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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과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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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좌담 - 편집실 1998년 03월 193호
사회 : 이렇게 좋은 자리를 선뜻 마련해 주신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눈이 굉장히 많이 와, 이곳까지 오시기에 많이 불편했을 줄 압니다. 간단하게 서로 인사를 나누고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진행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먼저, 도법스님께 여쭙겠습니다. 불교적 입장에서 봤을 때, 스님이 육체 노동을 하는 것이 불교적으로 합당한지 궁금합니다.
도법 : 백장청규에서는 ‘일일부작, 일일불식ꡑ 이라 가르치고 있습니다. 좀더 심각하게 접근하자면, 이 문제는 오늘날의 불교적 생활방식과 생활가치를 다루는 문제입니다. 따라서 더욱 엄밀한 논의가 필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율장과 청규에 있는 여러 항목을 오늘의 입장에서 해석하는 문제이겠지요. 육체노동의 문제도 그러한 입장에서 다루어야 할 항목이라고 봅니다. 오늘의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구체화된 언어와 논리로 재해석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사회 : 언뜻 상황논리로 들리는데요.
도법 : 당연히 상황논리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다 같은 상황논리라고 할지라도, 상황 속에서 부처님 정신을 올바르게 구현하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상황에 부처님 법을 단지 맞추고자하는지 라는 차이가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회 : 이병철 선생님은 1996년부터 귀농운동을 하고 계십니다. 산업 사회는 농경사회 보다 발전된 사회 형태입니다. 그런데 이런 산업 사회 속에서 다시 농경사회로 돌아가자는 귀농운동을 전개하는 것은 무슨 까닭에서 입니까?
이병철 : 저는 공업화 중심의 산업문명은 성장의 한계가 있다고 봅니다. 우리가 공통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산업문명이 위기에 처하여 있다는 점입니다. 개인적인 입장에서도 지금의 삶이 지속가능한가? 하는 의심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삶의 양식은 자신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쓰고, 버리고 함으로써 자신과 뭇 생명을 파괴하는 생존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이런 위기는 농업적 생활양식과 가치를 회복하여야 치료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곧 귀농운동의 문제는 우리가 살아 남고 내가 살아 남기 위한 것입니다.
환경 위기. 식량 위기, 존재 위기를 극복하고, 자신의 건강한 삶을 보장하는 것이 농업적인 삶이라고 봅니다. 더구나 우리나라 삶의 형태는 개인과 민족과 국가 모두에게 불안정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로 아이엠에프 위기의 본질에는 우리나라가 외국에 빚을 갚지 않으면 굶어죽는다는 데 있습니다. 단지 에너지가 없어 공장을 운영하지 못하고. 자동차를 굴리지 못하는 류의 문제에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는 지금 식량자급도가 25퍼센트 이하입니다. 우리는 식량을 수입하지 않으면 지금의 북한보다 더욱 더 심각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세계 경제는 이미 일원화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국면은 거의 공황에 가깝습니다. 결국은 총체적 위기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다시금 먹거리를 삶의 중심축으로 하여 새롭게 생활양식을 형성해야합니다.
지금 정부에서 진행하고 있는 산업 구조 조정 문제는 정리해고, 빅딜 등의 방식으로 접근해서는 안 됩니다. 성장 제일, 공업화 제일주의로 치달은 우리의 산업 구조 전반의 변화를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이런 방식으로 접근한다면 지금의 위기가 조금 위험성은 안고 있으나 충분히 기회로 바뀔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사회 : 마을 공동체에 대한 선생님의 구상과 삶의 양식에 대한 구상은 어떻습니까?
이병철 : 현대인이라면 생산양식을 바꾸어야 한다는 데 대부분 동의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럴 듯 한 실천방식을 통해 대안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그래도 가장 생명을 살리는 생산인 농업조차도 속내를 보면 공업적인 생산양식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기름 난로를 통해 꽃을 피우는 경우가 대표적입니다. 이런 류의 방식은 회수가 불가능하고 건강하지도 않는 생명양식입니다.
저는 이것이 산업문명의 핵심이라고 봅니다. 순환이 막히고 재생이 불가능한 곧, 쓰고 버리는 것을 목적으로 생산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제 재생 가능하고, 순환 가능한 생활양식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건강성 보장이 불가능합니다. 밥을 먹고 똥을 누면, 다시 그것이 밥이 되는 구조가 되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농업적, 순환적 생활양식이라고 봅니다.
