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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 숨어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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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의 방 - 김영동 1992년 11월 129호
요즈음 세상은 정말 바삐 돌아가고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눈을 부시시 뜬 몽롱한 상태에서 신문을 뒤적이면서, 어떤 것에 대해서 흥분을 하기도 하고, 또 어떤 것에 대해서는 우울해 하기도 합니다. 일상 생활의 시작이 이렇게 시작되는 나의 하루가 때로는 무의미하게 느껴집니다. 무엇을 느껴야 하며, 무엇을 소중하게 생각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어려서부터의 각박한 삶의 모습들이 스쳐 지나가지만, 그저 지난 일이란 한낱 지난 일에 불과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현재의 일상 생활, 때로는 벗어나고픈 심정이나 그 떠나고 싶다는 생각마저도 일종의 허영처럼 보이게 하는 고정관념 속에서, 나는 아직도 많은 지혜를 깨우쳐야 하나 봅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이 바빠지고, 건조해진다는 사실은 나의 아내에 의해, 나의 딸에 의해 부드러워지기는 하지만, 그 시간이 계속되지 못함은 무엇인지? 참으로 큰 병이 들었습니다. 정말 좋은 세상이 될 수 있는지 걱정도 해 보고... 더불어 사는 모습도 상상해 보지만, 암담하기만 한 지금의 내 모습과 세상 모습은 자꾸자꾸 내 생각과 멀어져 가는 것 같아서 가슴이 아파 옵니다. 내 안에 숨어 있는 것, 이기심, 욕심, 나의 음악, 내 생활의 모습, 사람들과의 관계 들이 뒤범벅이 되어 내 안에 숨어있는 것조차 무엇인지 모르는 내 자신... 숨이 막혀 오는 것 같아 답답합니다.
어렸을 적에 보았던, 그러나 느낄 수 없었던 산과 바다, 개구리 소리, 매미 소리, 시냇물 소리, 소울음 소리 들은 이미 흘러가 버린 상황이 되었고, 그 소리를 느끼기 위해 가끔은 도시를 떠나 보건만, 역시 몸이 간사해져서인지 이내 시골의 하루가 불편해지는 것은 도시의 속도감에 이미 젖어 있는 내 생활 탓으로 보입니다. 옛날을 되돌아 보는 것, 그 옛날에 꿈 많던 시절을 생각하는 것이 왜 그리 좋은지 이제는 그런 생각에 나이가 들어감을 한편으로 초조해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즐겁게 살 수 있는 덕담이 되었습니다.
어렸을 적에 어머니 손을 잡고 절에 들렀습니다. 일주문을 지나 사천왕문에 머물렀을 때 사천왕의 발 밑에 눌려 있던 마귀들의 모습이 늘 머리에 남아, 발 밑에 있는 악마가 같은 악마라고 생각했던 인상적인 모습은 내 어린 시절의 한 귀퉁이를 언제나 무섭게 하였습니다. 또 내 뇌리에 스쳐 지나가는 “착한 일을 안 하면 너도 저렇게 된다”는 어머니의 말씀이 지금도 나에겐 하나의 규범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 내 안의 귀퉁이에는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그 귀퉁이에 자리잡고 있는 마음이 변할 때, 나는 순간적으로 발에 밟혀 있는 상상을 해 봅니다. 지금의 삶은 매우 편안하다고 생각되지만, 아직도 쓸데없는 일에 신경을 쓰고, 큰 일에 게으른 내 모습은 큰 탈이 난 것 같아서 중심을 잡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내 안에 숨어 있는 것, 바로 이것이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숨어 있는 것에 대해 스스로 다스릴 힘이 없어진 내 모습에 당황하고 포기하지만, 그래도 끝까지 다스리려고 하는 내 모습에 자랑스러운 생각이 들고, 역시 지속적인 다스림에는 끈기있는 실천이 뒤따라야만 한다고 스스로 결론을 내립니다. 내가 불교를 좋아하는 이유는 마음에 대한 것을 끊임없이 다룬다는 데에 있습니다. 정말 마음은 기묘한 것입니다. 수많은 것들이 생겼다 없어지고, 생기고, 또 새것이 생겼다 없어지고... 이런 마음에 대한 것을 불교에서는 많이 다룬다는 것입니다. 정말 그런 의미에서 불교는 우리 마음속에 있는 것을 다스리는 훌륭한 종교입니다. ‘정말 인간의 본성은 무엇일까’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끝없이 끝없이 생각해 보지만 해답이 없는 것을 보면, 틀림없이 나 자신이 많이 파괴된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내 자신의 규범, 도덕, 미적 가치관들은 어쩌면 내 스스로 만든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살아왔던 내 생각이 굳어진 상태의 모습이라 생각하며 깜짝깜짝 놀라고는 스스로 뒤를 돌아봅니다. 