강조하신다. 불의佛意와 천명天命을 강조한다. 그 때 강당과 사중에 지진이 일어난다. 법장과 여황제는 이것이 바로 여래께서 보내시는 증명이라고 좋아한다. 법장은 그런 식으로 세 황제의 스승 노릇을 하면서 화엄종을 건립하고 권세를 누린다. 그들의 권세는 삼무일종三武一宗의 폐불廢佛때까지 백오십 년을 지속한다. 사실 그들은 그런 사람들이다. 중국 사상사를 읽다보면 대개 이런 식으로 불교를 비판하는 글을 만나기 마련이다. 사상 자체에 대한 비판은 아주 적고, 주로 정치나 경제나 사회 분야로부터 공격이나 인신 공격이 주류를 이룬다. 특히 이들 네 명의 논리나 언변은 실로 정교하기가 완벽에 가까운 것이어서, 가장 맹렬한 비판자들조차도 감탄을 감추려고 하지 않을 정도이다. 오늘날 중국철학사도 결과는 마찬가지인 것 같다. 오리무중과 인신 공격으로 오히려 신비함만 더해 주는 것도 같다. 천태, 유식, 화엄의 말로만 들어도 거창한 사상체계는 오늘날까지 오리무중과 인신 공격 속에서 불교를 대변하며 중국 사상사의 중요한 자리를 잡고 있다.
선종의 경우도 결과는 비슷하다. 보기를 들어서 오조五祖에서 육조六祖를 거쳐 신회神會에 이르는 치열하고 가공할 만한 의발 쟁탈전을 장황하게 설명한 뒤 “이런 식의 의법依法 쟁탈전은 모두 출가했다는 사람들도 결국 출가한 것이 아니고, ‘법을 전해 받았다는 사람들도 성불한 것이 아니다’는 사실을 설명할 뿐이다”라고 투덜댈 정도이다. 개혁과 개방 정책에 힘입어 중국은 지금 대대적인 사상 해방의 돌풍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생각이다. 서점에는 새로운 상황을 대변하는 책들-보기를 들어 신정책에 대한 해설, 선전물들, 기업 경영, 시장 경제 특히 증권 관계에 대한 책들-외에도 갖가지 철학서와 사상서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서방 세계(특히 미국이나 일본)에서 번역해 들여 오는 사상서들은 물론이고 전통의 사상서들도 대단한 규모로 유통되고 있다. 문화혁명으로 막혀 있던 언론들이 봇물터지듯 터져, 마치 백가쟁명의 제자諸子들이 20세기 말에 다시 출현한 형상들이다. 중국판 르네상스의 출현을 목도하고있다는 느낌도 든다.
북경에서의 출판열은 이미 중앙공급식 유통 체제에 만족하지 못하여, 서탄書灘이라는 노점상 형태의 연쇄 서점들이 출현 성행하고 있다. 출판에서 판매까지 빠르면 일주일 남짓 걸린다는 이 신종 유통 구조는 한 일 년 사이에 독서 열풍을 일으키고, 베스트 셀러들을 만들어 내면서 당당하게 자리를 굳혀 가고 있다. 모택동에 대한 이야기들, 증권 따위의 서방 시장 경제에 대한 책들, 그리고 공자孔子의 전기류를 비롯한 유학 관계 서적들과, 전통 경학의 백화문 해설서들이 성공한 경우라고 한다. 물론 보통 노점서탄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책들은 연애 소설이나 무협지 따위들이지만, 이곳을 통해서 난해한 고전 사상 관계 서적들의 유행이 시작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중국의 정책 노선에서 ‘사상의 해방’은 이미 주요한 슬로건의 하나가 되었다. 이러한 구호 아래서 가장 뚜렷하게 복권을 하며 발전하는 사상은 ‘신유학’인 것 같다. 일반 독자층에서의 유행은 물론이고, 학계에서도 ‘현대 신유학’이라는 이름으로 학술적인 저작들을 꾸준하게 내놓고 있다. 과거의 도통道統 논쟁이나, 유법孺法 투쟁의 와중에서 도태되었던 학자들은 물론이고 나라 밖의 유학자들에 대한 새로운 연구 결과들도 늘어나는 경향이다. 중국의 전통 사상을 둘러싼 논쟁이 다시금 재현되고 있으며, 중국의 학자들은 그 논쟁의 중심을 “신유학”의 전통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사상 해방의 황금기를 구가하는 중국인들의 불교에 대한 태도는 여전히 냉담하기만 한 것 같다. 그들은 불교가 중국 역사의 의심할 수 없는 한 기둥임을 인정하면서도 불교를 살아있는 사상으로 여기지 않는다. 이제는 완전히 사라져 버린, 부정할 수 없는 결함을 지닌 종교-오늘날 중국에서 ‘종교’라는 말은 미신과 비슷한 말이다-로 여긴다. 다른 전통 사상에 대한 재평가, 특히 신유학에 대한 재평가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불교를 ‘미래에도 가치가 있는 전통사상’의 범주에서 쉽사리 제외시켜 버린다.
최근의 정부 통계에 따르면 현재 중국의 종교 인구는 일억 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그러나, 불교 인구는 티벳의 인구 칠백육십팔만 명과 소승불교를 믿는 소수 민족, 변방 한족 백만 명 외에는 통계조차 낼 수 없다고 실토하고 있다. 급격한 상승세를 보이며 성장하고 있는 기독교나 카톨릭에 비해서 불교의 성장은 극히 저조한 것으로 보인다. 긴 역사와 수많은 불교 유산에도 불구하고 중국 내에서 불교는 종교적으로도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그 많은 절들도 더 이상 종교의 성역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관광객을 끌어들여 재정을 불려 주는 관광 자원이나 문화 유적에 불과해 보인다. 이제 중국에서 불교는 사상적, 또는 종교적으로 완전하게 실패한 것인가? 아직까지 중국에는 이러한 의문이나 학자들의 질책, 대중들의 외면에 대응하는 불교인이나 불교 학자는 없다.
앞에서 인용한 철학서는 사상 해방의 슬로건에 힘입어 빛을 본 기구한 책이다. 그래서 구절구절에 정치적 편견에 희생된 철학자의 아픔이 담겨 있다. 그는 과감하게 전통 사상을 재해석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의 눈으로 보아도 불성도 깨달음도 헛소리일 뿐이다. 재해석의 여지도 없다. 이것이 현실이고, 이것이 진실인가. 봉건 시대의 권력에 기생한 승려들의 변태적인 행각은 쉽게 폭로하고 비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의 사상과 가르침은 시공을 넘어서 오늘날에도 유력하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행위를 보고서 그 사상에도 필연적으로 거짓과 결함이 있을 것으로 단정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 가르침의 정교함과 아름다움을 신앙하면서 그들을 불교의 대변자나 불교 그 자체로 승인한다. 도대체 어느 것이 그들의 진면목인가.
우리는 아직도 그들이 해석한 화엄경을 불교라고 믿고, 그들의 수행 방법을 성불로 가는 첩경으로 신앙한다. 그들이 다 죽은 뒤에도 천 년이 넘게 흘러갔다. 중국 학자들이 비판하는 불교는 사실 그들의 불교다. 그들의 불교와 우리의 불교는 같은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