삶의 양식을 자연과 조화시키면서 재생이 가능한 것으로 바꾸지 않으면 안됩니다. 내가 농사를 지어서 돼지와 닭을 키우고, 다시 그것을 거름으로 쓰는 구조ꡑ 는 오염이 있을 수 없습니다. 축산도 지금과 같은 대규모의 생산이 아니라, 그 자체로 재생산이 가능한 범위에서 규모를 적정히 유지해야 할 것입니다. 밀을 심고 다시 수확하고 다시 나락을 심는 과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방식에서는 땅을 언제나 살아 있게 하고 대기를 깨끗하게 하는 효과를 가져옵니다.
이를 좀더 확장한다면, 마을단위에서는 축산이나 나락이 한마을 안에서 유기적으로 생산되며, 유기적으로 가공 처리되어 도시공동체로 보내지고 그러한 생활이 가능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합니다. 농업생산에서 협업이 가능하게 하도록 하고, 생활에서도 두레적 공동체를 지향하고 그리고 생활 오염 등을 자체 내에서 순화시키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필요합니다. 한 개인 삶의 입장에서 본다면 마을에서 애를 낳아 아이가 자라고, 다시 그 아이가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재생산 구조를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기 위해서는 마을에는 학교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학교조차도 그 마을에 살면서 특정한 분야에서 솜씨 있는 구성원이 상호 가르치는 방식으로 운영되어야 할 것입니다. 나아가 내부 구성원 중에서 채워내기 어려운 교육분야가 있다면 그 때는 새로운 구성원으로 하여금 채워줄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야 할 것입니다.
경제, 생활양식 등을 좀더 근본적이고 총체적으로 봐야 지금의 문제가 제대로 풀릴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 먹거리이고, 교육 문제이고, 건강을 지키는 문제 등이 있습니다. 지금 삶의 양식은 이 모든 것이 위험한 방식으로 해소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문제를 제기하다보면 늘 ‘자본주의에서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소득의 논리가 필요하다’ 라는 류의 지적을 받곤 합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까지의 생산과 유통, 그리고 소비의 모든 부분이 순환과 재생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고 판단된다면, 그것이 제대로 될 수 있는 방안을 찾아 나서야 할 것이라고 봅니다.
사회 : 말씀하신 것처럼 인간의 경제, 생활양식에서 협업과 재생산이 가능한 사회에서 인간이 살아간다면, 각 개인의 변화양상은 어떻게 나타날 것이라고 보십니까?
유정길 :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프랑스나 미국은 이미 산업 사회가 아닙니다. 그들은 농업 기반을 훌륭히 가지고 있는 농업 사회라고 봅니다. 그 만큼 먹거리의 중요성은 다시금 선진국에서 서서히 중요한 것으로 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사람이 이동하는 것이 자유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에 바탕을 빠른 속도, 빠른 시간, 성장주의적 진보관 등을 선한 가치로 보는 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류의 가치들이 위기의 내면에 있습니다.
요즘 일상을 생각해 보면, 리모콘으로 모든 것을 작동하는 편리함은 얻었지만 대신 아이들은 놀이터를 잃었습니다. 옛날 아이들에게는 일상생활에서 커다란 위험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무수한 위험이 존재합니다. 당장 작은 골목길에도 차가 다니면서 늘 아이들의 안전을 위협하곤 합니다. 그리고 흙을 밟지 못하고 아이들끼리 노는 것이 없습니다. 놀이를 통해 공동체를 배우고, 주변 자연과의 관계에서 따뜻한 심성을 형성하는 놀이와 문화가 없으니 아이들의 심성도 화폐화된 장난감의 세계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옛날의 삶은 서로 의존 관계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긴장감과 경쟁입니다. 공동체가 파괴된 것입니다.
지금 시기에 귀농을 하자는 것은 돈, 효율, 속도에 부여하는 가치를 바꾸자는 의미입니다. 도시를 떠난다는 것은 지금 가지고 있는 시스템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것이 인간의 도리인가? 등을 묻고 사는 삶을 살자는 것입니다. 정서적으로 따뜻한 아이가 생겨나는 것이 교육이라는 신념을 찾아가는 길이라고 봅니다. 우리는 농촌 삶이 최종 목적이 아닙니다. 단지 우리의 삶이 따뜻한 아이들이 자랄 수 있고, 서로를 챙겨야만 살아 갈 수 있는 화해적인 관계로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위한 방편으로 귀농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병철 : 우리는 도시의 풍요로운 삶이 행복한가? 라는 물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몸과 마음이 굉장히 심각한 상태에 있습니다. 우리 국민의 2O퍼센트 이상이 스트레스 성 질환에 시달립니다. 몸은 이미 많이 병들었고, 정신까지 시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삶은 분명 ‘이게 아니다!’는 것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삶 자체가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유리되고 있습니다.
