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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의 자유가 보장된 백련암 행자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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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행자시절 - 원택 1998년 02월 192호
부모님께 차마 “출가하러 갑니다”말씀드리지 못하고 “백련암에 큰스님이 계시는데 ‘여기 와서 공부해라’ 하셔서 백련암에 갑니다” 하고 집을 떠나왔습니다. 백련암과 인연을 맺은 것은 일년 전에 친구가 “백련암에 동창생이 스님 되어 있는데 한번 가보고 싶은데 혼자 가기는 그렇고, 성철스님이라는 큰 도인이 계시니 니는 도인 스님 보러 가고 나는 친구 보러 가자” 사정을 해서 큰스님을 처음 뵙게 되었습니다.
삼배를 드리고 앉으니 “친구 보러왔나 부처님 보러 왔나” 하고 질문을 던지시는데, 쏘아보는 눈빛이 얼마나 형형 하던지 바로 쳐다볼 수 없는 위엄을 느꼈습니다. 이런 저런 말씀 끝에 제가 “큰스님 뵈온 기념으로 좌우명을 얻어가고 싶습니다r” 하니 “그럼 절돈 삼천원 내라” 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절돈”이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현금 삼천 원을 스님 앞에 내놓으니 “나는 그런 돈 필요 없어!‘ 절돈 삼천 원 내거라” 하시는데 뜻을 몰라 어리둥절하고 있으니 친구 되는 스님이 “법당에 가서 삼천배하라는 말씀”이라고 해석해 주어서 그 말뜻을 알았습니다. “큰스님. 비구는 이백오십계, 비구니는 오백계, 보살계는 마혼여덟계라고 하는데 저희에게는 한계만 주시면 되는데 삼천 원 내라 하십니까” 하니 “이놈 봐라! 니는 불교에 대해 뭘 좀 아나? 그럼 니는 만원 내놔라.” 이렇게 해서 천태전에 올라가서 스물네 시간 동안 세끼 밥반 먹고 절만해야 했습니다. 그런 뒤 다음해 일월중순 백련암으로 출가를 하게 되었습니다. 짐을 풀고 큰스님께 절을 올리니 “오긴 왔구나!” 하시면서 영자당에 올라가서 삼천배 일주일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한겨울이라 새벽에 달기물을 올려놓고 절을 올리면 어느새 물이 열어서 붕긋이 솟아올랐습니다. 나흘째 되는 날 “여기 있다가는 만날 삼천배하라면 어떡하나. 이렇게 힘들어서 어떻게 살겠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어 그만 하산하고 싶은 마음으로 하루를 보내고 저녁에 짐을 챙겼습니다. 내일 아침에 하산할 각오를 단단히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 날 밤 꿈에 장삼을 입은 여러 스님들이 나타나서 “하산하지 말고 기도를 마쳐라 그리고 스님 노릇 잘하라”는 당부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놀라 잠을 깨니 꿈이었고 혼자서 ’거참 이상하다‘ 생각하며 새벽 천배 기도를 마치고 아침 공양을 하였습니다. 떠나더라도 공양 끝의 청소는 하고 떠나야지 하는 생각으로 물걸레를 들고 방 청소를 하였습니다. 마침 그때 큰스님께서 나오셔서 “어, 이놈 봐라. 왜 아직 도망가지 않고 있나, 도망가야지” 하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참 이상하다. 큰스님께서 내 마음을 뚫어 보시는가 보다. 어제 꿈도 참 이상하고…ꡑ 하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예, 스님. 그렇지 않아도 오늘 아침 방 청소하고 도망가려고 했는데 스님께서 다 알고 계시니 어찌 도망가겠습니까?”하니 “그래 그래, 기도 잘 마쳐라” 하시며 크게 웃으셨습니다. 정말 힘겹게 칠일 기도를 마치고 삭발하니 그 날이 동짓달보름이었습니다. 그러고 한 며칠 뒷방에 쉬도록 가만 두어서 혼자 생각에 방도 하나 주고 아무 간섭 없이 내 마음대로 사는가보다 하고 편안히 지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원주스님이 나를 밖으로 불러내더니 샘가로 가지면서 바가지와 쌀 한 되와 조리를 들고 왔습니다. 그러면서 저보고 쌀을 씻으라는 것입니다. “아니요. 저는 쌀 씻을 줄 모르는데요” 하니 원주 스님 눈치가 좀 이상해지더니 ꡒ공양주가 오늘부터 없으니 행자가 공양주 좀 하야겠으니 쌀 씻고 밥 짓는 것부터 배워야지요“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지금까지 밥 한번 지어 본 적도 없고 그런 것은 여자 하나 구해서 하면 안 됩니까?“ 하고 유식한 말을 했더니 ”이 행자가 절 생활에 대해서 아는 것이 하나도 없구만, 큰스님께서 불교에 대해 좀 아는 것 같다고 하셨는데 영 깡통이로구먼“ 하며 면박을 주었습니다. 그렇게 시작하여 공양주를 아홉 달 동안 했습니다. 