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대사가 홍제암에서 입적한 뒤로, 전란에서 나라를 구한 그의 공을 기리어 광해군이 ꡒ홍제ꡓ라는 익호를 그에게 내리니, 홍제암의 당호는 그렇게 비롯되었다. 이십오년 전부터 종성스님은 이 곳을 처소로 삼고 있다. 그가 해인사에서 산지는 마혼해 남짓, 길상암의 명전스님 등, 가장 오래 전부터 해인사의 혹독한 시절을 고스란히 실아 낸 두엇 스님 가운데 든다. 그러나 산문에 든 것은 스물두살 나이로 이 곳에 오기 훨씬 전의 일이니 , 금산사, 백양사 등으로 떠돌다 \"자신은 끼여 살 수 없는ꡓ 고승대덕들이 떼로 모여 사는 곳이라 믿었던 이 곳에 ꡐ죽기 살기를ꡑ 작정하고 왔었다. 방부를 들이고 객실에 앉아 문구멍으로 바깥 기척을 살피다 어두워져서야 나와서 해우소 볼일을 봤을 만큼 “무서운” 데였다. 그의 첫마음이 그러했다.
주지고 강사고 학인이고 할 것 없이 울력에 매달려 식량을 마련하니 백장의 정신이 저절로 실천되던 나날, 강원 과정을 끝낸 뒤의 앞날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이 겹쳐질 때, 독성각 기도를 여러 번 올렸었다. 공부를 계속하고 싶었다. 꿈은 분명 아니었으니 입정이었을 터였다. 허연 노인 한 분이 그를 찾아와 흰 종이 한 장을 바닥에 펼쳐 놓고 점만 찍었다. 다시 올려진 삼칠 기도 끝에는 선만 죽죽 내리긋고, 세번째는 지고 온 붓은 줄 생각도 않고 고개만 끄덕끄덕했다. 어떤 스님은 저 붓을 석 자루나 얻어 교학의 길로 나섰는데 ---. 그 꿈꾸고 난 뒤로 교학에의 뜻을 접었다. 그 길이 내 길이 아니면, 부처님 도량 쓸고, 잡초 거두고, 해우소나 씻어 내리라. 그런 마음으로 살아보리라. 그리고 지관 은사 스님의 말씀 받들어 원주소임을 맡아 살기 시작했다.
어렵던 육십년대, “서흡 밥 칠흡 국ꡓ으로 허기를 달래고, 밥 많이 먹는다고 영암스님 눈에 나 두 번이나 쫓겨날 뺀 했던 때, 절 살림 모르지 않았을 학인들이 배고픔을 견디다 못해 방문 걸어 잠그고 단식 투쟁 벌인 일까지 있었던 때, 감반 끝에 큰스님들이 어린 대중보다 더욱 주리곤 했던 때, 김치는 하도 짜 먹는 것이 아닌 보는 것이던 때였다. 나무 한 짐을 아랫골 가마에 팔면 사흘 양식이 마련될 때라, 몰래 나무하는 마을 사람이나 그것을 지키는 스님이나 부닥뜨리면 먼저 몽둥이를 휘둘러 제 목숨을 지킬 때였다. 흐르는 물도 아껴 쓰라 함은 곤핍한 가운데 지키지 않을 수 없던 생활의 지혜가 아니라, 사람과 자연이 함께 공생할 도리인 뜻깊은 지혜로 새롭게 사무치는 이 때에, 그 시절 보내며 근검이 몸에 밴 그의 눈에는 요즘 스님들의 ”흥청망청ꡓ에 기가 막힌다. 그것을 고스란히 되돌려 받게 될 인과를 몰라서 그런다 했다.
그와 오래 인연해 온 마을 사람들로부터 그는 지금도 ꡒ농감 스님ꡓ으로 불린다. 68년도에 맡은 도찰을 시작으로 원주, 도감, 농감, 등의 소임을 열세 해 동안 지냈던 탓이다. 몇 해 전에 마지막으로 맡았런 소임이 총무였는데도 그는 여전히 농감 스님이고 도감 스님이다. 이제는 총무, 재무 등 새로운 이름으로 바뀌었지만, 토지 관리나 농사 관리, 그밖에도 산내의 온갖 대소사를 맡아해야 하는 소임이 도감이요 농감이었다.
가야산 아래의 성주, 고령 , 금릉, 거창의 네 개 군이 모두 해인사 절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했다. 마을이나 산중이나 덜함 없이 어려운 시절 겪어 냈으면서도, 그러나 관리당하는 처지가 한 길 아랫니니, 심중에 불만이 없기가 쉽지 않았으려만 마을에서 인심을 잃은 바 없는 드문 농감이었다. 집집의 몇 대 조상까지 뜨르르 꿰고, 숟가락 수효까지 모르는 바 없다하니 집안의 한식구나 다름없게 된 그에게 생각을 따로 품을 도리가 없기도 했을 터였다.