아스팔트에서는 생명이 살 수 없습니다. 산업 문명은 생명을 차단하고 인간과 인간을 쪼개 놓는 것입니다. 이제는 한계에 이르렀습니다. 이제는 생명의 근원으로 회귀해야 합니다. 생활 문명을 근본적으로 건강하게 하지 않으면, 인간의 관계가 공공선을 추구할 수 있다는 것은 환상입니다. 그렇다면 농업은 건강한가요? 이미 농촌도 산업화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농업과 도시 모두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귀농이라는 것은 직업을 바꾸는 문제가 아닙니다. 삶과 가치관을 바꾸는 것으로 봐야 합니다.
사회 : 불교와 농사를 짓는 것과의 관계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도법 : 먼저 개인적으로는 산업 사회 기계화된 사회에 매력을 느끼지 못합니다. 불교를 하면서 불교를 통해서 이해한 삶은 일반적으로 추구하는 삶과 다릅니다. 세계를 불교적으로 이해하다 보니, 불교에서 가르치는 삶은 생명 질서에 맞는 삶입니다. 지금 이것에 가장 근접한 것은 농업이고 농촌의 삶이라고 봅니다. 이것이 첫 번째 관련성이라고 봅니다.
두 번째는 옛날 사찰의 기록을 보면 삼천 승도, 오천 승도가 주석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지금의 숫자 개념으로 봐도 엄청난 대중이 아닐 수 없습니다. 늘 궁금했습니다. 이 숫자가 갖는 의미를 무엇일까? 라는 의문을 가졌습니다. 일전에 김광식 씨의 논문을 보니, 오천 승도는 비구 오천 명이라는 숫자가 아니라고 주장하더군요. 이 숫자에는 비구도 있고, 사미도 있고, 신도로서 생활하는 사람-정인-등도 있었다는 주장입니다. 예를 들어 실상사라고 하는 도량에서 같은 사상적 기초 위에 경제와 생활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승도라고 보았던 것이죠. 이 단위를 중심으로 경제와 문화, 신앙 등이 다 이루어지는 자급자족의 질서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사부대중이 함께 하는 공동체라고 봅니다. 나는 이것이 다시금 회복되어야 할 것으로 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불교는 지역 대중과 함께 하는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유정길 : 불교는 산업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안타까운 면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긴 측면에서 봤을 때, 이제 세상의 흐름은 이런 불교의 특정이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도록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 이제 시대적 요청은 불교의 이해와도 관련되어서 상호 미래지향적으로 결합할 수 있는 계기가 주어지고 있다고 봅니다.
도법 : 불교적으로 세계를 이해하고 불교적 세계관에 입각한다면 현대의 성취, 발전, 지배, 경쟁의 논리 등은 설 땅이 없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사고와 논리가 세계를 지배합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불교가 단지 수동적으로 세상의 변화 논리와 변화의 방향을 따를 것이 아니라, 불교적 세계관과 원칙과 논리에 의해 세계에 기여해야 할 것입니다.
이병철 : 생명의 위기 문제, 생명을 상품화하는 문제, 생명을 수단화하는 문제, 그것으로부터 생명을 살리는 구조로 나가는 것이 제가 볼 때는 불교에서 얘기하는 모든 생명을 살리는 것이라고 봅니다.
사회 : 사찰에서 농사를 짓는다면 사찰환경이 보호될까요?
유정길 : 환경문제는 시대적 방편이라고 봅니다. 마찬가지로 귀농운동도 인간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기 위한 방편이라고 봅니다. 사찰이 얼마나 친환경적인가? 혹은 반환경적인가? 라는 것까지 모두 방편으로 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볼 때에 불교의 원래 목표는 죽이는 관계가 아니라 살리는 관계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농사와 농촌의 삶을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일은 사찰한테 매우 좋은 방편일 수 있습니다.
