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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홍제암 종성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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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삼소 - 김영옥 1998년 04월 194호
연두빛 새 순의 잔치가 시작되었다. 그 섬세하고도 역력한 기미가 회갈색과 사철 푸른 암록색 나무가 짓는 경계를 허물어뜨린다. 그러나 볕은 고우나 바람 끝이 사나운 날도 뒤섞인다. 섬진강 강가의 매화는 절정을 넘기고, 그보다 더 황홀한 낙화를 시작했다는데, 그 꽃소식이 네 소식이 되기는 아직 이르다 이른다. 마을과 산의 봄소식이 다르고, 산의 이편과 저편의 소식이 다른 법이다.
해인사 가는 길이 꿈처럼 혼곤하더니 , 차창 밖으로 흘러가다 심중에 자리잡는 풍경 하나 있다. 곱게 빗은 머리처럼 이랑이 반듯이 갈린 들의 끄트머리에서 산이 문득 시작되니, 그사이로 난 길, 산도 아니고 들도 아닌 그 경계로 수건 쓴 아낙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서둘지도, 그렇다고 게으르지도 않은 한결같은 걸음걸이다. 오고감이 엄정한 사철의 발걸음에서 어느 때 문득 느끼는 서늘함, 때가되면 떠나는 철새들, 그 소소한 목숨들이 떼를 지어 움직이며 이르는 소소하지 않은 이치를 깨달을 때의 서늘함, 그 아낙들의 무심한 발걸음에서 그 서늘함을 다시금 느낀다. 토끼처럼 급히 뛰어 보려는 자, 거북의 항상한 발걸음을-이길 재간은 없으니, 제 속에 부풀려 놓은 부박한 욕망에 휘둘려 제풀에 쓰러지고 말기 때문이다. 겨루어야 할 상대는 거북이 아니라 늘 제 속에 있는 ꡒ존대한 자존심ꡓ 이다.
백운을 지나 시작되는 가야산 구비길 어느 모퉁이에서 임을 한 할머니 한 분을 만난다. 쑥, 돋나물, 돌미나리, 나생이, 뭐 이런 것들이라요. 윗몸만한 보퉁이를 들이 밀며 차에 오른 할머니가 바람에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했다. 옥비녀는 푸르고 바람에 시달린 볼은 붉었다. 약수물-길러 온 사람들이 좀 있을라나. 산비탈을 넘어 이른봄나물을 캐서 돈 사는 일쯤이야, 흐트러진 머리 다시 쓸어 올려 비녀로 거두는 것과 진배 없다는 듯, 무심한 그 얼굴에 다시 서늘해진다.
해인사 입구, 석벽과 홍송의 그늘 아래로 흐르는 계곡의 물소리가 차다. 이 길은 맑은 흙길로 남아 차를 버리고 걷지 않을 수 없어야 하고 말고.
사비하는 말이 귀에 닿을까봐 흐르는 물소리로 산을 온통 휘덮어 놓았더라. 고운 선생이 읊었던 계곡 사이에 자리 잡은 터, 해인사는 일주문과 장경판전을 잇는 축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으로 당우가 벌려선 품이 배와 같은 곳이다. 그는 이 산중에 신발만 남겨둔 채, 신선이 되었다는 전설과 함께 사라졌다. 그 배가 안녕함을 알려는 깃발처럼, 그가 심었다는 판전 옆 전나무만 오늘도 건재할 뿐이다.
판전을 떠받드는 기둥의 수효는 백팔개, 오대 적멸보궁처 못잖은 기도처로서, 여기서 올려는 기도는 영험이 있다하였다. 천년만가서야 되겠습니까. 종성스님은 그리 말했다. 이가 맞지 않는 기와사이로 습기가 스미어 서까래를 녹이나, 그것을 말리려고 판전 지붕위로 덧집이 씌워지고, 판경을 실은 시렁에는 광목천이 휘감겨 있었다.
한양에서 이운되어 이 곳에 보관된 지도 육백 년, 팔만의 경판은 한사람이 새긴 것처럼 글자의 모양새는 드나듦이 없어 일매지고, 글자 한 자 새기기 전에 절 세 번, 그 일 끝나면 또 절을 세 번 올리는 성심으로 십륙 년 불사를 마무리했다.
