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 한국 경제는 일본으로부터 독립은 하였지만 일제 때보다 별로 나아진 것은 없었다. 모든 것이 아쉽고 궁핍한 형편은 해인사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1950년대에 요원의 불길처럼 타오르던 한국불교 정화운동은 재정적인 궁핍을 더욱 크게 해서 서홉밥에 허기지던 시절이었다. 게다가 전임 주지였던 청담스님의 경제적 실책은 해인사의 재정을 더욱 어렵게 만들어 놓았다. 이러한 때 총무를 맡은 영암스님의 심정은 마치 홍수가 휩쓸고 간 자갈밭에 서 있는 농부와 같았을 것이다.
먹일 식구만 가득 찬 총림의 살림살이와 비만 오면 빗물이 줄줄 새는 지붕을 바라보는 스님의 심경은 어떠했을까? 누구처럼 걸망을 싸 가지고 달아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평생의 도반인 자운스님과의 불영사 시절의 우의를 생각하면서 갖가지 열망을 잠재웠을 것이다.
그 때 이미 영암스님께서는 통도사, 월정사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 총무 따위의 어려운 소임을 훌륭하게 수임하면서 뿌리 깊은 나무처럼 어떤 어려움도 어렵지 않게 헤쳐나갈 능력을 갖추었던 것이다.
스님은, 마치 수좌가 화두를 챙기듯이, 오직 한 가지, 곧 해인사를 어떻게 하면 살릴 수 있을까, 특히 궁핍한 살림살이를 어떻게 꾸려 나갈까 하는 것만을 마음속에 두었다. 그래서 스님은 그 첫 방안으로 모든 대중에게 절약과 내핍 생활을 실천하도록 하는 한편 울력과 청정한 수행가풍을 총림의 청규로 실천해 나갔다.
스님은 이렇게 엄격한 수행가풍을 대중에게만 강요한 것이 아니었다. 스님은 총림의 그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몸소 실천하는 의지를 보였다.
서홉밥이란 이때 대중이 공양하는 습관으로 공양바루에 삼분의 일이 넘지 못하도록 한 데서 나온 말이다. 그뿐 아니라 마당을 쓸 때 빗자루가 닳을까봐 힘주어 쓸지 못하게 하는 따위로 요즈음의 시속으로 보면 정말 그랬을까 하고 의심이 갈 만큼, 모든 것에 절약 정신을 강조하셨다.
이러한 절약과 청빈은 스님의 전생애에 걸쳐 나타난다. 스님의 독특한 생활신조 가운데에는 ‘열 가지 모르기’가 있는데, 이는 오늘날의 수행자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삶의 귀감이 아닐 수 없다.
스님은 세 끼 공양밖에는 간식을 모르셨다. 그리고 훌쩍훌쩍 차 마시는 것을 모르셨다. 비록 절집에 과일이 많아도 과일을 모르셨고 구경가는 것 또한 즐기지 않으셨으며 낮잠 자는 것도 모르셨다. 그러했으니 서화書畵와 골동품을 어찌 알았겠으며 즐겼겠는가. 또 스님께서는 떡 따위를 즐겨 해먹는 일도 없었으며 대중 없이 여행 다니는 것도 삼가셨으니 이 얼마나 수행자다운 처신인가. 물질의 풍요로 사치의 극치를 달리고 있는 오늘의 세태에서 볼 때 참으로 깊이 새길 만한 ‘모르기’ 정신이다.
60년대만 하더라도 해인사는 대구에서 버스를 타고 세 시간에서 네 시간쯤 비포장길을 달려야만 겨우 도착하는 오지에 불과했으며 그나마 버스도 몇 차례 없던 때였다.
팔만대장경이 국보라고 하여도 아직 일반 국민에게는 국보에 대한 인식이 잘 알려지 있지 않던 때였다. 그러니 오늘날과 같이 관광으로 들어오는 수입이란 아예 기대할 수 없던 때였다.
스님은 무상법보인 팔만대장경을 잘 수호하고 대중스님네를 어떻게 여법하여 수행하도록 보필할까 노심초사 하다가 일주일 용맹 기도를 시작하였다. 손수 부처님께 올릴 마지를 지으면서 온갖 정성을 다하여 기도에 임하였다. 그래도 근본적인 묘책이 나오지 않자, 어떻게 할까 하고 마루방에서 이레 동안 먹고 자기를 모두 끊고 정定에 드는 순간에, 어디에선가 홀연히 누군가 귀에 속삭이듯이 ‘네가 배운 대로 하라’는 환청이 들려 왔다.
스님께서 평생 애써 배운 것은 오로지 부처님의 말씀과 염불, 그리고 목탁뿐이었다. 결국 부처님의 말씀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팔만대장경을 수호하기 위한 ‘정대 법회’를 구상하게 되었다. 첫해부터 대장경 정대 법회는 대성황을 이루었다. 경향 각지에서 몰려든 신도들로 해인사는 발디딜 틈이 없을 지경이었다. 이 법회에서 나온 보시금으로 해인사 자체의 어려운 재정 문제를 해결했음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해인대학과 관련된 재정 문제도 깨끗이 정리하였고, 또 남의 손에 넘어간 논 구백여 마지기와 산 육천육백여 정보를 되찾기에 이르렀다.
