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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전의 조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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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이야기 - 이대형 1998년 03월 193호
해인사 장경각 판전이 자리잡고 있는 터를 살펴보면 뒤편에 있는 법보전의 왼쪽 모서리는 그 뒤 기슭을 아주 급하게 깎아 다듬어서 만든 것을 알수 있다. 대개 절집들은 방향을 잡되 산세를 감안하여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앉은 것이 일반적인데 이 판전은 고집스럽게 조금은 무리하게 지금의 자리를 마련하였다고 볼 수 있다.
산등성이를 조금 덜 손질하려 하였다면 지금 판전의 오른쪽에 있는 퇴설당 등의 자리로 조금 옮겨서 정하였을 때 그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판전의 중앙 축과 대적광전의 중앙 축을 일치시키려는 의도가 강하게 실현된 것이다. 실제로 앞산에 올라가 해인사 전경을 내려다보면 판전은 대적광전의 광배光背인 듯이 보이기도 하고, 대적광전의 날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터를 조성하기 위한 축대가 정성스럽게 쌓인 것이 아주 소중하게 생각된다. 돌과 돌 사이를 빈틈없이 쌓아 나갔는데 돌을 특별하게 다듬어서 꼭 맞게 하려고 노력하였고 부석사의 것처럼 웅장한 느낌은 없지만 돌의 크기가 아주 큰 것 없이 고른 것이 소담한 느낌을 갖게 한다.
계단이 중간 참站 없이 곧바로 올라간 것에 대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해 본다. 단번에 올라가기에는 약간 숨어 찰(?) 정도이지만 이런 엄정한 오름의 느낌은 대적광전 앞의 계단에서도 그렇듯이 오름의 어떤 정신적 체계를 조형적으로 표현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축대의 성단과 계단의 이마선을 맞추어 놓은 것이 인상적인데 시각적으로도 계단의 이마선들과 축대선의 관계를 간편하게 정립해 주는 절제를 이끌어 내면서 계단이 축대면 전체를 이끌어 주는 조형의 효과를 내고 있다.
조금 낮은 느낌이 드는 앞 담장은 본디 바람의 소통을 위해 높일 수가 없었겠으나, 그 덕에 그 안을 거니는 사람들에게 심리적으로 부담을 주지 않고 안온함을 갖게 한다.
담장은 흙을 쌓아 올리면서 중간 중간에 기와를 켜로 삽입하여 소박한 것이 여느 전통 담장과 다르지 않다. 비바람에 쉽게 상하고 사람 손이 쉽게 닿을 수 있어 훼손되기 쉬운 것이 앞으로의 과제이다.
수다라장, 법보전, 동사간고, 서사간고로 둘러쌓인 중간 마당의 느낌을 기록할 필요가 있다. 전체의 크기는 대략 가로 35미터에 세로 153미터인데 중앙에 서서 동사간고나 서사간고를 바라볼 때의 크기가 정돈된 느낌을 준다. 지나치게 길다든지 좁다든지 넓다거나 높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 것은 잘 선택한 각 부분의 길이, 높이가 좋은 비례를 갖고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수다라장과 법보전 사이에 동, 서사간고를 끼어 넣었으면서도 그것이 앞뒤로 연결되어 박혀 있지 않은 것이 절묘하다할 수 있다. 네모지게 정리되었으면서도 폐쇄되어 있지 않은 열린 마당을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도 본디는 통풍을 위한 것이겠으나, 닫혀 있으면서도 열린 이 마당은 그 안에 서있는 사람의 마음을 무엇엔가 안겨 있으면서도 답답하지 않게 하는, 그 안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바람만큼이나 평안하게 하는 바가있다. 이렇게 네모진 것만으로 네모나게 둘러쌓인 공간을 만들었으면서도 가지런하다는 느낌밖에는 어떤 딱딱함도 느껴지지 않는 것이 참으로 묘하다.
경판을 세워서 보관하는 것이 통풍문제를 비롯해서 보존에 절대적으로 유리하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밝혀져 있는 지금이지만, 그것은 또한 경판 내부 공간의 조형적 모습에도 절대적이라 할 만하다.
