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조탑은 북극성을 떠받쳐 들고
오랜 세월 그 얼마나 풍상 겪었나
늙은 가지 잠든 새의 꿈이 비었네
92년 광원암을 복원할 때 손수 상량기를 적어 올리며 현봉스님은 벅찬 숨길 가누었을 법했다. 혜심은 I234년에 입적한 뒤로 “진각국사 원조지탑”이라는 명호를 달고 이곳에 사리를 묻었다. 그 뒤로 수많은 고승대덕이 이곳을 거쳐갔다. 억불기였던 조선조 때에는 부역을 피하여 강원이 열렸던 곳, 그러나 여순반란 사건과 육이오 전쟁, 그리고 큰절의 불사를 위해 훼철된 뒤로 마혼 해 가까이 잡목과 잡초만 무성하던 곳에다. 밝고도 따뜻한 곳이니 혜심스님이 가신데가 필경 안양임을 알겠는 그곳에는 묵은 참나무 세그루만 신장처럼 지켜서 있을 뿐이었다. 선방 뒤로 열여섯 국사비를 참배할 수 있는 포행로를 만든 것도 그였다. 그의 손길이 닿기 전에는 없던 길이었다. 선방에서 정진하는 틈을 여투어 만든 공이 컸으므로 대중들은 그 길을 ꡒ현봉로ꡓ라 부르곤 했다. 이미 그런 이력이 있었던 그는 산중의 대중 앞에서 광원암 복원을 발원하였다. 그리고 틈틈이 톱으로 나무를 베어 내고 가시덤불을 걷어 내기 시작했다. 그러던 끝에 이루어진 일이었으니 어찌 감회가 남 같았으랴. 49년 기축생인 그의 나이 올해로 쉰, 나이 스물여섯일 적에 구산스님이 계시는 송광사로 출가했다. 진주에서의 유학시절, 친구와 함께 방을 쓰고 살 요량으로 짐을 실으러 가다가 보살을 만녔다. 그리고 그가 사는 절의 요사를 처소로 삼으니 불서를 대할 일도 잦았고, 스님이 출타하고 나면 도량석을 할 만큼 되었다. 오년 과정인 농림학교 공부는 마음에 없어 도서관에 파묻혀 사는 나날을 보내다가 동래 범어사 대학생 수련대회에서 「신심명」 강의를 듣고는 제가 갈 길을 정했다. 삼 년을 이곳에서 농사를 지어라. 강원에 가는 일을 탐탁찮게 여기던 구산 은사 스님 뜻이 아니더라도, 도를 깨칠 마음이 급하여 딴 뜻은 전혀 없을 때 였다. 스스로 제 성품을 평하되 감성적이고 비논리적인 면이 승하다하였거니와, 먼 길 떠나기 앞서 준비시킬 일이 있어 보였던지 은사 스님은 그리 일렀다. 전공한 것과 무관치 않기도 했기도 했으려니와, 그 말씀을 지성으로 받들어 농사일에 매달리는 그에게 은,사 스님은 곧잘 이르곤 했다. 조계종 제일 원두로다. 해인사, 통도사, 수도암, 봉암사 풍의 선방을 전전하면서도 자청하여 원두를 살았거니와, 산철에는 “말뚝에 매인 소처럼” 본사로 돌아와 땅을 일구고 나무를 심는 나날은 그로부터 비롯되었을 터였다.
산문에 든지 이태 만에, 은사 스님을 모시고 조계산 상봉 아래의 인월정사에서 겨울 한 철 산 때를 잊지 못한다. 하늘에는 별 뜨고, 땅에는 지천으로 핀 억새 꽃술이 날카로이 빛날 때, 방문을 열어 놓고는 별바래기를 하시곤 했다.
남극 노인성 별빛을 몸에 씌면 무병 장수하느니.
용맹정진의 방편으로 삼으시던 말이었으리라. 시간 맞춰 약 달여 드리고, 밤잠 없이 정진하시는 스님 기척 듣다가 세시면 일어나 눈 쌓인 도량을 맑히곤 했었다. 큰절에 내려가실라치면 눈쌓인 길을 장화발로 문대어 털신 안 빠지게 해드리곤 하면 그해 겨울, 싸릿대를 엮어 삼백 개 가까운 빗자루를 엮었다. 은사 스님이 그러는 그를 깨우시던 말씀,
중이 일에만 팔려 있으면 일꾼이야.