지금 불교가 환경을 살리는 것에는 몇 가지 복합적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가운데 제일이 자연환경을 살리는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대중과의 관계가 살아난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농사를 짓는 행위 속에는 분명 사람들과의 관계가 필연적이기에 그러합니다. 지역공동체 속에서 사찰이 환경을 살리고 관계를 살리는 것이 바로 지역 대중과의 관계를 살리는 길이라고 봅니다. 또한 이러한 관계를 살리는 것은 불교 내부적으로는 부처님 삶의 방식을 그대로 실천하는 바람직한 모습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러한 활동의 결과는 사찰 환경을 지켜 나갈 수 있는 근본적인 힘을 갖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병철 : 저는 불교가 깨달음을 얻는 것과 중생 구제를 함께 추구하고 있다고 봅니다. 중생 구제라는 개념에는 생명이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위기 속에서 이러한 방향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농업적 생산양식의 회복은 파괴되어 가는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의 관계들을 회복해 가는 운동인 것입니다. 만일 이러한 운동이 모범을 만들 수 있다면, 이것은 한 사찰, 한 종교에서 끝나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불교가 시대적 과제에 답하는 문제라고 봅니다.
사회 : 구제 금융 시대의 실업자의 증가와 귀농운동과는 어떠한 관계가 있을까요?
이병철 : 지금 농촌에는 젊은 사람들이 없습니다. 그것은 생명의 재생산이 안 된다는 것이며, 동시에 자연과 인간간의 재생산이 안 된다는 뜻입니다. 농촌의 삶은 끝장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제 금융 시대로 대표되는 요즘은 이제 많은 사람들이 돌아갈 수 있는 조건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긍정적으로 활용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봅니다. 나아가 이 사람들이 상업적 목적을 가지고 새로운 직장을 찾아 농촌에 간다면 소용이 없습니다.
저는 이런 사람들에게 생태적, 그리고 생명을 살리는 길로써의 귀농을 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지원 협력 사업이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러한 일을 종교나 시민운동단체가 해내야 할 부분이라고 봅니다. 특히 불교는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다고 봅니다. 불교는 사상적으로도 이러한 운동에 특히 강점이 있습니다. 지금 농촌에는 땅을 살 수가 없습니다. 농사를 지어서는 이자를 갚아 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시점에서 사찰의 토지를 활용한 사업이 필요합니다. 농사를 배우고 실현해 보는 훈련 도량으로서 사찰의 역할이 적절하다고 봅니다.
농사를 짓기 위한 올바른 마음 자세는 교육되어야 합니다. 나아가 오랫동안 농촌을 떠났거나 또는 처음 농촌을 찾는 사람들에게 농사에 관한 일머리도 일러 주어야 합니다. 그러한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데 불교계와 사찰은 커다란 역할을 해낼 수 있다고 봅니다.
사회 : 귀농하는 사람들이 어떠한 마음자세를 지녀야 하겠습니까?
도법 : 우리가 추구하고자 하는 진정한 삶의 모습을 봐야 합니다. 불교는 깨달음 또는 해탈, 또는 요즘 언어로 표현하자면 자유 실현을 추구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삶의 궁극적 가치라고 한다면,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그것과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농사짓는 행위는 그것 자체로 삶의 목적에 부합할 수 있습니다.
농사짓는 일은 바로 인간의 정신 향상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산업, 도시, 정보화 사회 등은 인간의 윤리, 도덕 의식의 회복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우리의 궁극적이고 이상적인 가치를 실현하는데 가장 바람직한 것은 바로 농촌을 살리고 지역공동체를 살려나가는 것입니다.
만일 자동차공장에서 열심히 일해, 그것을 통하여 우리가 궁극적 가치를 실현할 수 있다면, 그것을 열심히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현재로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봅니다. 개인적으로 봤을 때, 소득의 논리 등으로 농사를 다루는 것도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이병철 : 스님의 말씀처럼 우리가 생산양식과 생활양식을 생각함에는 두 가지 문제가 논의되어야 합니다. 하나는 자주, 자립적인 인간을 실현하는데 도움을 줄 것 인지의 문제를 살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지속 가능성의 문제를 보는 것입니다. 산업 사회가 좋은 점이 많긴 합니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두 번째로 살펴 본 지속 가능성이 없다고 봅니다.