판전은 경판의 보관 기능상 같은 요소의 되풀이일 수밖에 없는 것인데, 건물과 판가의 길다란 수평적 전개에 경판의 수직적인 소素의 전개가 여법하게 어울린다. 각 건물의 전반부는 햇빛 때문에 원래 비어 있던 곳이었는데, 이런 비어 있음과 그 곳의 내용이기도 하고 마감이기도 한 이런 목재 소素의 일물적-物的 펼침-아무런 장식도 없는 그저 그것만이 고요하게 존재하는 공간, 그 곳이 사람의 머리를 어떻게 깨우치게 하는지 헤아릴 길은 없으나 어떤 절대적인 전언傳言이 거기에 틀림없이 있다-은 어느 오후에 창틈으로 비껴 들어와 바닥에 던져진 햇살, 그것을 맑다 할지 밝다 할지 적당한 말을 모를 때처럼 참으로 가벼운 엄숙이 거기 있다.
창의 크기가 저마다 가지런하게 다른 것도 변화가 있는 재미이고, 창살의 수직적 요소가 건물 가구의 수평적 전개에 대비되는 것은 판가의 경우와 같다. 건물 외관도 나무리는 단적單的 소재의 엄정한 정립이고, 기와의 같은 빛깔도 이러한 외모를 다르게 하지 않는다. 비어 있는 창에 수직적 패턴을 만들어 내는 창살의 역할은 미묘할 만큼 단순하다.
건물 기둥들은 가늘게 느껴지지 않는다. 적당한 굵기에 경우에 따라 대충 다듬은 원시성이 오히려 웅혼한 생명을 표현한다. 이런 기둥 밑에 있으면서, 기둥을 받쳐 주는 주춧돌이 자연석 그대로인 것이 참으로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지극히 정제된 형태일 수밖에 없는 상부 구조에 이런 자연스러운 모습이 바닥에서 출발되고 있는 것이 납득할 수 있는 대비인 것이다. 지금은 없어져 버렸지만 개축되기 전의 구광루에서 맨 오른쪽에 있던 용트림하는 기둥이 기억난다. 그 힘찬 솟구쳐 오름과 대적광전 앞마당으로 그냥 통하던 기氣의 통로가 참으로 아쉽다.
포스트 모던의 수다스러운 제스추어가 그것인 듯이 착각하는 일상에서는 범부의 초옥草屋만큼이나 존재 그 자체뿐인, 이 일물一物에 대해 어디에 어느 부분에 어떤 의도가 보인다고 설명하는 일 자체가 부질없는 일이고 희극적이기까지 하다고 생각된다.
뛰어난 기技의 현란한 시현示顯이 거기 있어 듣고 보는 즐거움을 제공할 만한 것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지면이로되 눈을 시원하게 하는 너른 시야를 펼쳐 보이는 곳도 아니기에 무언가 보여 주려고 했던 마음은 더욱 옹색해지기만 한다. 차라리 조형미라는 말이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곧은 계단을 올라 그 조용한 마당에 섰을때 또 한 물음의 반복이 있었다.
ꡓ무작위, 무기교의 해탈이 바탕에 흐르고 있고, ꡒ인간적이면서도 잡념이 없는 깨끗한 어프로우치는 고대 한국인들의 소박하고 조작 없는 생활철학의 발로이고“. ”조금도 가식이 없고 최소한의 생활에 필요한 면적과 기능이 있을 뿐이다. 겸손하면서도 행관의 기개가 있고 빈곤하면서도 단정端正과 자존自尊이 있다. 불필요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래서 일견 무미건조하다. 그러나 여기에 결여된 것은 인공의 조작이지 예술의 부재가 아니다. 보면 볼수록 조화가 완전하고, 음미하면 음미할수록 그 진미는 쌀밥의 그것처럼 영구불변이다. 무미無味가 진미眞味라는 바로 그 경지이다.ꡓ
김원룡, 「한국미의 탐구」

미를 발견하게 하는 것은 문화의 프리즘이라고 한다.
곰브리치 기 소르망의 「세계를 움직인 사상가들」

건축미의 본질은 시대적 철학의 구현을 위한 사회적 노력의 종합적 결실이라고 본다면, 판전은 전체를 결론할 수 있는 이 “간결ꡓ이야말로 우리의 미래를 열어 줄 수 있는 열쇠어라고 온 마음으로 말해 주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