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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 잃은 방편은 독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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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비평 - 장휘옥 1998년 02월 192호
한 종교가 낯선 고장에 처음 전파될 때 효력을 가장 크게 발휘하는 것은 그 종교의 순수한 교리가 아니라 종교를 전파하는 사람의 신이적神異的 행적이다. 이것은 불교에서도 마찬가지다.
중국에 불교가 처음 전래 되었을 때 그에 대한 신앙을 가능하게 한 것은 주술이었다. 인도라는 토양에서 꽃 핀 불교가 중국의 민중 속에 스며들어 살아 있는 종교로 가능하기 위해서는 민간신앙과 결합한 주술이 필요했다. 이러한 상황 때문이었는지, 초기 중국불교에서 일반 민중에게 비친 부처나 보살은 민중의 현세 이익을 들어 주는 초능력자에 불과했다. 부처나 보살에 대한 교학적 연구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러한 부처나 보살은 교리상으로만 존재했고 일반인과는 전혀 무관했다 한국 불교의 전래 과정도 예외가 아니었다. 한국에 처음으로 불교가 들어왔을 때 , 불교는 어디까지나 외래 종교로서 서민들의 정서에 맞지 않았기 때문에 대웅전은 그들에게 위화감을 줄뿐이었으며, 따라서 사찰을 찾아올 리 없었다. 서민들에게 포교하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친근한 도교의 칠성이나 산신을 모시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래서 생긴 것이 중국, 일본불교에는 없는 칠성각과 산신각이다. 말하자면 칠성각과 산신각을 하나의 수단으로 활용하여 불교 본래의 정법으로 이끌고자 했던 것이다. 칠성이나 산신 자체를 신앙하기 위해 칠성각과 산신각이 있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오히려 이 두 건물이 있기 때문에 비로소 한국불교가 중국, 일본 불교와 다른 점, 곧 한국불교의 독창성을 말할 수 있다.
그런데 1970년대 말, 한국불교계의 일각에서는 칠성각과 산신각의 존재는 미신에 치우친 탓에 부처님의 정법에 따르기 위해서는 이 두 건물을 모두 없애야 한다는 의견을 제기했고, 한동안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 한국불교의 독창성이 빚어낸 전통적인 가람 배치로 보존할 수도 있는데 굳이 칠성각과 산신각을 없애야 한다는 주장이 나와야만 했던 것은 어디에서 연유할까? 필자는 이 문제를 방편과 미신의 혼동이 가져온 폐단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해 보고싶다. 불교에서는 주술 행위라도 자비에 근거하여 타인을 구제하는 수단이 될 때 방편方便이라 한다. 그런데 착각하지 말아야할 것은. 방편은 목적이 아니라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방편이란 말은 ‘어디에 가까이 다가간다’라는 동사에서 파생하여 ‘어디에’ 도달할 수 있는 수단이란 의미로 정착되었는데, 여기서 ‘어디’란 불교가 가르치는 진리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므로 어떤 행위가 방편이 되려면 ‘불교의 진리’라는 목표에 정조준 된 자비에 근거해야만 한다. 만일 이 방편이 진리라는 목표에서 벗어나 사리사욕을 채우고 자기 합리화를 위한 허울로 이용된다면, 그것은 이미 방편이 아니다.
칠성이나 산신 신앙이 이러한 방편의 성격에서 벗어나 버리면 그것은 미신이 된다. 칠성각이나 산신각의 철거 주장이 나온 것은 칠성이나 산신 신앙을 위해 사찰에 온 사람들에게 차츰 불교의 올바른 가르침을 설하여 참다운 불자로 인도하지는 않고 그러한 신앙을 이용하여 온당치 않은 이득을 챙기기에 바빴던 병폐 때문이었다. 이 사례는 어떤 행위가 방편이냐 미신이냐를 판별하는 데 참고가 될 만한 기준점을 시사한다. 곧 그것이 수단으로 그치는 r서이 아니라 정법이라는 목적을 늘 지향하고 있으면 방편이 되지만, 수단을 목적으로 혼동하면 미신이 되어 버린다.
70년대 말,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가람을 없애면서까지 불교의 미신적인 요소를 없애 보려 했지만, 오늘날 우리 불교계의 실태는 오히려 미신적 경향이 더욱 심해지는 추세다. 불교포교라는 미명 아래 부처님의 정법을 선양해야 할 사찰에서 공공연히 점을 치거나 그에 준하는 일들을 함으로써 불교의 이미지를 걷잡을 수 없이 손상시키고 있다. 물론 앞에서 말했지만, 불교 포교를 위해서는 방편으로 미신적인 행위도 필요할 수 있다. 그러나 여러 차례 이야기 했듯이 방편과 미신을 혼도애서는 안된다.
방편이 악용되는 근본원인은 종단 차원에서의 교육 부재와 비판의식 결여에 있다. “기독교는 교리가 못생겼기 때문에 사람 하나는 올바르게 키워 놓는데, 불교는 교리가 하도 잘나서 사람을 병신을 만들어 놓는다”는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나오게 된 것도 이 때문이 아니겠는가.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정법이 무엇인지를 투철하게 가르치고 재점검하는 평생교육의 장이 승가에 제도적으로 먼저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정법대로 살아온 비판의식 있는 사람을 이해 관계를 떠나 엄격하게 가려 뽑아 그들에게 운영과 실제 교육을 맡겨야 할 것이다.
방편과 미신의 혼동에 따른 병폐를 시정하기 위한 또 하나의 대책으로, 종단은 승적을 가진 사람들을 철저하게 관리해야 한다. 꽃마을 일력이나 공덕원 석용산 건만 보더라도 종단의 관리 소홀을 꼬집을 수밖에 없다. 종단은 평소 이들에 대해 제제는커녕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기다가 문제가 터지니까, 조계종 승려가 아니라는 식으로 발뺌하거나 매스컴이 불교를 비방하는 처사라고 분개하는데, 그렇다면 그렇게 매스컴에 알려질 때까지 종단에서는 무얼하고 있었단 밀언가. 도대체 그런 일이 텔레비전에 한번 방영될 때마다 불자들의 자존심이 얼마나 상하는지 종단은 알고 나 있는가 부처님의 좋은 진리가 한번씩 매스컴의 가십거리로 오를 때마다 한국의 불교 신자는 미신적이고 무식하다는 인상을 덮어쓰는 것이 짜증스럽고 안타깝다. 도약의 계기를 마련하는 종단에 바랍니다. 제발 안이한 생각이나 내부의 다툼을 버리시고, 진정한 방편과 정법의 철저한 교육을 통해서 한국불교의 저력을 대내외에 보여 주시기바랍니다. 우리는 방편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미신이 두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