어느 날 객 스님이 오셔서 공양을 올렸더니 조금 있다가 ”여기 공양주가 누구냐? 빨리 와!“ 하시며 뱉은 밥을 싼 뭉치를 코앞에 냅다 팽개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순간 말못할 설움 같은 것이 밀려들며 영 행자하고 싶은 생각이 싹 달아나고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공양주를 마치고 나니 큰스님 시찬을 하라해서 일년반 넘게 시찬 생활을 하니 부엌대기로 오래 보냈습니다. 그때는 연료가 기름이 아니라 구들 아궁이였으니 하루 일과 가운데 산에 가서 나무하는 일이 큰 일이었습니다. 지게를 져 봤습니까. 흥부 박 쪼개는 톱을 만져 봤습니까. 도끼로 나무를 패 봤습니까. 모든 것이 새롭고 서툴 뿐이었는데 스님들은 익어서 그런지 톱질도 잘하고 도끼질도 잘하고 지게도 잘 졌습니다. 어느 날 한번 해볼 것이라고 소나무 토막을 가지고 도끼질을 했는데 쪼개지지를 않았습니다. 수십 번 도끼질만 해대니 나무는 쪼개지지 않고 너덜너덜 갈래갈래 찢기기만 하였습니다. 그때 마침 큰스님께서 올라오셔서 도끼질하는 내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시더니 ”이놈아! 기생오라비 도끼질하듯 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니 나무 패는 것을 보니 꼭 기생오라비 도끼질한다는 말과 똑 같다.“ 하시며 너털웃음을 지으시니 무안해 견딜 수 없었지만 실력이 없는 걸 어찌 하겠습니까? 그 뒤 어느 날 나무를 잘 패는 스님들 모습을 보고 나도 한번 잘해 봐야지 하다가 그만 도끼로 제 발등을 찍고 말았습니다.
다행히도 날이 시원찮았는지 발등이 주먹만큼 시퍼렇게 부어 오르기는 했지만 피가 솟구치지는 않았습니다.
이렇게 일이 서툴다 보니 일만하면 사고 치기가 일쑤였습니다. 지붕을 고칠 일이 생겨서 마당 여기저기 못이 널려 있으니 조심하라고 스님들이 당부하였는데 찔리는 사람은 다른 사람 아닌 나뿐이었습니다. 못독이 오르면 발바닥이 곪아 큰 고생을 한다면서 성냥개비 끝 화약을 여러 개 모아 뜸뜨기를 몇 번이나 하였는지 모릅니다. 돌을 옮길 때도 있었는데 두서너 명이 함께 옮길 때는 다들 호흡이 잘 맞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꼭 누가 다쳐도 다칩니다. 그 날은 손이 모자랐는지 저보고 끼라고 해서 하나, 둘, 셋하고 힘을 주는데 그만 제 쪽으로 힘이 기울어져 손가락이 돌 틈에 끼어 아악 소리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스님들도 제가 뭐를 하려 하면 말리기만 했습니다. 공양주를 살면서 초파일을 맞이했습니다. 원주 스님이 “행자들 수고 많으니 큰절 구경하고 오라” 했습니다. 그때 행자라고는 공양주인 저하고 채공하는 행자들이 전부였습니다. 큰절을 구경하고 오솔길로 올라오는데 뒷면에 있던 행자가 갑자기 “앞에 뱀” 이라고 소리쳤습니다. 저는 돌렸던 고개를 바로 하면서 어디하고 한 발자국 내딛는데 그만 뱀을 밟고 말았습니다. 아악하고 놀라 제자리에서 발을 동동 굴렀는데 어느새 뱀은 발둥을 물고 도망친 뒤였습니다. 양말을 벗고 보니 뱀 잇자국이 세개나 나 있었습니다. 그렇게 뱀에 한번 몰리고 나니 뱀에 대한 공포감이 조금 사라졌습니다. 그 전에 숲 속을 다닐 때는 쓸데없이 뱀이 나오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얼마나 했는지 모릅니다. 하루는 큰스님께서 부르시더니 “화두 공부는 잘하나? 육조스님은 어떤 분이라고 생각하느냐?”하고 물으셨습니다. 머뭇머뭇 하다가 “무식하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육조스님은 무식하셨지만 견성을 하신 뒤로는 설통說通이 생겨 무량중생을 제도하셨으니 너도 앞으로 글은 절대로 보지말고 참선만해라”하고 당부 하셨습니다. 그러신 뒤 얼마를 지나서 마당을 지나는데 헌 신문조각이 이리저리 바람에 날리고 있어서 그걸 주워 들고 아무 생각 없이 마당 귀퉁이에 서서 이줄 저줄 읽고 있는데 갑자기 큰스님이 나타나시더니만 “내가 그만큼 글을 보지 말라 했으면 안 봐야제. 이제는 흘러 다니는 헌 신문 조각까지 주워 들고 읽어! 이 나쁜 놈아!” 하고 호령호령이셨습니다.
저의 행자생활은 이렇게 실패의 연속이었습니다. 또 어쩜 실패의 자유가 보장된 곳이 백련암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 실패의 자유가 보장되었기에 오늘 이렇게 중노릇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백련암에서 생활하는 행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정말 큰스님께서는 얼마나 답답 하셨겠는가‘를 이제사 뺏속 깊이 느끼고 있습니다. 야단맞을 때마다 ’나는 잘하려고 그러는데 왜 그리 야단만 치실까?“하며 그 때는 꽤나 섭섭해했는데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