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가을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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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문리 일기 - 현진
1992년 10월 128호
가을비가 산창에 내리고 있습니다. 대숲을 적시는 빗소리가 왠지 정겹게 느껴지는 건 아마도 가을 밤이라는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가을은 아무래도 다른 때보다 사유의 뜰이 넉넉해지고, 감정의 파장도 섬세하게 작용하는 탓이지요. 제 마음이 아주 순수해진 그런 느낌입니다. 고여 있는 물을 한바탕 휘젓고 나서 앙금이 남듯 헐떡이던 마음을 가라앉히고 보니 거짓 없는 마음이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사실 상대적인 미추선악美醜善惡에서 자유로워졌을 때 절대적인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가을밤에 듣는 빗소리
가을 빗소리는 시끄럽지 않아서 무엇보다 그 분위기가 살아나는 게 아닐는지요. 기왓골을 타고 흐르는 낙숫물 소리를 듣습니다. 내 감각들이 잠시 투명해지는 기분입니다. 눈은 아직도 좋은 것만 즐겨 보려 하고 귀는 지금껏 아름다운 소리에만 길들여져 왔습니다. 어찌보면 육근六根의 의식들이 여태껏 밖을 향해서만 신경을 곤두세우고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을은 이러한 감각들을 내부로 돌리는 그런 시기인 것 같습니다. 우리 삶에서 만나곤 하는 대립과 갈등은 모두 욕심에서 생긴다는 것은 많이 들어서 낯선 말은 아닐 것으로 여겨집니다. 가을 숲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받아서 채워지는 게 아니라 주어서 비워 내는 그런 작업을 계속해서 하는 것 같아서 제 자신이 부끄러워질 때가 많습니다. 우리 일상에서도 이러한 역동적인 원리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순수한 모순
빗소리에 괜히 마음이 약해지려고 하고 가슴까지 휑해지는 걸 보면 또 인간적인 내 여백이 커진 까닭인 것 같습니다. 이러한 감정의 남용이나 비약이 종종 내 수행 일과를 흔들리게 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쉽게 거두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때로는 이런 감정에 솔직할 줄 안다는 것도 어쩌면 젊은 수행자의 호기라는 생각으로 자위를 하곤 하지요. 수행자의 모습만을 고집하는 우리네 일상에서 인간적인 틈을 경계하고 있는 것은 수행자의 당당함이 자칫 세속적인 나약함으로 바뀌게 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지요. 아직도 비본질적인 인습에서 거듭거듭 깨어나지 못하는 내 어리석음 탓일 것입니다. 산중에 살다 보면 더러 이런 감정들이 구체적으로 다가올 때가 있지요. 이런 감정의 번뇌를 사혹思惑이라고 말하지요. 경전에서는 이와 같은 생각은 실제에 직면하여 어두워졌다 밝아졌다 하는 거짓 감정으로서 갈애에서 생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내 모습 때문에 스스로 심한 모순을 느끼게 되고, 수행의 얕음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지요. 역시 마음 공부는 수학 공식처럼 언제나 대입시켜서 풀 수 있는 그런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한번씩 거친 경험들도 또 다른 감정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어떤 때는 똑같은 어리석음을 되풀이하기도하지요. 우린 어차피 어떤 일을 반복함으로써 참다운 일에 눈뜨게 되는가 봅니다. 수행의 반복은 면역의 기능이 아닌 깨침의 과정이 되어야 함은 당연한 일이겠지요.
똑똑똑. 빗소리가 더 가까이 들리는 듯합니다. 한 수행자가 가지는 고독의 무게는 이런 날 더 심해지는 게 아닐까요. 오늘 아침 숲길을 걸으며 도반이 이렇게 말하더군요. 가을은 철저하게 고독해야 함을 한번 더 깨달아야 할 계절이라고. 철저하게 고독해진다는 건 상대적인 기준이 아니라 절대적인 기준이겠지요. 우린 모두 고독한 존재. 다만 어떤 대상이나 물질에 의해서 위로받고 있을 뿐이지요. 수행자는 절대적인 삶의 기준에 길들여지지 않으면 외로움의 늪에 갇히기 쉽지요. 대상이 있으면 더불어 기뻐함을 배우고, 혼자 남게 되면 그 홀가분한 기분을 내것으로 만들 수 있어야 가능하다는 뜻이지요. 그러나 가을이면 치르는 이런 홍역은 젊은 스님네가 만날 수 있는 마장摩障의 한 부분임은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가을엔 걸망 하나로 운수객雲水客이 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지지요. 중국의 원통법수선사圓通法秀禪師는 스님네를 세 가지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눈이 내리는 날 어떤 행위를 하느냐에 따라서 그 근기를 살핀 것이지요. 곧 가장 우수한 스님은 승당 안에서 좌선을 하고, 중간쯤 되는 스님은 붓을 들고 시를 지으며 가장 못난 승려는 화롯가에 둘러앉아 먹고 떠든다고 하였습니다. 오늘밤처럼 비오는 날, 원초적인 감정 앞에서 힘들어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보았다면 스님은 어떻게 꾸짖었을까 생각하니 얼굴이 화끈 달아오릅니다. 가을 찬비가 그치고 나면 산중의 날씨도 많이 쌀쌀해질 듯합니다. 내일은 긴 소매가 달린 두꺼운 옷을 꺼내 입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랫절로 나 있는 작은 숲길엔 벌써 단풍빛이 번지고 있습니다. 밤이 꽤 깊었습니다. 삼경을 알리는 종소리를 듣고도 오랜 시간을 뒤척뒤척 하였으니 말입니다. 다른 날보다 군불을 일찍 지피고 장작개비도 몇 개 더 넣었습니다. 이런 날 방까지 썰렁하면 더 잠을 이루지 못할 것 같아서지요. 출가 정신은 하루에 황금 만 냥을 쓰는 삶이라고 했는데 쓸데없는 망상으로 소중한 시간을 다 보내고 말았습니다. 가을이 깊어가는 소리가 빗줄기에 실려 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