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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바닥으로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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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이야기 - 전우익 1998년 04월 194호
흙, 나무-페인트나 니스 칠 안 한 맨나무-, 쇠, 돌, 시멘트, 아스팔트를 만져 보고, 문질러 보고, 얼굴에 비벼보고, 맛도 모고, 냄샐 맡아보고, 몇 가지를 하루종일 쥐고 다녀도 보고, 끼고 자봐요. 하루 이틀 말고 한 열흘이나 보름, 어떤 것하고 오래오래 함께 살 수 있을까요.
맨발로 흙길, 나무마루, 철판, 아스팔트, 돌길을 걸어 봐요. 딱 한가지 길을 고르라면 어떤 길을 고르겠어요.
우리가 어떤 문제를 풀어갈 때 습관처럼 머리로 머릴 짜서 결정하는 데. 이것이 지나치면 중앙집권의 폐단이 생겨나요. 손바닥 발바닥에 맡길 때도 있고, 눈에 맡길 때, 코 귀에 맡길 때가 골고루 있어야 합니다. 그림과 경치는 눈, 소리는 귀가 가장 잘 듣지요. 지방자치, 지방분권, 손발, 이목구비가 제대로 돌고, 판단한 것을 존중해야 합니다. 흙, 나무, 쇠, 시멘트 가운데 어느 것이 사람한테 가장 잘맞는지는 손바닥 발바닥이 가장 잘 압니다. 고기는 바닷가 사람들이 잘 잡고, 나무는 시골 사람들, 옷과 밥은 어매가, 지게짐은 아버지가 잘합니다. 우리한테 알맞은 곳이 어딘지는 손바닥 발바닥이 잘 압니다. 손바닥 발바닥한테 맞는데 가서 살면 되요. 왜 그러냐고 묻지 마소. 전 무식하니까 그런 거 몰라요. 눈. 코는 두 구멍이고 입은 왜 하나냐고 묻는 것과 같지. 자꾸 따지고 똑똑한 게 화근인데 머리로 궁리하고 판단하려 듭니다. 제 꾀에 제가 빠진다, 육갑 아는 놈 농사 망친단 말이 있어요. 무식하고 우직하게 살아요. 유식하면 피곤해요.
인생이란 장사가 아닌데, 왜들 계산하고 따져가며 살려고들 해요. 남는 장사 누가 못해요. 오르막 길이 없으면 내리막 생기지도 안 해요. 이 땅덩이가 그냥 평탄했다면 정말 재미도 없고 살맛 없어 다 미쳐버렸을 겁니다.
밑지는 인생을 살 줄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본전치기 때때로 손해를 봐야 살아 남을 수 있습니다. 삼시 세끼 먹는 밥이 다 살지면 큰일납니다. 설사도 하고, 토하고, 지지도 빠지지도 않기에 먹을 수 있지요.
여기 살면 못 살고, 저기 가면 잘 산다고 골라가며 쩔쩔매며 살다간 암 걸립니다.
춘하추동 추울 때도 살고, 더울 때도 살듯이 살다보면 여기서도 살고 저기서도 살게 되는데 기를 쓰고 살 건 없지요.
동리에 개가 몇 마리 있는데, 한 놈은 지나가는 사람 보는 족족 짖어대요. 다른 한 놈께선 하루종일 지긋이 눈 감으시고 편히 엎드려 있어요. 가는가 보다 오는가 부다. 나하고 무슨 상관이랴. 난 이렇게 게으름 피우며 살란다 하는 툽니다. 앞의 놈같이 살면 암 걸리기 십상이구요. 뒷놈같이 살고싶어요.
계산해서 그 곳으로 갔다, 신통찮다 싶으면 또 옮기는 식으로 살면 힘들지요. 산다는 것이 힘들다는 것이지만 그 힘든 고빌 넘기면 신나는 데가 있어야 합니다. 힘들지만 신난다 이런게 사는 거 같아요.
인생이란 선택이 아니고 인연이구나 싶어요. 나무에서 떨어진 씨가 그대로 박혀 있어야 싹터 자랍니다. 굴러다니면 말라버립니다.
몸과 마음이 어긋날 때가 있는데 그건 욕심-마음- 탓 같아요. 몸도 욕심 내지 안 해요. 마음을 따라가면 몸이 지치지만 몸을 따라가면 마음도 편해집니다. 마음대로 살지 말고 몸대로 살아갑시다. 마음이란 것 허황할 때가 제법 많아요. 믿을 게 못 됩니다. 몸은 함부로 나대지는 안하지요.
경운기가 퍼지기 전엔 집집마다 소를 먹였습니다. 경운기 퍼지자 소가 줄어들었어요. 동리엔 여러 마리 먹이는 집이 대여섯 됩니다. 옛날 같은 흙마구가 아니고 바닥은 시멘트, 기둥은 철봉, 지붕은 스레트 덮은 현대식 축사랍니다. 소가 여길 들어가면 팔려갈 때 나옵니다. 먹이는 사료구요. 옛날엔 사람도 맞기 어려운 주사를 때맞춰 놓는답니다.