경상도에서 다시 볼 수 없는 뾰족 바위가 연봉으로 이어져 있는 가야산은 화기가 숭한 곳이다. 그 화기를 누르려 오월 단오에는 학인 스님들이 정상에 올라 물의 기운을 품은 소금 단지를 묻는다. 일곱 차례나 덮친 화마로 대웅전까지 불타 올라도, 뒤에 바투 붙은 판전은 서까래만 그을렸을 뿐이었음은 부처님의 가피로 밖에 볼 수가 없다.
조선조 성종 때의 대대적인 보수 이후로, 육십 년대에도 한 차례 큰 보수 공사가 있었다. 그리고 삼십 몇 년 만에 다시 벌이는 보수 공사이다. 기와를 갈고, 서까래를 살펴보아 삭은 것 바꿔 넣고, 경판을 모신 시렁, 낱낱의 경판을 죄는 마구리도 상한 것은 손보게 되는 일이 제대로 마무리되자면 삼 년에서 오 년쯤은 걸릴 것이라 했다.
종성스님은 문화재 관리국과 함께 이 공사를 진행하게 될 해인사쪽 도감이다. 그는 지난 해제 이후부터 이 공사장에 나와 살다시피 한다. 판전 안에서 신는 신발 따로 두게 하고, 불씨를 지니고 들지는 않는지, 침 따위를 뱉는 불경한 태도는 없는지 따위를 살피어 성보를 대하는 마음에 경홀함이 없도록 단속한다. 그 외 타고난 성격이 그러하거니와, 뒷짐 지고 손가락으로만 일을 시키는 도감이 아니라, 공사중 풍우를 막아줄 지붕 위 덧집 세우는 일, 경판에 광목-씌우는 일 등도 몸을 던져 거든다.
이제는 세계적인 보물이 된 이 성보의 보수 작업을 두고 세간사람들이 관심을 두는 것은 주로 기술적인 문제에 관한 것이다. 그 일도 홀하게 여길 일은 아니지만, 그가 아쉬워하고 관심을 두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 그러나 그 바탕을 이루어야 할 신심에 관한 것이다. 일본의 동대사에서 한 해에 한번 법당을 소제하되, 성징이 드러나기 이전인 열살 미만의 여자아이들에게 일을 맡기는 성심, 그런 것이 그는 부럽고 아쉽다. 정부와 손을 잡고 일을 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기는 하지만, 일의 주체가 되어야 할 스님들의 원력과 신심이 부족하다 여겨지는데서 오는 자괴감이 크다. 그것을 추스르려고 그렇게 몸을 던져 일을 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목재의 전면 교체는 안 될 말이고 말고. 산감 노릇하면서 나무 박사가 된 그가, 대중과 함께 고찰을 순례할 때면 옛적 건축 기법이 어떠한지 짯짯이 둘러보는 통에 대오에서 뒤처지기 일쑤인 그가 그렇게 길렀을 안목을 펴 ꡐ작은 관심일 따름ꡑ이라고 표현하는 그가, 귀신이 나올까 두렵던 홍제암을 열두 동 당우로 고쳐 지은 그가, 판전 일 시작한지 일 주일 만에 입술이 부르터 버린 그가. 안목과 일머리와 성심을 두루 갖춘 바, 문화재 관리국에서 총도감으로 지정했다는 그가.

사명대사가 홍제암에서 입적한 뒤로, 전란에서 나라를 구한 그의 공을 기리어 광해군이 ꡒ홍제ꡓ라는 익호를 그에게 내리니, 홍제암의 당호는 그렇게 비롯되었다. 이십오년 전부터 종성스님은 이 곳을 처소로 삼고 있다. 그가 해인사에서 산지는 마혼해 남짓, 길상암의 명전스님 등, 가장 오래 전부터 해인사의 혹독한 시절을 고스란히 실아 낸 두엇 스님 가운데 든다. 그러나 산문에 든 것은 스물두살 나이로 이 곳에 오기 훨씬 전의 일이니 , 금산사, 백양사 등으로 떠돌다 \"자신은 끼여 살 수 없는ꡓ 고승대덕들이 떼로 모여 사는 곳이라 믿었던 이 곳에 ꡐ죽기 살기를ꡑ 작정하고 왔었다. 방부를 들이고 객실에 앉아 문구멍으로 바깥 기척을 살피다 어두워져서야 나와서 해우소 볼일을 봤을 만큼 “무서운” 데였다. 그의 첫마음이 그러했다.
