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선사에 서른 해 가까이 살았건만 요즘처럼 각박하고 어수선한 세상이 있었나 싶다. 너나할 것 없이 분수 넘치게 생활하고 남을 위할 줄 모르고 살아온 인과이리라.
아이앰에프 한파다 해서 나라는 물론 개인의 경제가 휘청이고, 한편으로는 환경 문제가 심각한 요즘, 철저하게 검약하셨고 늘 남을 위해 살라고 이르시던 내 은사스님이 저절로 떠오른다. 열반하신 지 서른 해 가까이 되건만 그분이 행하셨던 일거수 일투족이 다 지금을 예견했던 것만 같다.
내 은사스님은 청담스님이다. 건강도 안 좋았고 집안 형편이 어려워 대학을 중도에 그만두고 있던 나는 출가할 결심을 하고 도선사를 찾았다. 그 때 스님께서 총무원장으로 계셨고 속가의 아버지께서 총무원에서 일을 보고 있던 인연 등으로 자연스레 도선사로 오게 되었다. 청담스님을 뵙고 ‘부처님 법을 깨달아 정법을 널리 펴 동방의 빛이 되고 싶습니다ꡑ했더니 선뜻 ꡐ열심히 공부하라’ 이르셨다.
그 날로 후원에서 밥짓고 채공하고 스님을 시봉하는 행자생활이 시작되었다. 지금은 큰일이 있을 때 보살들이 후원에 와 도와주곤 하지만 스님이 계셨을 때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행자들이 해야 할 일이라며 보살들의 후원 출입을 엄격히 제한하셨으므로 후원 일은 철저히 대여섯 명이던 우리 행자의 몫이었다. 큰 행사라도 치르는 날이면 많은 신도의 공양을 지어내느라 행자들은 챈 걸음으로 숨 돌릴 틈 없이 일해야 했다.
하루는, 총무원에서 돌아오신 스님께서 후원에 들렀다가 행자들에게 벼락을 내리셨다. 스님은 외출해 돌아오시면 그냥 당신 방으로 들어가는 법이 없다. 꼭 후원부터 들러 꼼꼼히 점검하시고는 해서, 우리를 긴장시키곤 했는데 그날 그만 행자들에게 불호령이 떨어진 일이 생겼다. 때는 한여름, 누릉지 끓여 놓은 것을 먹지 않고 수채에 버린 것이 화근이었다. 그것을 보신 스님께서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그 날 우리 행자들과 대중스님들은 물론 스님까지 쉰 누릉지를 깨끗이 물에 씻어 기름을 조금 두르고 볶아서 저녁 공양을 했다.
스님의 검약정신은 누구도 따를 수 없을 만큼 철저해 ‘흐르는 물도 아껴 쓰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여름철 그 흔한 개울 물에도 첨병 들어가 목욕을 하지 못했다. 바가지로 떠서 쓰다가 모자라면 더 떠서 쓰라는 스님의 가르침 때문이었다. 위에서 물을 함부로 더럽히면 아래에서 깨끗한 물을 쓸수 없다는 스님의 배려는 환경이 심각하게 오염된 오늘날, 다시 한번 되돌아보게 하는 대목이다.
전화가 지금처럼 흔하지 않던 예전에는 편지를 많이 주고 받았는데 스님께서는 편지를 받아 보시곤 꼭 남는 지면을 활용했고, 또 편지지를 펴 놓고 중간에 휴지를 조금 잘라 붙여 뒷간에 가실 때 쓰곤 했다. 그런 스님을 곁에서 보고 익힌 탓인지 나도 지금까지 휴지 한 장을 다 쓰지 않고 반조각을 잘라 쓰고 있다.
그렇듯 물건을 아껴 쓰셨지만 신도들이 공양해 올린 쓸만하고 좋은 것은 나눠주길 좋아하셨다. 한번은 신도 한 분이 아주 도톰하고 따스하게 보여는 내의 한 벌을 사가지고와 스님께 드렸다. 스님께선 절에서 부목 일을 보고 있던 처사를 불러 그 내의를 입으라 내 놓으셨다. 사는 것이 어려워 내의를 깁고 기워 아버지 것은 큰 아들이, 형 것은 아우가 물려 입던 시절이었으니 새 내의 한 벌이 아쉬운 시절이었다. 고급 내의를 받아 들고 일어서 나가던 처사는 문을 찾지 못하고 머리를 벽에 부딪쳤으니, 스님의 인자함에 너무 황공했던 까닭이었으리라.
그러나 스님께선 당신 상좌들에게는 엄격해서 나는 한해의 행자생활을 마감하고 계를 받을 때 새 것이 아닌 떨어져 여기 저기 기운 가사를 입었던 기억이 난다.
