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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인가다운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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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의 방 - 송석구 1999년 07월 209호
삶의 길은 뜻밖의 일에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언제나 평화롭고 안락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사실은, 불안과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다. 당장 내일 일도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인생을 체념하고 운명적인 허무주의에 싸여 흘러가듯이 그렇게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기우己憂라는 말이 있다. 옛날 중국 기나라에 살던 어떤 사람이 밖에 나가면 하늘이 무너질까 땅이 꺼질까, 방에 있으면 천장이 무너질까를 염려하여 나오지도 들어가지도 못했다는, 쓸데없는 걱정을 가리키는 말이다. 인생은 본디 우연의 연속이라 불안하고, 그래서 뜬구름같이 무상할 뿐이지만 그래도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이 또한 인생이다.
인간은 질문을 할 수 있는 존재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나란 무엇인가? 삶이란 어떤 것인가? 등등을 묻는다. 선철先哲들이 수천 년 동안 똑 같은 질문을 해 왔지만, 그러나 아직 명확하게 해결되지 않은 물음이기도 하다.
만일 평생 동안 한 번도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스스로에게 묻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아주 행복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다. 거기에 정답이 없다는 것은 어쩌면 저마다 스스로 해결해야만 한다는 못일 수도 있다. 자기에게 무언가 문제가 생겼기 때문에 그러한 질문이 생겨난 것이고, 그러기에 스스로 해결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자각自覺이라고 부른다.
불교는 처음부터 이러한 자각에서 출발한 종교이다. 이 모든 감각하고 생각는 것을 고苦라고 하고, 또 그 고의 원인은 갈애渴愛, 곧 욕망이라 한다. 그러나 인생이 모두 고라고 한다면 살려는 의지가 필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불교의 가르침은 괴로움을 앎으로써 괴로움의 원인을 찾게 되고 괴로움의 원인이 파악될 때 괴로움이 없어지는 세계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것을 멸滅이라 하였다. 멸이란 적멸寂滅의 뜻으로 ‘고요하고 파동 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른바 욕망에 따라 번뇌가 부글부글 끓고 있는 이 현실에 그 번뇌가 끊어지고 고요해진 세계를 말한다. 이 길을 가는 방법을 도道라고 하였다. 도란 글자 그대로 길이다. 여덟 가지의 길을 통하여 영원히 평화로운 마음에 정착할 수 있고 모든 욕망을 절제할 수 있는 지혜를 가르친다. 그것이 곧 바르게 보는 것(正見)이요, 바르게 생각하는 것(正思推)이요, 올바른 말(正語), 올바른 행동(正業), 올바른 생활(正命), 올바른 노력(正精進), 바른 회상(正念), 올바른 자기 몰입(正定)이라고 하였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너무 오만하다. 어떠한 진리도 그것이 다만 하나의 상대적인 진리일 뿐이라고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어떤 것이 바른 삶인지 진지하게 알아 보려고 하지 않는다. 너무나 물질에 집착한 나머지 물질만능주의에 빠져 있다. 물질이 우리 삶에 중요한 부분이기는 하나, 그것이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물질에 이끌려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인간이란 결코 물질적인 존재만은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가치가 있는 경우가 있다. 우리는 영혼과 육체가 함께 우리를 이루고 있음을 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의 세계가 눈에 보이는 육체의 세계만큼, 아니 그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알고,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는데 영혼에 대한자기 성찰이 매몰되어 가는 까닭은 무엇일까?
영혼에 대한 성찰이 가능 하려면 합리적인 생활이 요구된다. 윤리적인 생활은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되는 유일한 길이고, 이러한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 또한 인간의 운명이다.
유가儒家는 인간이 인간인 까닭을 흔히 금수와의 비교를 통해 말하고 있다. 그 다른 점을 윤리적 덕목으로 제시하고 있으며, 그것은 또한 사회와 국가의 보이지 않는 도덕법으로 실정법보다 우위에 있다고 한다. 그것이 곧 도심道心의 확충이요, 인심人心의 절제였다. 「서경書經」에서 인심은 오직 위태롭고(惟危) 도심道心은 오직 미미하다(惟微)고 하였다. 인심은 우리의 눈, 귀, 코, 입 등 신체에 따라 요구되는 마음의 세계, 곧 욕망의 세계로서 눈에 보이는 것만큼이나 위태로워서 절제해야 하고, 도심은 실實하여 효도하려 하며, 충성하려 하고, 가정을 바르게 하려 하고, 형을 존경하려 하고, 친구에게 믿음 있게 하려 하는, 이른바 오륜五倫을 실천하려는 천리天理의 세계로서 비록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인간이 되려면 마땅히 확충시켜 나가야 하는 것임을 말한다. 인심의 세계는 금수와 다를 바 없지만 도심의 세계는 인간만이 지닌 것이다. 그래서 맹자 같은 성인은 그것이 비록 미약하지만 보존하느냐 그러지 못하느냐에 따라 인간이 되드냐 금수보다 못한 존재가 되느냐가 판가름 난다고 하였다.
금수의 존재는 닫혀 있다. 한번 금수로 태어나면 일생을 금수로 지내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존재는 열려 있다. 존재성이 변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 이상이 될 수도 있고 인간 이하가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가 인간 이하의 길을 선택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인간인 바에야 우리는 인간 이상의 길, 곧 성인의 길, 깨달음의 길을 선택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이 바로 윤리적인 삶이기 때문에, 인간이 인간되는 까닭을 윤리 도덕에서 찾는 길이다. 유교는 금수와의 차이를 통하여 거기에 답하고자 한다.
불교는 인간의 궁극적인 물음, 곧 ‘나란 무엇인가’, ‘삶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데에서 시작하였다. 인간이 인간인 까닭을 이러한 궁극적인 질문이 가능하다는 데서 찾은 것이다.

불교든 유교든 모두 인간의 참된 모습을 직관으로 파악한 것이다. 이것은 합리적인 이념과는 다른 차원의 인간 존재의 내면성을 제시한 것이다. 인간의 참모습을 직관해 볼 때, 인간에게는 궁극적인 질문과 스스로 해결하려는 마음이 있고, 오륜 같은 것을 실천하려는 마음이 있음을 본 것이다.
우리한테는 그러한 정情이 있다. 그러한 정은 기본적으로 선할 수밖에 없다. 그 정은 맑은 수원水源과 같이 비록 미약하게 흘러나오는 것 같지만 결국에는 큰 강을 이루듯이, 확충하면 아무리 퍼내도 마르지 않는 것이다. 확충하여 큰 강을 이룬 마음이나 졸졸 흘러 나오는 수원의 마음이 두 가지일 리가 없다. 한마음인 것이다.
결국 인간이 인간인 까닭은 이 한 마음에 있다. 그것을 알고 확충시켜 나가면 인간, 성인, 부처가 되고, 그것이 있는데도 생각하지 않고 그래서 키워 나가지 않으면 현재의 인간성 자체도 지키기 어렵게 된다.
어떻게 하면 키워 나갈 수 있는가? 자기의 존재를,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윤리적인 생활을 하는 것이다. 자각과 윤리적인 생활, 이를 통하여 천하의 주인이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