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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사 새가 꽃을 물고 찾아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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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하고 청정한 수행을 위한 법문 - 법전 1999년 07월 209호
화락화개백조비花落花開百鳥悲하니
암전물시주인비巖前物是主人非라
도원지척挑原咫尺을 무심처無尋處라.
일도어사一掉漁蓑가 적막귀寂寞歸로다.
꽃 지고 꽃 피는데 온갖 새가 슬피우니
바위 앞의 물건은 옳고 주인은 그르다
도원을 지척에 두고 찾을 길 없으니
외돛대의 삿갓 쓴 어부는 적막하게 돌아가는구나.

남전보원 선사에게 어떤 납자가 물었습니다.
“우두 법융스님이 4조 도신스님을 만나기 전에는 어째서 온갖 새가 꽃을 물어다 바쳤습니까?”
“걸음마다 부처님의 층계를 밟았기 때문이니라.”
“만난 뒤에는 어째서 꽃을 물어다 바치지 않았습니까?”
“설사 새가 오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남전의 실 한 오라기만큼의 공부에도 미치지 못하느니라.”
이것이 종문에 전해 오는 ‘우두미견사조시여하牛頭未見四祖時如何’
우두스님이 4조를 만나지 못했을 때는 어떠합니까”라는 우 백조牛頭百烏 공안입니다.

우두 법융스님은 유가경서와 역사서를 두루 배우고 나서 불교의 반야부 경전을 보고는 이렇게 탄식하였습니다.
“유가의 경전은 지극한 법이 아니요, 반야의 바른 관법이라야 세상을 벗어날 수 있는 배로다” 하고는 열아홉 살 때 모산茅山으로 출가하여 머리를 깎았습니다. 뒷날 우두산에 들어가서 유서사幽樓寺 북쪽에 있는 바위굴에 앉아서 공부를 하니 온갖 새들이 꽃을 물어다 주는 상서로운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이에 4조 도신 선사가 멀리서 보고 그 산에 기이한 사람이 있음을 알고는 몸소 찾아갔습니다.
그럼에도 우두스님은 뒤돌아보지도 않고 태연자약하게 앉아 있을 뿐이였습니다. 도신스님이 물었습니다.
“여기서 무엇을 하는가?”
“마음을 관觀합니다.”
“관觀하는 것은 누구의 마음이며, 그 마음은 또 어떤 물건인까?”
그러자 우두스님은 말이 막혀 대답을 하지 못하고는 이에 벌떡 일어나 절을 하고 제자의 예를 갖추고 가르침을 청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완전히 눈이 열리게 되면서 옥의 티 같은 번뇌가 몽땅 없어지고 모든 상相이 영원히 없어지니, 그때부터는 선신들이 공양을 가지고 오지도 않았고 새가 꽃을 물어다 주지도 않았습니다. 그제서야 서상瑞相마저 사라진 제대로 된 공부 경지를 만난 것입니다.

수보리존자도 제석천왕의 꽃비 공양을 받게 됩니다. 존자께서 바위굴에서 좌선을 하는데 제석천이 꽃비를 내리면서 찬탄하였습니다
이에 수보리가 물었습니다.
“꽃비를 내리고 찬탄하는 것이 누구인가?”
“나는 제석천입니다. 존자께서 반야를 잘 말씀하는 것을 보았으므로 와서 찬탄합니다.”
“나는 반야에 대해서 한 글자도 말하지 않았느니라.”
이에 제석이 말하였습니다.
“존자께서 말씀하신 것이 없고, 저 또한 들은 것이 없으니, 말한 것도 없고 들은 것도 없는 것이 바로 참으로 반야를 말씀하시는것입니다.”
이 정도로 공부를 한 제석이라면 꽃 공양을 올릴 만한 자격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부처님께 꽃을 바쳐러 온 바라문에게 이런 법문을 합니다.
한 바라문이 오동나무 꽃 두 송이를 들고 와서 부처님께 올리고자 하였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선인仙人아!”하고 불렀습니다.
이에 바라문이 “예!”하고 대답하니 세존께서 “버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왼손의 꽃 한 송이를 버렸습니다. 세존께서 또 부르시되 “선인아! 버려라”고 하니 오른손에 든 꽃 한 송이를 마저 버렸습니다.
세존께서 또다시 “선인아! 버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그 바라문은 의아해 하면서 물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지금 빈 손으로서 있거늘 다시 무엇을 버리라하시니까?”
이에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나는 너에게 꽃을 버리라고 한 것이 아니다. 처음에는 육근六根을 버리라고 하였고, 두 번째는 육진六塵을 버리라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육식六識까지 버리라고 했을 뿐이다. 이 모든 것을 일시에 버려서 버릴 것이 없는 곳이라야 그 때가 생사生死를 면하는 곳이니라.”
이에 그 바라문은 크게 깨쳤습니다.