그가 모신 주지만 해도 열다섯, 산중의 일을 그만큼 아는 이도 드무니 요즘도 소임자를 젖혀 놓고 그를 찾는 외부인이 적지 않다.
그러나 스님보다 속인 상대할 일이 더 많았을 세월이 만만키만 해겠는가. 네 해 전, 성보박물관 건립을 계획하고 도에서 지원 받을 예산 책정 문제로 애를 쓰다가 몸에 마비가 왔었다. 삼년 동안 침을 맞았고, 약을 끊은 지도 얼마되지 않는다. 이참에는 얼굴이 좀 바루어졌는지 거울 보는 일이 잦지만, 서른살이 되도록 거울도 안보고 살았었다. 내가 이렇게 못생기지 않았습니까. ꡒ도를 닦으면 날마다 덜어지거니와, 덜고 또 덜면 무위無馬에 이르니 , 그것으로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ꡓ (맹자) 하였다. 그러나 “문득 깨치면 부처라 하지만 무량겁에 찌든 때는 망상으로 남아있다.” (보조) 했으니, 그것을 직시한다면 부끄럽지 않을 사람 있겠는가. 그의 말은 아마도 그런 뜻일 터였다. 그는 그런 부끄러움이 깊은 사람이다. 정월 기도라고 얼마 되지도 않는 신도들이 찾아와 법문을 청했지만 몇 마디 하다 말고 나와버렸다. 혼자 힘써 닦을 일이지 누구에게서 일러 받을 말은 아니라 했다.
나이 서른여섯, 그가 원주 소임을 살 때, 키만큼 손가락이 길다란 사미 하나가 그의 상좌가 되겠다고 찾아왔을 때도 그는 부끄러워 도망쳤다. 보름을 참고 기다리던 은사 스님이 그에게 현응이란 이름을 지어 주고 거두게 했다.
자신을 찾아 상좌되기를 청해 받은 일은 그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던 듯하다. 외람되오나, 그것은 아마도 스스로를 자중자애하는 계기가 된 것은 아니었던지. 중생이 저마다 가슴에 품은 다시 닦을 필요없는 맑은 마음 있음을 알면 자중자애하지 않을 도리가 있으랴.
저 놈이 내 곁을 떠나도 일 없고, 상좌가 더 오지 않아도 일 없었다. 진실로 하심하며 초발심으로 다시 살아보리라.
그가 나이 마흔쯤부터 해인사 큰스님들의 다비를 손수 챙기기 시작하니 , 짐작컨대 그의 이런 마음과 무관치 않을 터였다. 참나무 골라찍어 켜 놓고, 한편에 참숯도 마련해 놓고, 헛곽을 만드는 따위는 일도 아니었다. 다비를 하는 과정에서 몰골이 저승사자처럼 되니 사람 할 짓이 아닌 험한 일이라 했다. 그러나 그 때 이후로 산중의 큰스님은 물론이고 외부까지 청을 받아 다비를 하러나가는 일이 없지 않으니, 아성이 있고서는 불가능한 일일 것이었다.
산문에 들어 그가 누린 큰스님들의 그늘이 얇지 않으니, 암암리에 그의 몸을 적시는 지천이었다가 나중에는 강물로 흘렀을 터였다. 썩은 감자 같은 놈! 은사 스님으로부터 곧잘 들은 욕이다. 스스로 면구하여 거울 보기가 싫었던 ꡒ못생긴“ 그를 자운 노스님은 참으로 이뻐해 주셨다. 교학 제일 운허스님 , 가람 수호 영암스님, 실천 제일 자운스님, 그리고 하심 제일이던 그리운 지월스님 ---.
육조단경에 이르기를, ꡒ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생각이 우치와 미혹에 물들지 않고, 어리석음에 물들지 않고, 지난날의 나쁜 행동과 거짓과 속이는 마음을 영원히 끊어 제 성품에서 없애는 것“을 참회라 했다. 육근을 여의기 전에는 불가한 말씀이라 가혹하시다. 이즈막에 그는 자주 인근의 절을 찾아 참회 기도 시간을 갖는다. 내일은 거조암의 오백제불과, 갓바위의 약사여래님을 찾아뵈오려 한다. 그저 애쓸 따름이라요. 여태 천 배도 올려 본 바 없으니 절은 쪼금만 할 생각이고요.
연기와 노을은 등 뒤에서 피어나고 별빛과 달빛은 처마를 뚫는다
홍제암 뒤편, 가야산 두리봉 오르는 진대밭골, 새 순 오르는 것 지켜보기라도 할 듯이 이참까지 남은 억새밭에 마른 바람 스치우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귀수헌 처소 앞으로 당차게 흘러내리는 수각의 물소리도 그의 잠을 흔들어 놓지 못했다. 하물며 별과 달의 기척이랴. 부처를 품고 자고 부처와 함께 잠깨는 나날일 터이나 스스로는 알지 못한다. 판전 일 시작한지 며칠도안 되어 입술이 부르튼 곤한 몸이니 그저 높이 벤 낮은 베개 위에 꿈 없는 잠만 달다.
글/김 영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