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장경 간행의 원력을 지닌 황태자
의천스님은 중앙 집권 체계가 완비되고 불교가 가장 흥성하던 시대. 문종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열한살이 되던 해 문종은 왕자들을 내전으로 불러들여 심중을 털어 놓는다. 아들이 셋 있는 집이면 출가를 허용한다는 국법이있던 시절이다.
“그대들 가운데 누가 출가해 복전의 이익을 짓겠는가?”
그 때 넷째 아들 의천이 뜻을 밝힌다.
“제가출가해 스님이 돼 아바마마의 뜻을 받들겠나이다?”
문종의 외삼촌으로 당대 왕사였던 경덕국사 문하에서 출가한 의천스님은 학문에 힘을 기울여 대승과 소승의 경 , 율, 론 삼장은 물론 제자백가의 사상까지 섭렵했다. 열다섯살의 어린 나이로 승통이 돼 문종의 원찰 흥왕사에서 행한 법문에 관해서 임존의 선봉사 비문에는 뛰어난 음성으로 백천법문을 연설하여 사람과 하늘의 한량없는 대중을 놀라게 했다고 전한다.
불교를 더 깊게 연구하고 싶던 그는 고려에 드나들던 송나라 상인들을 통해 항주에 머물고 있는 정원스님을 소개 받는다. 편지와 서적을 주고 받으며 송나라로의 유학을 서원한 그는 부왕에게 표를 올린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찍이 신라 원광스님과 의상스님도 당나라에 건너가 불법을 닦고 오셨습니다. 저도 송나라에 들어가 고명하신 스님들을 만나 뵙고 불법을 좀더 깊이 배우고자 합니다. 아울러 오래 전부터 마음에 새겨둔 책들도 차제에 모두 모아 가져오고 싶은 마음 간절합니다. 요즘은 날마다 옷깃을 여미고 더욱 이런 생각에 잠겨 잠도 제대로 이룬 날이 별로 없었사옵니다.---하루라도 빨리 가고 싶은 마음 이젠 막을 길이 없어 목숨걸고라도 이 몸을 저 넓은 바다에 맡기어 송나라에 건너가 불법을 배우고 오겠습니다. 고려에 부처님의 광명이 환히 비치게 된다면 어리석은 마음이오나 충효에 어긋날 일도 없을 줄 믿사옵니다. 가엾은 이 소원을 부디 풀어 주옵소서.
청입송구법표 전문
눈물로 편지를 썼다고 했다. 그러나 왕과 대신들은 바닷길의 위험과 그때 요나라와 송나라와의 미묘한 관계, 그리고 의천스님의 병약함을 이유로 들어 구법의 길을 반대한다.
문종이 세상과의 인연을 마친 뒤 둘째 형인 선종이 즉위하자 다시 여러 차례 유학을 간청했다. 그러나 똑같은 이유로 묵살되고 말었다. 스님은 마침내 어머니인 인예태후와 형인 선종에게 ‘만 번의 죽음도 가벼이 여기고 험한 파도를 넘어 법을구 하러 간다’ 는 편지를 남기고는 1085년 사월 초파일 밤에 정주에서 배를 타고 송나라로 떠났다. 스님의 나이 서른살의 일이다. 밀항을-해서라도 송나라유학을 가야 했던 까닭은 고려 불교의 중흥을 도모하고 대장경 관계 문헌을 수집하는 데에 있었다. 스님은 열아홉살이 되던 해 경 , 율, 론 삼장에 대한 해설 연구서를 수집할 것을 발원한 글을 남긴 바 있다. ‘대세자 집교장 발원소代世子集敎藏發願疏ꡑ 가 그것이다.
제자 의천은 지극한 정성으로 목숨 바쳐
석가여래 ---등 모든 성현께 귀의하며 삼가
비옵니다.---이제 정법이 쇠퇴하고 중생의
근기가 점점 둔해지고 있습니다. 선지식이
출현해 소疏를 지어 교리를 현양하고,
삼장 법사가 간략하게 간추린 초抄를 만들어
소를 보좌하며 세상에서 무성하게 받들어
행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실로
한 시대의 할 일을 다했다 할 것이옵니다.