대장경 정대 법회가 그때부터 오늘에 이르도록 한결같이 지속되어 온 것은 모두 영암 큰스님의 기도와 원력, 곧 지극한 신심의 승리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 뒤로 팔만대장경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도 높아졌으며, 대장경과 더불어 해인사에 대한 인식도 높아져서 이제 해인사는 명실공히 한국 제일의 도량으로서 그 향기를 드날리고 있는 것이다.
영암 큰 스님의 가장 큰 업적은, 다른 무엇보다도, 농지 소송 문제를 해결한 일일 것이다. 이미 패소의 문턱에 이르른 농지 소송 문제를 승소로 이끌어낸 그 공적은 스님의 굳은 신심이 아니면 안 되었을 일이거니와, 그로써 해인사뿐 아니라 이 나라의 많은 사찰들이 입을 뻔한 막대한 재산 손실을 면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 무렵 재판은 이미 진주 지원에서 패소하고, 대구 고등법원에서 패소한 뒤에, 마지막 실오라기 같은 기대를 대법원에 걸고 있던 터였다.
스님은 일념으로 기도에만 몰두하였다. 곁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이 애처롭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 만큼 열심히 기도하였는데, 어느 날 말이 먹구름을 헤치고 동이 트는 밝은 동쪽으로 달려나가는 꿈을 꾸고 나서 이번 재판은 분명히 밝은 전망이 있으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판결 날을 기다렸다.
그때에 해인사 농지 소송 문제는 전국의 농지 소송 문제로 각계 각층의 크나큰 관심거리로 대두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전국의 대소 사찰이 농지 문제로 재판중이던 터에, 이 한 재판의 결과에 따라서 사찰이 토지를 내놓을 것인지 되찾을 것인지가 결정되는 재판이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판결 날 예상을 뒤엎고 승소 판결이 났을 때 해인사 대중들은 물론 전국의 사찰 토지 문제로 염려하며 애쓰던 대중들이 모두 기뻐하였다. 이 재판의 판례 덕택에 대흥사를 비롯한 여러 사찰이 토지를 되찾게 되었으니, 이는 한국 불교사에서 참으로 소중한 업적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봉은사의 땅이 몇몇 국영기업체의 명의로 넘어간 것을, 스님은 기도와 신심으로 갖은 어려움을 무릅쓰고 스물한 차례나 회의를 개최하면서 칠 년 동안에 걸쳐 온갖 노력을 경주하여 마침내 옛 땅 이만 평과 절을 되찾았으며, 그 뒤로 봉은사의 도량을 일신한 것은 물론 탑과 석등을 세우는 한편 화엄경 마흔네 장을 보각하는 등 만년에 이르기까지 가람을 수호하는 일에 한결같이 애썼던 것이다.
스님께서 1967년에 총무원장으로 계실 때에 모든 총무원의 행정을 체계화시켰는데 재무, 교육 문제, 일반 행정 지침, 사무 처리 방침과 같은 모든 행정 업무를 혁신하였다. 지금도 총무원의 행정 업무가 그 때에 스님께서 체계화시킨 그대로 이어져 오는 상태이다. 또 동국대학교 이사장으로 재직할 때는 동국관을 건립하고 경주 분교를 설립하였으며, 역경원장으로 계시면서 동국대학교의 부속으로 있던 역경원을 독립재단으로 설립하는 등의 행정적 수완을 발휘하였다. 지난 82년에는 인도, 스리랑카의 사성지 및 불적지를 참배하였으며, 70년에는 스리랑카에서 가지고 온 부처님 사리를 가야산 길상암에 모시고 적멸보궁의 도량을 건립하셨는데 이것이 바로 가야산의 적멸보궁이다.
스님은 일생 동안 자신이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그 무엇이든 끝내 하고 옳지 않다고 여기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는 분이었다. 후배들이 잘못이 있으면 아무리 작은 실수라도 그 자리에서 지적해 주고, 그 잘못이 시정되지 않을 때는 시정될 때까지 번거롭고 귀찮을만큼 말씀하였으나 그 잘못이 시정되었을 때는 누구보다도 따뜻한 위로와 칭찬을 아끼지 않는 분이었다.
평생 불교 발전의 지극한 원력과 기도로 살아오던 큰스님은 얼마 동안 미질을 보이더니 1987년 6월 3일 오전 8시경에 세수 여든아홉, 법랍 예순넷으로 입적하니 스님께서 남기신 임종게는 다음과 같다.
法身本無生 四大元無實
色空無二道 淸風自去來
지관스님께서 쓴 큰스님의 행적비가 가야산 길상암 앞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