그러나 일상 생활로 돌아오면 나는 또 하나의 권위라는 상징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 마음속에는 아주 다중적인 모습이 있는 것입니다. 사실 사람들은 내 그런 모습을 보기는 어려우리란 생각이 듭니다. 내가 웃고 있는지, 화를 내고 있는지, 서로가 서로의 마음 속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치 세상살이가 하나의 가면무도회인 것 같습니다. 매순간 마음에서 일어나는 기분은 다른 의미의 표정들을 짓고 살아갑니다. 화를 내고 싶지만 웃고, 웃고 싶지만 우는 모습, 울고 싶지만 참아야 하는 모습, 이런 현상을 무수히 느끼면서 사는 내 모습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내게는 네살 바기 딸이 하나 있습니다. 딸아이는 지금 유치원에 다니고 있는데, 그 딸을 통해 나는 여러 가지를 깨우치고, 때로는 지혜를 터득합니다. 누구나 아이를 키우면서 느끼는 것이겠지만, 제게는 아주 재미있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은 자기의 본성대로 행동하는 것이죠. 울고 싶을 때 울고, 웃고 싶을 때 웃고, 춤추고 싶을 때 춤추고, 자고 싶을 때 자는 아주 본성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또 아이가 말하는 것은 대체적으로 거짓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아이가 점점 커 가면서 나와 같은 복잡한 마음이 생긴다고 생각하면 정말 끔찍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 번은 유치원 선생이 내 딸에 대한 편지를 보내 왔습니다. “정현이는 춤추고 노래하는 것은 능동적으로 잘하는데, 글씨를 배우거나 선생이 시키는 일들은 잘 안 하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부모님께서 아이의 그런 부분을 주의깊게 보살펴 쥇요” 라는 가정 통신문이었습니다.
나는 이 통신문을 보고 너무 좋아서 우리 딸아이를 껴안아 주고는 속으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래. 네 하고 싶은 것 마음껏 하거라. 그리고 네가 좋아하는 것은 좋은 것이고 싫은 것은 싫은 것이다. 하고 싶지 않은 것은 하지 마라.’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감성이 풍부하지 못하고, 오히려 지성이란 포장에 지식이 권위가 되고, 그 지식은 가식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감성이 풍부해짐으로 해서 우리의 본성이 밖으로 표출될 수 있다는 새로운 지혜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란 정말 기기 묘묘합니다. 그런 마음에 대해서, 불교는 끊임없이 얘기하여 왔습니다. 마음을 다스린다는 것, 그것을 위해 스님들은 선禪을 수행하고, 또 침묵의 세월을 보내면서 자기와의 싸움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것을 깨닫는다는 것 또한 일반 사람으로서는 어려운 것입니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마음의 본성이 깨지기 시작하는 것은 역시 지식이라는 것 때문인 듯 싶습니다. 그렇지만 결국은 마음의 본성을 지식이란 것으로는 붙잡기가 어렵습니다. 그만큼 깨달음이란 지식으로 만들기가 어렵고 그 깨달음을 전달할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불교의 해탈, 깨달음, 성불들은 지식이라는 테두리를 이미 벗어난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혹시 이 세상에는 깨달음에 대한 병은 없는 것인지, 내 마음속에서 ‘나는 깨달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지만, 그 깨달음이란 우리 같은 속인에게는 괜한 혼돈의 지식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마음이란, 우리에게 중요한 과제인 것 같습니다. 세상이 썩어가고, 여러 가지 질병에 인간 스스로가 죽어 간다 해도, 마음은 늘 살아 있는 듯합니다. 속세의 깨달음이란 그것 자체가 또 다른 마음을 혼란시키는 병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현대는 모든 것이 고통과 쾌락의 감각적인 시대입니다. 인간에게 감성이 사라진 이유를 생각해야 합니다.
마음이 생긴 그대로의 본성으로 움직일 때 고통은 고통대로, 즐거움은 즐거움대로 우리의 삶에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생긴 그대로 느낄 수만 있다면, 나는 내 마음속에 있는 것을 즐겁게 밖으로 표출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