대세자 집교장 발원소 중에서
속장의 중요성을 느껴 수집과 정리, 그리고 간행을 서원했다. 이 무렵부터 스님은 속장경을 간행하겠다는 뜻을 평생의 불사로 여겼던 것 같다. 서른살의 중국 유학길, 고작 열일곱 달 동안 삼천여 권의 장소를 모아온 것만 보아도 그것이 뜨거운 발원과 치밀한 준비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속장이란 경 , 율, 론 삼장의 대장경을 정장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우리나라를 비롯한 여러 나라 스님들이 찬술한 것들을 부르는 이름이다. 여러 학승들의 저술이다 보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담은 정장처럼 존중되지 못했던 것을 의천스님은 하나로 모았다. 지역성과 문화성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 속장경이다. 인도를 비롯한 불교 국가에서 정장 이외의 장章과 소疏를 수집해 목록을 편찬한 것으로는 최초의 일이다.
그가 편찬한 「신편제종교장총록 新編諸宗敎藏總錄」-속장경 목록이라고 부른다.-상권에는 경에 관한 장소 2585권, 중권에는 율에 관한 장소467권, 하권에는 논에 관한 장소 1687권이 실려 있다.
일본과 요나라등지에서 구해 온 장소까지 합쳐 4,700여 권에 달했다. 이는 완결된 것이 아니라 수집 되는대로 더 추가 수록 할 생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라지고 없는 불경의 목록까지 망라돼 그 때의 여러 나라 불교학의 흐름을 볼 수 있는 지중한 참고문헌이다. 또한 그의 이 같은 작업이 다시 송과 일본등지로 전해지며 선망의 대상이 됐다는 점은 고려의 국제적인 지위를 드높이는 개가가 아닐 수 없다.
교장도가이 설치된 흥왕사
송나라에서 돌아오자 스님은 문종의 원찰 흥왕사 초대 주지로 부임한다. 흥왕사는 경기도 개풍군 덕적산 남쪽 기슭에 자리한 절이다. 조선조 이래 지금까지 이끼낀 와당만이 뒹구는 폐허지만 십 년 넘는 세월 동안 가람불사가 이어졌던 2 ,800여 칸 규모의 거찰이다. 은을 안에 입히고 금으로 지은 탑이 있을 만큼 사치가 극에 달한 가람 불사에 대신들의 반대가 컸던 절이었지만. 문종은 낙성식이 끝나자 계행 청정한 스님 일천 명만을 엄선해 머물게 할 만큼 이 절의 조성에 정성을 다했다. 낙성 직후 아흐레 동안 이어진 연등법회는 그 일대 나무와 산에 밝힌 연등빛이 대낮과 같았다 할 만큼 대 축제였다. 그러나 웅대한 건축이나 불사에 앞서 이 절을 우리가 주목하는 첫번째 이유는 바로 이 곳에 대장도감이 설치돼 속장경 간행의 과업을 일꿨다는 점이다.
고려속장경 간행을 위해 선종8년(1091년)에 홍왕사에 교장도감을 설치하길 왕에게 청했다는 기록이 전하는 것으로 보아 이 시기부터 조성이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불교의 삼장정문은 이미 정리 개판됐으나 그 장소들은 그렇지 못한 현실입니다. 그 장소들은 가장 중요하면서도 정리 개판되지 못해 분실될 우려도 높습니다. 이에 고금의 불교 소초들을 수집해서 일대 집록을 만들고 정장의 속면으로 간행해 후세에 다함이 없도록 보존해야 합니다.
신편제종교장총록 서문 중에서
초조대장경은 송나라 대장경을 바탕 삼아 간행되어 종류가 다양하지 못하고 내용에도 결함이 많다. 이것을 보완한 것이 속장경이다. 이 속장경 목록에 의거해서 판각이 시도됐을 것이다. 속장경은 몇 장의 판본만이 대마도와 해인사에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속장경은 고스란히 고려대장경의 모체가 됐다. 속장경은 몽고란때 불타고 말았다. 그러나 해인사에 전하는 고려대장경 가운데 천함에서 영함(고유번호 1088-1263)까지는 초조대장경을 다시 수록한 것이고, 반함에서 경함(고유번호 1088-1363번)까지 실려 있는 내용이 속장경 간행 때 보충된 내용으로 볼 수 있다.
속장경 목록에 전하는 경전들은 대부분 호국경전들이다. 밀교 계통의 경전들도 주종을 이루고 있다. 이는 국난극복의 정신을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이어가려 한 의천스님의 호국의지에 기인한다. 또한 속장경에서는 북방 불교의 학풍을 이어간 거란대장경뿐 아니라 십여 명의 거란 스님의 찬술을 망라해 수록(56부 190권)했다. 쉽게 구할 수 없는 자료를 빠짐없이 모아 당시 불교학 자료로서는 가장 완벽한 편집을 해낸 것이다.