무얼 하든 성성히 화두를 들어야지 .
그몸 밤 삼경에도 밝은 달 빛 가득하니/ 바른 선정 깊이 닦아 진리에 돌아가네/ 높고도 뚜렷하게 전체가 드러나니/ 다음날 누구에게 어떻게 전해 줄까.
큰절로 법문하러 내려가시는 스님 모시고 가다가 지난 밤에 엿들었던 게송을 되뇌어 드렸더니, 스님 깜짝 놀라신다. 글자도 없이 그걸 늬가 어찌 알아들었니. 강원도 안 간 시자의 귀 치고 탐탁한 데가 있고나.
그런 인연 때문이었을까. 83년 겨울 어느 날 저녁 예불 시간, 이미 연전에 당신의 명운을 내다보고 비치신 바 있었거니와, 그 말씀대로, 앉은자리에서 좌탈입망하시기 전에 그에게 열반에 받아 적으라 이르셨었다.
십 년 전쯤에 그는 「선에서 본 반야심경」이라는 책을 우리말로 옮겨 펴냈다. 보림사의 복장에서 나온 것으로, 송나라 때 사람이라 짐작되는 대전 화상이 지은 책이었다. 구산스님이 이를 보고 참으로 회유하다 찬탄하신 뒤로 영인하여 널리 법공양을 하기도 했었다. “술어를 풀어하여 전문과 연결시키면서 구조적으로 이해시키려는 사전적이고 교학적인 주해가 아니라, 선사 스스로 체험한 반야를 심경 구절마다에서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직설적이고 선적인” 주해서였던 것이다.
연전에 구산 은사스님이 조계산 방장 총림으로 계시던 15년 동안 상당 법문을 하신 것과, 잦은 해외 나들이를 통해 수기 법문한 것이 책으로 엮여 나왔었는데, 천 쪽 가까운 분량의 원고를 번역한 것도 그이다.
그것뿐만 아니라, 스스로 털어놓건대, 그가 섭렵한 수다한 불경 가운데서도 선문 염송집에 남다른 착이 있었다. 역경원 등에서 선문염송집을 우리말로 옮긴 일이 없지 않으나, 그것이 그의 작업에 큰 도움은 되었다 하더라도 미진함을 금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작정하고 그동안 틈틈이 우리말로 옮겨 두었던 것을 지난 이태동안에 컴퓨터에 모조리 입력시켰다.
전화도 없이 살다 지난해에사 겨우 해 달았거니와, 다각실 벽에다 “귀하의 방문은 여기 사는 사람의 시간을 낭버시키고 ---ꡓ 하는 글귀를 붙여놓아 오는 이를 무안하게 했던 나날을 보낸 끝에 성취해 낸 일이었다. 그것의 결과는 책으로든 사이버로든 펼쳐져 보인 뒤에라야 알 일이었다. 그러나 어록의 말귀를 풀어 보는 일은, 옮기는 이의 억측이 된다 하더라도 그 낙처를 짐작하고 있어야, 앞서 꿰고 있어야 도모해 볼 만한 일이라 그가 말하니 이일에 대한 그의 기백을 짐작할 만했다.
생시에 시천문이 들어 있어 글재주가 있겠다는 소리를 듣기는 했어도, 어릴 때 유생이던 할아버지의 훈도 이해 천자문을 깨쳐 받은 것을 끝으로 한문은 스승을 모시고 익힌 바가 없으나, 그가 그 동안 홀로 겪어 낸 수고를 알 만하다. 그가 광원암을 복원해 낸 것이 ꡒ선사들의 얼이 서린 터전을 다듬어 옛날의 난야를 다시 세우는 것은 옛사람의 본을 따라 뒷사람이 보리의 싹을 기르기 위해서 지극히 마땅한 것ꡓ이라 하더라도, 혜심스님 마음에 홉족한 바 있을 듯하고, 송광사본 선문염송집이 또 하나 마련될 터이니 더욱 갸륵한 바 있을 터였다.