주지고 강사고 학인이고 할 것 없이 울력에 매달려 식량을 마련하니 백장의 정신이 저절로 실천되던 나날, 강원 과정을 끝낸 뒤의 앞날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이 겹쳐질 때, 독성각 기도를 여러 번 올렸었다. 공부를 계속하고 싶었다. 꿈은 분명 아니었으니 입정이었을 터였다. 허연 노인 한 분이 그를 찾아와 흰 종이 한 장을 바닥에 펼쳐 놓고 점만 찍었다. 다시 올려진 삼칠 기도 끝에는 선만 죽죽 내리긋고, 세번째는 지고 온 붓은 줄 생각도 않고 고개만 끄덕끄덕했다. 어떤 스님은 저 붓을 석 자루나 얻어 교학의 길로 나섰는데 ---. 그 꿈꾸고 난 뒤로 교학에의 뜻을 접었다. 그 길이 내 길이 아니면, 부처님 도량 쓸고, 잡초 거두고, 해우소나 씻어 내리라. 그런 마음으로 살아보리라. 그리고 지관 은사 스님의 말씀 받들어 원주소임을 맡아 살기 시작했다.
어렵던 육십년대, “서흡 밥 칠흡 국ꡓ으로 허기를 달래고, 밥 많이 먹는다고 영암스님 눈에 나 두 번이나 쫓겨날 뺀 했던 때, 절 살림 모르지 않았을 학인들이 배고픔을 견디다 못해 방문 걸어 잠그고 단식 투쟁 벌인 일까지 있었던 때, 감반 끝에 큰스님들이 어린 대중보다 더욱 주리곤 했던 때, 김치는 하도 짜 먹는 것이 아닌 보는 것이던 때였다. 나무 한 짐을 아랫골 가마에 팔면 사흘 양식이 마련될 때라, 몰래 나무하는 마을 사람이나 그것을 지키는 스님이나 부닥뜨리면 먼저 몽둥이를 휘둘러 제 목숨을 지킬 때였다. 흐르는 물도 아껴 쓰라 함은 곤핍한 가운데 지키지 않을 수 없던 생활의 지혜가 아니라, 사람과 자연이 함께 공생할 도리인 뜻깊은 지혜로 새롭게 사무치는 이 때에, 그 시절 보내며 근검이 몸에 밴 그의 눈에는 요즘 스님들의 ”흥청망청ꡓ에 기가 막힌다. 그것을 고스란히 되돌려 받게 될 인과를 몰라서 그런다 했다.
그와 오래 인연해 온 마을 사람들로부터 그는 지금도 ꡒ농감 스님ꡓ으로 불린다. 68년도에 맡은 도찰을 시작으로 원주, 도감, 농감, 등의 소임을 열세 해 동안 지냈던 탓이다. 몇 해 전에 마지막으로 맡았런 소임이 총무였는데도 그는 여전히 농감 스님이고 도감 스님이다. 이제는 총무, 재무 등 새로운 이름으로 바뀌었지만, 토지 관리나 농사 관리, 그밖에도 산내의 온갖 대소사를 맡아해야 하는 소임이 도감이요 농감이었다.
가야산 아래의 성주, 고령 , 금릉, 거창의 네 개 군이 모두 해인사 절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했다. 마을이나 산중이나 덜함 없이 어려운 시절 겪어 냈으면서도, 그러나 관리당하는 처지가 한 길 아랫니니, 심중에 불만이 없기가 쉽지 않았으려만 마을에서 인심을 잃은 바 없는 드문 농감이었다. 집집의 몇 대 조상까지 뜨르르 꿰고, 숟가락 수효까지 모르는 바 없다하니 집안의 한식구나 다름없게 된 그에게 생각을 따로 품을 도리가 없기도 했을 터였다.
그가 모신 주지만 해도 열다섯, 산중의 일을 그만큼 아는 이도 드무니 요즘도 소임자를 젖혀 놓고 그를 찾는 외부인이 적지 않다.
