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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계 신문의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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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유지호 1992년 11월 129호
현대 생활의 필수품, 언론
현대인들은 거의 날마다 신문이나 방송 등의 언론 매체를 접하며 산다. 복잡하고 다양해진 사회와 공간에 대한 사건과 소식은 물론이고, 일정한 문화적 욕구까지도 이들 언론 매체에서 충족하고 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에 정보욕을 추가하기도 한다.
정보욕, 곧 전달하고 전달받으려는 욕구는 현대인뿐만 아니라 인간 사회에서 가장 자연적이고 필연적인 인간의 사회적 행위이다. 사람이 자기 자신의 주변 상황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또한 다른 사람과 그 주변 상황에 대하여 전달받는 일은 자연스럽고 꼭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이 일이 왜곡됨이 없이 잘 진행될 때 사람은 건전한 사회 생활을 영위해 나갈 수 있고, 사회도 마찬가지로 건전하게 발전할 수 있다.
인간 사회 구조가 단순한 상황에서는 사람이 정보 욕구를 충족하는 방법도 단순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처럼 복잡하고 다양한 대중 사회에서는 흔히 그 욕구 충족이 직접적인 것보다는 간접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이러한 인간의 정보 욕구에 대한 충족 행위를 전문적으로 대행하는 것을 언론이라 부르며, 이 일을 담당하는 매개물을 언론 매체라고 한다.
그런데 언론은 대행 역할을 수행하면서 수행할 사명과 지켜야 할 윤리가 있다. 언론과 언론 매체가 발전을 거듭하여 그 영향력이 매우 커진 오늘에 이르러서는 그 규범과 윤리가 더욱 요망된다. 이에 대해서 고려대 김경근 교수는 ‘인간 사회 안에서 발생하고 사회 구성원이 사회 생활을 위해 필요로 하는 모든 정보를 다양하고 객관성 있게 그리고 신속하고 광범위하게 전달하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이어서 김교수는 이런 규범과 원리를 실천으로 옮기는 구체적인 방법으로서 보편 타당성의 원리와 감시․비판 기능의 발휘를 든다. 언론은 보편 타당성의 원칙에 입각해서 비판적인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결국 언론은 결코 어느 특정인이나 집단만을 위한 것이어서는 안 되며, 엄격한 중립을 유지하여 누구에게나 감시자로서 인정받아야 한다. 그런데 현재 우리 언론 상황은 그렇게 되기에는 많은 장애가 있다. 권력으로부터의 압력, 자본과 광고주로부터의 입김이 대표적인 보기일 것이다.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언론 담당자들과 언론 수용자들의 의식 문제이다.

불교 언론의 두 가지 역할
현대 한국 불교에서 언론을 이야기하기는 쉽지 않을 듯하다. 우선 언론의 역사가 그리 깊다고 볼 수 없으며, 또한 언론이 독자적으로 성립할 수 있는가에 대한 명확한 해명과 공감대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불교계의 언론이라고 하면 신문, 잡지, 라디오 방송을 들 수 있겠다. 더 추가하자면 잡지 성격을 띠고 있는 사보寺報나 개별 단체의 회보 기관지 책자들이 부분적으로 언론 기능을 담당하고 잇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매체들이 ‘언론’이라기 보다는 (문서, 방송) ‘포교’ 측면에서 시작되어 운영되는 성격이 짙다. 또 이 매체들의 수용자인 불교 대중의 의식이나 정서도 언론보다는 포교 매체로 인식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불교 대중의 시각과 매체 경영자들의 의식은 불교 언론 담당자들에게 적지 않은 곤혹을 주고 있다. 그러나 최근 몇 년 전부터이긴 하지만 이제 불교 대중들 가운데에서도 불교 언론의 필요성과 그것의 정당한 수행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매우 크다.
이러한 상황과 의식의 반영으로 현재 대부분의 불교 매체는 종교성과 언론성을 함께 지니고 있는 것이 많다. 물론 사보나 잡지는 대부분 순수 포교지나 신앙지를 표방한다. 여기에 비해서 신문은 언론으로서의 기능에 많은 고민을 하고 있으며, 실제로 현재 불교 언론이라 하면 주로 신문을 두고 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불교 방송도 언론으로서의 기능을 충분히 할 수는 있으나 현재 프로그램의 주류는 포교와 신행 활동에 있으며 보도나 시사 부문의 비중은 매우 낮다.
이러한 현상을 놓고 옳으니 그르니 하는 가치론으로 평가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는 듯하다. 불교 매체의 가장 커다란 존재 근거가 불교라는 ‘종교성’에 있으며, 종교는 그 교리의 전파나 신도 확장을 위하여 매체를 활용하는 것이 현대에 들어와서는 보편적이고 기본적인 방식이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는 사회의 구성 요소며 거대한 집단으로서의 불교는 스스로 도덕성과 정당성, 효율성과 합리성을 위한 방법으로 언론의 역할은 매우 크다.