지금 인류의 지속 가능성은 우리의 삶을 단순 소박한 삶으로 바꾸는 것을 담보할 때 가능합니다. 우리의 삶을 단순 소박하게 하지 않고, 현재의 욕망과 소비 구조에 그대로 따라간다면, 우리의 싫어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생태적인 생산양식과 생활양식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유정길 : 사찰의 생활은 3시에 예불하고, 9시에는 잠을 잡니다. 그러나 도시에서의 삶은 전등불을 켜 놓고 자연질서에 어긋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예전에 군산에서는 어느 공원에 가로등을 조성하는 데 몇몇 단체들이 반대했습니다. 새들도 잠을 자야 한다는 논리였습니다. 그런데 그 논리가 먹혀들었습니다. 우범 지대를 방지하기 위한 가로등 설치 작업은 자연 질서를 지키기 위한 사회단체들의 노력으로 저지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것과 마찬가지로 귀농은 자연적인 리듬에 맞게 삶을 살기 위해, 건강하게 삶을 지속하기 위한 방편이라고 봅니다. 개인의 정신적인 측면과 건강, 자연 친화 등을 목표로 한 삶의 추구를 귀농이라는 말로 함축하고 있습니다. 세계 모든 질서를 귀농으로 해소하려는 것이라는 비판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댐을 무너뜨림에 있어, 댐을 폭파하는 방법을 쓴다면 그것의 신속함에 대응하여 위험도 따르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틈을 통해 서서히 댐을 붕괴시켜 나가는 방편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이병철 : 귀농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도와야 하는데, 이는 베푸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분들과 함께 하는 모색과 고민이 있어야 합니다. 이들과 함께 하는 프로그램을 해야 합니다. 오랜 기간에 걸쳐 스스로의 삶을 선택하고 찾아 나설 수 있는 몇 가지 의미 있는 조건들을 형성해서 함께 선택해 나가는 것입니다. 종교계나 시민단체들은 이러한 일을 꾸준히 펄쳐 나간다면 의미 있는 것이 될 수 있을 것 입니다.
사회 : 앞으로 귀농운동을 하게 된다면, 불교와 그리고 특히 실상사에서는 어떠한 역할이 가능할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여러분들이 정리를 겸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이병철 : 불교에는 두 가지 좋은 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는 불교가 가지는 세계관과 생활 자체가 귀농 그리고 생태농업의 가치를 포함하고 있다고 봅니다. 이는 불교가사회의 어느 부분보다도 먼저 이 사업을 진행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다음으로는 귀농운동과 생태농업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토지 문제입니다. 불교는 귀농운동의 토대가 마련되어 있는 곳입니다. 현대사회는 인간의 지속적인 생존 가능성마저 식량, 오염, 기타의 이유로 위협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불교가 가지고 있는 강점을 올바르게 사회로 회향하는 방편을 가지는 것이 이 시대에 필요한 하화중생의 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도법 : 실상사는 토지와 임야를 합해 3만여 평쯤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조건을 활용하여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지를 연구해 나가야 할 것이라고 봅니다. 이 과정에서 실상사는 귀농자를 위한 교육 공간이든지, 실질적으로 생태 농사를 짓는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거기에 약간 욕심을 낸다면, 지금의 한국 농촌의 현실에 대해 좀더 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면 좋을 것으로 봅니다. 지금 한국 농촌에 대한 세인들의 생각은 ‘농촌에도 희망이 있을 수 있다’ 라는 의식으로 바꿀 수도 있다고 봅니다. 실상사가 이런 흐름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최대의 기쁨일 것입니다.
사회 : 오늘날 산업 사회는 전환의 시점을 맞고 있고 그것은 생존을 위한 필연적인 선택일 수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순환과 재생산의 체제로 돌아가는 것, 그것만이 우리 인류가 살 길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존재 방식이나 삶의 양식이 좀더 소박하고 단순해져야만 할 것입니다. 불교는 그러한 시대적 전환에 아주 합당한 답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농업은 인간과 삶을 바꾸는 좀 더 구체적인 방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불교와 귀농의 만남은 대단한 의미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생명의 질서에 맞고 공생을 전제로 하는 새로운 생산양식의 창출이 불교와 귀농의 만남에서 가능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늘 앞서는 것만이 발전일 수는 없습니다. 「오래된 미래」에서 보듯이 미래는 이미 과거 속에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불교와 귀농의 만남이 오래된 미래를 찾아가는 지속적인 발걸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눈이 많이 오는군요. 오랜 좌담에 성실히 임해 주신 스님과 두 분 선생님께 감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