그러나 스님보다 속인 상대할 일이 더 많았을 세월이 만만키만 해겠는가. 네 해 전, 성보박물관 건립을 계획하고 도에서 지원 받을 예산 책정 문제로 애를 쓰다가 몸에 마비가 왔었다. 삼년 동안 침을 맞았고, 약을 끊은 지도 얼마되지 않는다. 이참에는 얼굴이 좀 바루어졌는지 거울 보는 일이 잦지만, 서른살이 되도록 거울도 안보고 살았었다. 내가 이렇게 못생기지 않았습니까. ꡒ도를 닦으면 날마다 덜어지거니와, 덜고 또 덜면 무위無馬에 이르니 , 그것으로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ꡓ (맹자) 하였다. 그러나 “문득 깨치면 부처라 하지만 무량겁에 찌든 때는 망상으로 남아있다.” (보조) 했으니, 그것을 직시한다면 부끄럽지 않을 사람 있겠는가. 그의 말은 아마도 그런 뜻일 터였다. 그는 그런 부끄러움이 깊은 사람이다. 정월 기도라고 얼마 되지도 않는 신도들이 찾아와 법문을 청했지만 몇 마디 하다 말고 나와버렸다. 혼자 힘써 닦을 일이지 누구에게서 일러 받을 말은 아니라 했다.
나이 서른여섯, 그가 원주 소임을 살 때, 키만큼 손가락이 길다란 사미 하나가 그의 상좌가 되겠다고 찾아왔을 때도 그는 부끄러워 도망쳤다. 보름을 참고 기다리던 은사 스님이 그에게 현응이란 이름을 지어 주고 거두게 했다.
자신을 찾아 상좌되기를 청해 받은 일은 그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던 듯하다. 외람되오나, 그것은 아마도 스스로를 자중자애하는 계기가 된 것은 아니었던지. 중생이 저마다 가슴에 품은 다시 닦을 필요없는 맑은 마음 있음을 알면 자중자애하지 않을 도리가 있으랴.
저 놈이 내 곁을 떠나도 일 없고, 상좌가 더 오지 않아도 일 없었다. 진실로 하심하며 초발심으로 다시 살아보리라.
그가 나이 마흔쯤부터 해인사 큰스님들의 다비를 손수 챙기기 시작하니 , 짐작컨대 그의 이런 마음과 무관치 않을 터였다. 참나무 골라찍어 켜 놓고, 한편에 참숯도 마련해 놓고, 헛곽을 만드는 따위는 일도 아니었다. 다비를 하는 과정에서 몰골이 저승사자처럼 되니 사람 할 짓이 아닌 험한 일이라 했다. 그러나 그 때 이후로 산중의 큰스님은 물론이고 외부까지 청을 받아 다비를 하러나가는 일이 없지 않으니, 아성이 있고서는 불가능한 일일 것이었다.
산문에 들어 그가 누린 큰스님들의 그늘이 얇지 않으니, 암암리에 그의 몸을 적시는 지천이었다가 나중에는 강물로 흘렀을 터였다. 썩은 감자 같은 놈! 은사 스님으로부터 곧잘 들은 욕이다. 스스로 면구하여 거울 보기가 싫었던 ꡒ못생긴“ 그를 자운 노스님은 참으로 이뻐해 주셨다. 교학 제일 운허스님 , 가람 수호 영암스님, 실천 제일 자운스님, 그리고 하심 제일이던 그리운 지월스님 ---.
육조단경에 이르기를, ꡒ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생각이 우치와 미혹에 물들지 않고, 어리석음에 물들지 않고, 지난날의 나쁜 행동과 거짓과 속이는 마음을 영원히 끊어 제 성품에서 없애는 것“을 참회라 했다. 육근을 여의기 전에는 불가한 말씀이라 가혹하시다. 이즈막에 그는 자주 인근의 절을 찾아 참회 기도 시간을 갖는다. 내일은 거조암의 오백제불과, 갓바위의 약사여래님을 찾아뵈오려 한다. 그저 애쓸 따름이라요. 여태 천 배도 올려 본 바 없으니 절은 쪼금만 할 생각이고요.

연기와 노을은 등 뒤에서 피어나고 별빛과 달빛은 처마를 뚫는다

홍제암 뒤편, 가야산 두리봉 오르는 진대밭골, 새 순 오르는 것 지켜보기라도 할 듯이 이참까지 남은 억새밭에 마른 바람 스치우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귀수헌 처소 앞으로 당차게 흘러내리는 수각의 물소리도 그의 잠을 흔들어 놓지 못했다. 하물며 별과 달의 기척이랴. 부처를 품고 자고 부처와 함께 잠깨는 나날일 터이나 스스로는 알지 못한다. 판전 일 시작한지 며칠도안 되어 입술이 부르튼 곤한 몸이니 그저 높이 벤 낮은 베개 위에 꿈 없는 잠만 달다.

글/김 영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