그러나 다짐해 두건대, 이런 모든 일은 결코 목적이 될 수는 없으며, 그저 수행의 조도助道가 될 만한 일로 심을 뿐이라 했다.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서 성도하신 뒤 초전 법륜을 펼칠 적에 사성제 법문을 방편으로 삼으니, 다섯 수행자가 “말귀”를 알아듣고 그 자리에서 아라한이 되었다.
이즈음 불교에 관심을 둔 이라면 중학생이라도 사성제를 외자 못할 사람이 없고, 그것으로 논문을 써서 박사 학위를 받은 이도 있으나 그것을 진실로 알아들었다면 모두가 아라한이 되었을 터였다. 그러지 못했으니 모두 달을 가리켜도 달은 보지 못하고 손가락만 보고 있는 셈이다.
상대를 떨어내고, 중생도 부처도 떨어내어야 절대에 이를 것인즉, 그 분별마저 하나로 통일시켜 그것마저 여읠 수 있어야 할 터인즉---그의 눈이 매섭게 빛나면서 마주 앉은 이 서늘하게 만든다. 사람을 대함에 있어 따스하기만 하여 우행인가 했더니 호시였다.
선문의 염송이란 선의 언어적 표현이니 그것을 수행으로 풀리면 선과 다를 바 없을 터였다. 지난날에 좌복 위에서 결사를 도모할 때마저 그는 일매지어 수좌라 불리는 것도 탐탁치 않았고, 정혜사에서 열린 화엄학림에 참석하면서도 과단만 치고 있는 듯한 공부자리를 슬며시 피해 나오곤 했다.
그리고 금산사 뒷산 기슭에 차씨를 묻곤 했다. 짧으면서도 숨긴 뜻이 깊은 게송이 더 맛나게 얽히더라 했으니, 그 때에 차씨를 심으면서 홀로 그 경지를 헤맨 것은 아닌지 모를 일이었다.
지난 정초에는 하루 열여섯 시간씩 화엄경을 읽으며 정근을 했다. 목소리가 갈라져 나간 끝에 다시금 확인한 바 있으니, 화엄경도 조사어록과 다를 바 없다는 새삼스러운 사실이었다. 허공을 끈으로 삼으면(모두 다 걸리어) 세상에 통하지 않을 것이 없다 하지 않았던가. 정근을 끝내고 나니 문풍지 우는소리도 여느 때와 다르게 들리지 않았던가.
달무리 진 범어니 내일도 쾌청할 터였다. 성화지절에는 붓꽃이니 분꽃이니 다루어 피어 도량이 적적치 않다 하였다. 그러나 우물가에 은색 꽃술을 단 삼지닥나무뿐, 오늘밤은 뿌연 달빛만 빈 도량에 가득하다.
부웃, 부웃, 어디선가 부엉이가 울었다.
목숨 있는 것들, 어느 때인가 가죽 주머니 털고 바람과 물로 돌아갈 일 미리 익히기라도 하듯, 육신을 땅에 가장 친밀히 누이고 쉬는 시간. 그러나 너는 누구냐고, 부모 있기 전의 너는 도대체 어떤 것이더냐도 혼자 깨어 자꾸 묻는다.
물풀 밑의 붕어는 눈 뜬채로 잠자고 있고, 물길 가두어 만든 연못 위로는 서어나무 한 그루가 딴에는 제 그림자 한줄 뚜렷이 짓고 있었다. 반 배 부른 초열흘 달 주위로 두셋 별 있으니 반월삼성이라, 하늘에 마음 심 자 하나 걸린다. 천지가 이렇듯 중생에게 애써 이르는 바 있거니와. 대숲에서 천지 모르고 잠에 빠진 참새처럼, 그 노릇 아는지 모르는지. 발길 되돌려 광원암 마주하다 말고 그 자리에 붙잡히듯 멈춰 선다. 빗살무늬 정갈한 법당 문창만 환했다.
전등傳燈의 불빛이 이처럼 뚜렷하니 그 물음에 답이 되지는 않겠느냐고. 다생多生의 수행이 있었으면 금생에 깨침 있을터 였다. 그러나 끝내 그것에 못 이르더라도, 그 애씀만으로도 눈물겹게 고운 일이 아닐까 보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