특히 요즘과 같이 대안 없이 종단의 기존 질서가 무너지고 도덕성이 문제시되며 운용의 전근대성이 개선되어야 하는 시점에서는 언론의 기능이 절실히 요구된다. 그래서 현재 대부분의 불교 언론 매체들이 포교 신행 활동의 종교성과 보도, 비판, 감시 기능으로서의 언론성을 동시에 지니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고 언론성을 전면에 내세운 본격적이고도 전문적인 매체의 필요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적지 않은 불교인들은 이런 매체의 탄생을 기대하고 있다.

신문의 득세와 정착 추세
최근 불교계의 인쇄 매체를 보면 잡지가 쇠퇴하고 신문이 득세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물론 잡지의 자리를 큰 사찰의 사보가 많이 메꾸고 있기는 하다. 그리고 잡지의 쇠퇴가 원인이 되어 신문의 발전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볼 수는 없다. 다만 현상의 흐름이 신문의 득세 추세라는 것뿐이다.
현재 불교계는「블교신문」,「법보신문」,「주간불교」,「대한불교」,「해동불교신문」들이 주간으로 발행되어 전국에 배포되고 있다. 그밖에도 「법무교화신문」,「동국불교신문」이 있으며「한국불교」,「진각종보」등 각 종단의 기관지와 제주 지역의 「한라신문」등 지역 신문을 포함하면 그 숫자는 매우 많다.
신문의 숫자가 이렇게 많아진 데는 `87년 언론기본법이 폐지되면서 신문 창간이 비교적 쉬워졌기 때문이다. 현재「불교신문」과 함께 불교계 신문의 양대 산맥이라고 할 수 있는「법보신문」이 `88년 3월에 창간되었다. 또 최대의 불교 도시라고 할 수 있는 부산에서 주식 회사 형태를 띠고 창간된 「대한불교」도 `90년 4월에 첫선을 보였다. ‘정화’를 가치로 창간되었으나 언론으로서 기본적인 선에도 미치지 못한다며 적지 않은 지탄의 대상이 되어 중도에 발행인이 교체된「해동불교신문」은 `88년 12월에 처음 발간되었다. 지면도 `90년 3월「불교신문」이 8면에서 12면으로 증면하였고 「법보신문」이 잇따라 역시 12면으로 증면하고 「대한불교」가 창간부터 12면을 발행하고 있다.
불교계 신문이 이렇듯 양적으로 팽창한 것은 외적인 요인 때문만은 아니다. 내적으로 활발해진 불교 활동에 대한 정보 욕구가 그 전보다 훨씬 커졌다. 또 특정 개인이나 집단의 이익을 위한 자파의 세력 확대와 여론 형성의 동기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을 듯 싶다.이제 불교 집안도 물리력만이 아닌 ‘여론’에 신경을 쓰면서 이를 이용하려는 단계에 진입한 것이다.
신문이 불교 언론계를 이끌고 있는 것은 양적인 팽창 때문만은 아니다. 여러 개의 신문 발간은 상호 경쟁이라는 긍정성이 작용하면서 질적으로도 크게 성장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다. 특히「법보신문」은 ‘찬사’와 ‘지탄’을 모두 겪으며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영욕의 흔적을 갖고 있다. 찬사와 영광은 발로 뛰는 열성, 다양한 소재의 개척, 편집의 뛰어남, 상대적으로 우수한 인적 자원에서 비롯되었고, 지탄과 치욕은 작년 종단 싸움에서 발행 사찰측의 입장을 벗어나지 못한 데서 비롯되었다.