상좌들에겐 네 복 지어 입으라며 내의 한 벌 안 주실 만큼 엄격하셨으나 스님께선 불법을 알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늘 마음을 열고 계셔 누구라도 찾아오면 몇 시간이고 법문을 해주셨는데, 때로 밤을 지새는 적도 있었다.
손님 공양 상까지 차려야 했던 우리가 싫은 소리라도 드리면, ꡐ죽은 사람에게도 법문을 하는데 산사람이 부처님 법을 듣고자 하는데 어찌 물리치겠느냐ꡑ 하셨다.
법문을 한번 시작하면, 시간에 구애됨 없이 하시는 스님 덕분에 나는 때로 팔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고역을 치루 곤 했다. 지금은 석불전에 불이 들어 오지만 그 때는 불어 들어오지 않아 새벽 예불을 마치고 스님께서 법문을 하실 때 곁에서 호롱불을 밝히고 서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때로는 새벽 예불을 마치고 사시 예불이 시작될 때가지 이어진적도 있었다.
행자시절 우리는 늘 새벽 예불을 마치고 백팔참회를 했다. 물론 스님도 백팔참회를 거르지 않으셨는데, 한번은 스님을 모시고 안동 지방에 갔을 때였다. 스님은 나침반이 달린 회중시계를 차고 다니셨는데 그 나침반으로 방향을 맞춰 석불전을 행해 꼭 백팔참회를 거르지 않고 하셨다. 내가 고단하다는 핑계로 두어 번 슬그머니 빠지자 스님께서 ꡐ무엇이든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중간에 빠지면 되겠느냐‘며 조용히 나무라셨다.
행자시절을 별반 곁눈질 없이 스님 시봉하고 후원일 하며 착실히 보냈으나, 꼭 한번 스님께 엄한 꾸중을 들은 적이 있다. 하루는 세수를 하고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는 내 모습을 스님께서 보시고는, ꡐ너 자꾸 거울보고 그러면 내 그 얼굴 그냥 안두리라‘ 하시며 꾸짖으셨다. 마음을 닦아야지, 얼굴 닦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하시며 꾸짖으셨던 그 말씀이 형식에 치우치지 말고 살라는 교훈으로 지금까지 남아있다.
행자시절을 되돌아보려니 모든 추억이 스님과 연관된 것뿐이다. 그러므로 내 행자시절은 은사스님의 일거수 일투족을 오롯이 눈으로 가슴으로 익히고 배웠던 시절이 아니었나싶다.
스님을 모시고 손경산 스님이 계셨던 동화사에 갈 때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동화사 입구에 도착하니 칠혹 같은 밤이었다. 스님께선 초 한 자루를 준비하라고 하셨다. 가게에 들러 초 한자루를 사가지고 종이에 싸서 들고는 동화사를 향해 걸음을 옮기며 스님께서 밀씀하셨다.
“얘야 옆 돌아보지 말고 마음 올바로 가지고 중노릇하거라. 모든 중생에게 적용할 수 있는 마음자세를 가져야한다. 그리고 모든이에게 귀감이 되는 수행자가 되어야 하느니라.ꡓ
멀리 들리는 짐승의 울음 소리와 간간히 지나가는 바람 소리뿐, 참으로 고적하기만 했던 그 날밤, 나는 그렇게 스승께 귀한 법문을 들었다. 내가 출가한지 한두해 뒤 스님께서 열반하셨으니, 그 날 뒤로 그렇게 단둘이, 또 그렇게 따뜻한 말씀을 듣지 못하였다.
좋은 스승을 만나 불가에 입문한지 어언 서른 해, 속가에서는 아들이 제아비를 닮듯 불가에서는 제자가 스승을 닮는 법인데, 그렇듯 제자에게 엄격하되 당신을 욕하든 좋아하든 어떤 경우에도 포용하는 하해와 같은 마음을 지녔던 내 스승을 난 얼마나 닮으려고 노력했는지 반문해 본다. 좀더 공부했어야 했는데 하는 그런 자책감이 따를 뿐이다. 스님과의 첫 만남에서 ‘불법을 깨쳐 동방의 빛이 되고 싶다ꡑ던 어린 행자의 말을 귀담아 들었다가 수계 때 동방의 빛이란 돗으로 ꡐ동광東光ꡑ 이라는 법명을 내리셨던 스님, 지금 어디에서 이 어리석은 제자를 내려다 보고 계실까.
여기 저기서 살기 어렵다고 아우성치는 요즘, 한치 어긋남 없이 검약했던 은사스님이 절로 그립다.
정 리/박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