의천스님은 원효와 의상스님에 대한 존경이 각별했다. 속장경 목록에 원효스님의 저서를 44부87권이나 수록한 것도 그렇거니와 해인사에 머물 때 두 분을 찬하는 시를 남겼을 정도였다. 그분들을 존경 한 가장 큰 이유는 한국 불교를 하나로 이룬 주인공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너와 나라는 이분법이 아닌 너와 내가 하나되고 둘 아닌 경지가 되는 조화와 화합을 강조한 두 분 사상을 고려시대에 다시 회복해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스님은 화엄경 계통이면서도 선과 교의 화합을 도모하기 위해 분파를 극복하고 천태사상을 폈으며 그 하나되는 일승 원융의 정신을 오롯하게 속장경에 실었다. 이처럼 당대 고려의 불교문화를 집대성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속장경의 가치는 더욱 새롭다.
풀잎처럼 낮추며 살아온 한평생
의천스님 생전에 숙종이 대각이란 시호를 내렸다. 곧바로 스님은 이를 거절하는 소를 올리고는 결코 그 이름을 쓰지 않았다.
대각은 부처님을 가리키는 말이라 저처럼 배움이 모자라고 덕이 부족한 말학으로는 감히 받아들일 수 없는 천만부당한 호인만큼 성상의 하명을 받아들일 수 없나이다.
스님의 성품을 헤아려 볼 수 있는 일화다. 문종의 아들이자 선종의 동생이면서도 풀잎처럼 자신을 낮추며 살아온 스님은 중국의 유학길에서도 화엄경의 선재동자처럼 쉰셋 선지식을 두루 찾아 제자의 예를 갖춰 구도행의 시간을 가졌다. 그러나 의천스님은 송나라에서 불교를 배우고만 온 것이 아니었다. 침체일로의 중국 화엄학을 부흥시켰는가하면 송의 분서갱유사건 뒤 사라진 무수한 책들을 되돌려 전하는 일도 스님의 몫이었다.
혜인원에 머무는 동안 스님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그곳이 다시 흥성해졌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으며 귀국 뒤 그곳에 장경각을 짓도록 거금 이천 냥을 보시한 것을 기념해 지금도 그 절을 고려사라고 부른다. 스님을 두고 당대 중국의 고승들이 법왕의 진자眞子ꡑ, 사의四衣의 보살, ‘해동의 석가’로 찬탄한 것도 그러한 까닭이다.
고려의 국제적 지위를 높인 일, 송나라 불교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은 일, 삼천여 권의 경전을 모아온 일, 주전론을 주장해 고려에 최초로 해동통보라는 화폐를 만들면서 경제와 사회개혁을 진언한 일 등 그의 짧은 마흔일곱 해의 일생은 참으로 굵은 삶이었다.
이처럼 무수한 그의 업적 속에서 우리가 간과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외국 문화에 의존하는 것에서 벗어나 우리 문화의 재발견에 눈을 돌렸다는 점이다. 송나라의 불교학과 우리 불교학을 비교했으며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 융합했다. 또 어려움에 처한 나라를 부처님 가르침으로 이겨내려 했다. 이 같은 호국정신을 속장경의 간행에서 엿볼 수 있다.
숱한 황태자들이 오늘날까지도 부친의 권세를 빌어 치부와 영화에 눈독들인 일화들과 견줄 때 의천스님의 한평생은 참으로 힘있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ꡑ를 돌아보게 만든다.
몸이 허약했던 스님은 속장경 간행에 힘쓰느라 과로로 지쳤다. 의천스님이 요양을 위해 머문 곳이 가야산 해인사였다. 해인사에 머물며 속장경 불사를 위해 마지막까지 애쓰던 스님과 스님의 속장경까지 완벽하게 편입시킨 고려대장경이 봉안된 해인사는 과연 어떤 인연의 끈으로 이어진 것일까?
제가 원하던 바는 부처님의 바른 법을 중흥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라옵건대 지성으로 불법을 수호하셔서 부처님의 유훈을 받들어 따르시면 전 죽어도 유감이 없겠습니다.
마혼일곱해, 그 한평생 속장경 간행을 위해 헌신했던 대각국사 의천스님이 문병 온 속가의 형 숙종에게 남긴 유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