80년대 말과 `90년을 경과하면서 전성 시대를 맞이한 교계 신문은 작년의 ‘위기’를 넘기고 올해 들어서는 정착 추세라고 평가할 수 있다. 정착 추세의 최대 요인은, 비록 부분적으로 신문의 역기능이 나타났음에도 언론에 대한 욕구가 계속 확대되고 있는 추세에서 찾을 수 있겠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요인이 기자들이 장기 근속이다.「불교신문」,「법보신문」,「주간불교」의 기자들은 최근 삼 년에서 사 년 동안 거의 이직이 없는 상황에서 부분적으로 기자들이 충원된 실정이다. 과거 교계 기자들의 평균 수명이 일 년에서 이 년을 넘지 못했던 것에 비하면 놀라운 결과이다. 기자들의 장기근속으로 경험과 역량이 쌓이면서 신문의 질이 적어도 퇴보하지는 않아서 신문의 안정화 추세에 기여하고 있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건강한 자본과 편집권의 독립
좋은 언론을 유지하려면 자본의 건전한 투자, 합리적이며 양호한 경영 그리고 편집권의 독립이 필수적이다. 신문사 하나를 탄생시키는 데는 적지 않은 자본이 든다. 그래서 이 적지 않은 자본을 투자한 동기가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서 그 신문의 방향성에 많은 영향을 끼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리고 신문사를 운영하는 데 드는 비용도 만만치는 않다. 구독자의 호응이 좋아 구독료로 충당한다면 문제는 없으나 전체 언론계뿐 아니라 불교계도 이것만 갖고는 어림도 없는 실정이다. 불교계의 실정을 밝히는 통계는 보지 못해서 알지 못하지만 일반 신문은 대부분 운영 자금을 광고료로 충당하고 있다. 그래서 적지 않은 신문이 일반 독자보다 광고주의 눈치를 더 살핀다는 지적이 많다. 우리 불교계는 광고 시장이 매우 좁다고 한다. 또 구독료를 지불하고 구독하는 일반독자가 그리 많은 편도 아니라고 관계자는 전한다. 그러다 보니 사찰과 스님들에 의존하는 비율이 크다. 불교 대중은 사부대중인 신문사의 주요 수입원인 광고주가 출가승가에 지나치게 편중되어 있음은 보도의 객관성을 잃을 염려가 있다. 현직에 종사하는 기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아도 대체로 들어맞다고 한다. 다만 최근에 들어서 의식적인 노력으로 스님 중심을 탈피하려고 애쓴단다.
건강하고 유익한 언론을 만드는 데는 돈 내고 보는 독자가 많아야 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 불교계는 법보시의 미명하에 그 동안 너무 공짜에 익숙해 있다.
자본과 경영이 양호하다고 좋은 신문이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사실 편집권의 보장 없이는 공정하고 객관적인 언론을 기대하기란 나무에서 물고기를 구하는 것과 같다. 불교계 신문에서 이 문제가 공개적으로 거론된 적은 없는 것 같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분위기와 힘, 그리고 데스크에서의 칼질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라고 전한다. 또 편집권의 독립과는 거리가 있는 얘기기도 하지만, 기사에 불만을 품은 관계자들의 항의와 협박 사례도 심심지 않게 있다고 한다. 사실을 왜곡하거나 편파해서 보도했다면 문제가 있는 것이지만 자신에게 불리하게 보도했다는 이유만으로 이러한 행위를 하는 것은 아직 걸음마 단계에 있는 불교계 신문의 발전에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는 못할 것 같다.

불교계 신문의 계속적인 발전을 기대하며
지난 10월에 불교계 신문사로서는 처음으로 「불교신문」편집국 기자 일곱 명이 노동조합을 설립해서 교계와 언론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다. 교계 최고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지만 종단의 기관지로서 한계 때문에 정론을 펴는 것에 대한 의구심을 갖게 해 온 「불교신문」의 태도에 귀추가 주목된다.
또 하나 교계에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은 오는 10월 27일과 28일 이틀에 걸쳐 김대중, 정주영 대통령 후보 초청 정책 토론회 개최이다. 불교계로서는 처음 갖는 대통령 후보 초청 정책 토론회를 마련한 단체는 교계 신문 잡지사의 평기자들로 구성하여 `89년 12월에 창립한 한국 불교 기자 협회이다. 불기협의 이번 행사 주최는 교계 언론이 한 단계 발전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겠다.
노조 설립이나 대선 후보 초청 정책 토론회들과 같이 불교계 신문의 진일보를 위해 애쓰고 있는 것에 많은 불자들은 박수를 보낸다. 그러나 불교계 신문이 더 발전하려면 일선 기자들이 더 많이 노력해야 한다. 어려운 조건임을 인정하지만 많은 불교인들은 현재 교계 기자들이 최선을 다한다는 이미지를 갖고 있지는 못한 것 같다.
올해 들어서 중앙승가대학이 발행하는 「승가대신문」이 ‘경책마당’, ‘그림판’ 들을 통해서 신문의 기능을 여실히 모여준 것을 귀중한 교훈으로 삼을 필요가 있겠다. 기존 신문이 승가 중심이었다고 스스로 비판하면서 이를 탈피하려고 계속 노력하고 있다고 하지만, 정작 승가 부문에서도 선방이나 강원의 소식과 그 구성원들의 의식의 흐름과 요구에 대해서는 그리 큰 역할을 해 오지는 못한 것 같다. 혹시 그 동안 승가 중심이었다는 스스로의 비판이 종단 정치승들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다면 다시 생각할 여지가 있을 것 같다.
경영자와 운영진들도 사실보다는 언론인으로서 역할을 더 생각하고 일선 기자들이 평생 직장으로 생각하고 뛸 수 있도록 복지 후생의 측면을 더 보강해 주는 것이 좋은 신문을 만드는 하나의 요소가 되겠다. 마지막으로 교계 언론 부문에도 감시와 논평의 전문가와 수용자 집단이 나와 그 활동이 활성화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