유마거사와 그를 문병하러 온 부처님 십대 제자들과 문수보살의 설법에 크게 감동한 천녀天女가 문득 유마거사의 방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녀는 곧 대보살들과 대성문大聲聞들의 머리 위로 아름다운 꽃비를 내렸습니다. 그러자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보살들의 몸에 내린 꽃잎들은 금방 밑으로 떨어졌지만 대성문들의 몸에 내린 꽃잎들은 웬일인지 그대로 붙어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놀란 대성문들은 온갖 신통력을 동원해서 떨쳐 내려고 했지만 몸에서 도대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천녀가 사리불 존자에게 물었습니다.
“대덕이시여, 굳이 꽃잎을 떨쳐 내려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천녀여, 모름지기 출가수행자의 몸으로 꽃을 가까이 한다는 것은 법에 어긋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대덕이시여. 그런 말씀은 부디 삼가시기 바랍니다. 이 꽃은 조금도 법에 어긋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꽃은 정작 아무런 생각도 분별도 없기 때문입니다. 법에 어긋나는 것은 오히려 거듭 분별하고 생각을 굴려는 그대 자신입니다. 대덕이시여, 출가하여 훌륭한 법을 따르면서도 거듭 분별하고 생각을 굴리는 일이야말로 법에 맞지 않는 일입니다. 대덕께서는 법과 율에 대해 늘 머리를 짜내어 분별하고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진정 바른 일인 것입니다.
대덕이시여, 사려와 분별을 벗어났기 때문에 저 대보살들의 폼에는 정작 꽃잎 하나 붙어 있지 않는 모습을 잘 보십시오.”
그렇습니다. 천녀의 말에서 보듯이 두려운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그 틈을 노리고 온갖 나쁜 것들이 달려들게 마련입니다 마찬가지로 생사윤회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색, 성 , 향, 며, 촉, 법이라는 다섯 가지 욕망이 더욱 세차게 비집고 들어옵니다. 하지만 모든 법에 따르는 번뇌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다섯 가지 욕망이 아무리 강해도 그를 결코 위협하지 못활 것입니다.
애착 때문에 길들여진 습관을 끊어내지 못한 사람에게는 꽃잎이 달라붙지만 그로부터 훌쩍 떠난 사람에게는 꽃잎이 달라붙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에 마음을 비운 법집法執까지도 벗어난 보살들의 몸에는 꽃잎 하나 달라붙지 않은 것입니다.

없는 것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선가禪家에서는 ‘날목공화捏目空花’라고 합니다. 곧 눈을 억지로 부벼서 허공꽃을 만들어서 보는 것을 말합니다.
일체중생이 끝없는 예부터 갖가지로 뒤바뀐 것이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낯선 고장에 가서 동서남북을 분간하지 못하여 동쪽을 서쪽이라고 여기는 경우와 같아 , 사대四大를 잘못 알아 자기의 몸이라 하고 육진六塵의 그림자를 자기의 마음이라 하는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눈병이 났을 때 허공에서 꽃이 보이는 것과 같습니다. 허공에는 실재로 꽃이 없는데 눈병 난 사람이 허망한 집착때문에 허공의 성품을 잘못 알았을 뿐만 아니라 실재의 꽃이 나오는 자리까지도 모릅니다. 이런 까닭에 허망하게 생시에 헤매이기 때문에 이를 무명無明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 무명 역시 설제로 본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꿈을 꾸는 사람이 꿈 속에서는 사실인 줄 알고 있다가 꿈을 깬 뒤에는 아무 것도 없는 줄을 아는 것과 같습니다. 온갖 허공꽃이 허공에서 사라졌을 때, 사라진 곳이 없는 것과도 같습니다. 왜냐하면 난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귀종지상歸宗智常 선사에게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하고 물으니 “하나의 가리움이 눈에 있으면 허공꽃(空華)이 어지럽게 떨어지느니라”고 대답했던 것입니다.
‘우두미견사조시여하牛頭未見四祖時如何’라는 공안 곧 “우두 법융스님이 4조 도선스님을 만나기 전에는 어째서 백가지 새가 꽃을 물어다 바쳤습니까?”
“걸음마다 부처님의 층계를 밟았기 때문이니라.”
“만나 뒤에는 어째서 꽃을 물어다 바치지 않았습니까?”
“설사 새가 오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남전의 실 한 오라기만큼의 공부에도 미치지 못하느니라”에 대하여 운문스님은 “남전은 걸음마다 높이 오를 줄만 알았지, 허공에서 뛰어내릴 줄은 몰랐다”고 염站한 바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산승에게 물어 온다면 이렇게 대답해 줄 것입니다.
“어떤 것이 걸음마다 높이 오르는 것입니까?”
“향적세계香積世界니라.”
“어떤 것이 허공에서 뛰어내리는 것입니까?”
“구덩이를 메우고 골짜기를 막는 것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