이십 년 전 만 해도 겨울엔 김이 무럭무럭 나는 쇠죽 솥에 춘 쇠죽 먹고, 늦은 봄부터 된서리 올 때까지 들판에서 꼴 뜯어먹고 살았지요. 암소가 암내를 내면 수소를 부르는 고함소리와 화답하는 수소 소리로 동리가 떠들썩했구요. 암, 수 뒹구는 광경은 곧 성교육이였지요.
현대식 축사․에서 과학적 사료와 때맞춰 값비싼 주사까지 맞으며 자라난 암소가 발정길 맞아 암내를 낼 때 소리 한마디 못지른답니다. 정숙해서 부끄러워 그럴까요. 전엔 암소가 암내를 낼 땐 음부가 퉁퉁부어 누가 봐도 알수 있었는데. 축사에서 자란 암놈은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발정길 놓쳐 버린답니다. 소리도 못지르고 음부도 큰변화가 없답니다. 백 퍼센트 인공수정을 한답니다. 아주 우수한 숫놈의 정자랍니다. 보도 듣도 못한 숫놈의 새끼를 밴답니다. 암, 수 뒹굴어 밴 송아지와, 인공수정으로 생긴 송아지, 어느 쪽이 천지조화에 맞을까요. 과학이란 괴물은 인공수정이 우수한 송아지를 놓는다 합니다. 낫다, 편리하단 게 얼마나 무섭고 비생명적인지를 말해줍니다. 동물에 대한 인간의 폭력과 죄악이 과학이란 이름으로 미화됩니다. 그리하여 인간들은 죄의식도 없이 뻔뻔하게 살아갑니다. 편리하고 돈도 덜드니까 과학을 신봉합니다. 무자비한 짐승 기르기가 보편화되었습니다.
세상이 그렇게 굴러가고 있습니다. 더욱더 무자비해 지겠지요. 그걸 깨달음의 경지로 여길 겁니다.
닭, 돼지, 개 다 그렇게 먹이고 기르는 게 아니라 관리하고 있습니다. 시멘트 바닥에서 나서 시멘트 바닥에서 살다, 시멘트로 지은 푸춧간으로 갑니다. 생명이 어디서 솟아났겠어요. 암내를 낼 마음도 기운도 없을 게 뻔합니다.
지금 도시에 사시는 귀하신 분들, 일 년에 몇 번쯤 흙 만져 보고 맨발로 흙 밟아 보시나요. 뭔 뭘 가려 먹는다고 야단인 모양인데, 신토불이란 흙이 사람한테 가장 소중하다는 말이고, 흙을 떠나면 끝장난다는 말이지요. 흙은 지천으로 있는데 외면하고 살고 있으니 딱합니다. 죽은 뱀도 땅 냄새 맡으면 살아난다는데, 산사람도 땅 냄새 안 맡으면 죽어요.
마당엔 온갖 풀이 자라고 있습니다. 어쩌다 찾아오는 사람들 표정이 다릅니다. 뽑는 사람, 낫으로 베는 사람.
동리엔 세 가지 마당이 있어요. 시멘트 처발라 아예 풀 한 포기 없는 마당 두 곳, 풀이 길길이 돋은 저의 집 마당-이 마당이 민들레 필 무렵엔 볼 만합니다. 열시쯤 되면 온 마당이 민들레꽃을 깔아 놓은 것 같습니다. 안마당엔 쑥, 냉이, 질경이 수리치가 돋아나 반찬 창고 구실을 합니다. 그 밖엔 집집마다 제초제 쳐서 마당이 깨끗해 보입니다.
마당에 자라는 풀 뽑아야 옳은지 나쁜지 모릅니다. 뽑을 마음도 틈도 없어 그냥 두고 봅니다. 숨쉬고 밥 먹는데 아무 지장 없어 그냥 둘 뿐입니다.
서울 오갈 때 오 리를 걷는데 점점 불편하게 느껴져요. 아현 전철역에서 편집실까지 다 걸어 다녔는데 마을버스 생기니 타게 되드라구요.
원천서 집까지 오 리를 걷게 되는데 그게 짜증스럽게 느껴져요. 샤실 오리 길 걷는 것만은 내 힘으로, 내하고 싶은대로 천천히 빠르게 누웠다 앉았다 갈 수 있는 길인데 말입니다. 편리하다는 게 이렇게 무섭구나, 편리하다는 건 빼앗기는 건데 스스로의 힘으로 살자 하면서 철저히 남의 힘으로 살아가요.
전엔 부득이해야 탓지요, 다 걸어다녔지요. 이젠 부득이해야 걷습니다. 세상이 이렇게 바뀌었는데 이건 진보가 아니고 후퇴고, 퇴화라 여겨집니다. 많이 걸을 수밖에 없는 곳이 살기 좋은곳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