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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장수 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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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동화 - 김영현 1992년 10월 128호
세상만물이란 게 처음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입니다. 물론 부처님 세계에서야 시작도 끝도 없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 범인들이 살고 있는 세상이야 어디 그렇습니까.
그런데 사람들 가운데는 세상의 끝부분에 대해서 유난히도 더 생각하고 걱정하는 사람이 있지요.
‘만일 종말이 온다면 어떻게 할까. 만일 하늘이 무너진다면. 만일 땅이 꺼진다면. 만일 커다란 혜성이 느닷없이 지구와 부딪친다면. 만일 지구가 온통 얼음에 뒤덮힌다면. 만일 창조주가 인간들 사는 꼴이 싫어서 한꺼번에 불구덩이에 던져 넣는다면.’
이런 걱정은 보기에 따라서 매우 어리석고 쓸모없는 걱정인 듯 보일지 모르지만 당사자에게는 이 세상 어떤 걱정거리보다도 더 심각하고 중요한 걱정거리일 것이 틀림없습니다.
빵장수 김씨도 그런 부류의 사람에 속했습니다. 그는 오십대의 성실하고 착한 사내였습니다. 빵을 굽는 솜씨도 뛰어나 아침이면 그의 빵집 앞에는 갓 구워 낸 먹음직스런 식빵을 사려고 동네 아줌마들이 줄을 서곤 했어요. 그런데다 이 나이까지 별 다툼없이 오손도손 함께 살아온 아내와 이제 마악 싱싱한 장미꽃처럼 피어나는 예쁜 두 딸도 있었습니다.
빵장수 김씨는 정말 이 세상에서 아무런 부러울 것이 없었고 따라서 특별한 걱정거리도 없었지만 오직 하나, 세상에 종말이 오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 때문에 혼자서 끙끙 앓고 있었습니다. 그건 정말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거든요.
그 걱정 때문에 그는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아름다운 풍경을 보아도 즐겁지가 않았습니다. 손님들이 빵을 다 사고 가면 그는 빵집 앞 햇볕 드는 계단에 앉아 이 세상의 끝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 또 생각했습니다.
그런 어느 날, 그 빵집에 허수룩한 차림의 사내가 하나 나타났습니다. 그는 가장 싼 빵을 하나 사서 엽차와 함께 먹고 난 다음 김씨를 보고 말했습니다.
“가만있자 주인장, 얼굴을 보니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는가 본데...” 김씨는 대꾸하기가 귀찮았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의 은밀한 고민을 몇 사람에게 이야기해 보지 않은 바 아니었지만 그때마다 사람들은 자기를 비웃거나 무시하기가 일쑤였거든요. 그러나 허름한 차림의 지나가는 사내에게 한 번쯤 더 이야기한다 해도 손해볼 거야 없지 않겠어요? 그래서 김씨는 퉁명스럽게 대답했습니다.
“그렇소. 난 지금 세상의 종말에 대해 생각하는 중이라오.”
그러자 뜻밖에도 사내도 반가운 낯으로 대꾸하는 게 아니겠어요.
“아, 정말 잘 만났소. 나는 바로 당신 같은 사람을 찾고 있었다오.”
“예? 나 같은 사람을?”
김씨도 깜짝 놀랐어요. 자신의 고민을 이해해 줄 뿐더러 이야기가 통하는 상대를 만난 듯한 느낌에 바짝 긴장되었습니다. 가슴이 흥분으로 조금 뛰었습니다.
“그렇소. 바로 당신 같은 사람이요. 종말을 생각하는 인간이야말로 내가 찾아다니는 바로 그 인간이라오. 세상 사람들은 모두 부질없는 것에 정신이 팔려 있어요. 오줌 누고, 똥 싸고, 시집 장가 가고, 장사 지내고, 술 마시고 떠들고... 그러나 종말이 오면 그 따위 일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소?”
“그렇구 말구요.”
김씨는 신나서 맞장구를 쳤습니다.
사내는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습니다. 아주 낡았지만 품위있게 생긴 책이었어요. 그런 다음 사내는 나즈막하고 비밀스럽게 말하는 것이었어요.
“이 책에는 인간의 미래에 대한 모든 것이 다 기록되었지요. 세상의 종말과 그 이후에 대해서까지두요.”
김씨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사내 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이 책에 따르면 종말이 오기 전에 종말을 믿고 준비하는 사람들은 전부 하늘로 들어올려져 안전한 곳으로 가게 됩니다. 남은 자들은 엄청난 고난 끝에 모두 죽고 말지요.”
아아, 얼마나 무서운 이야깁니까. 김씨의 눈은 두려움으로 가득 찼습니다. 사내는 소문으로만 전해들었던 바로 ‘들어올림교’의 사도였던 것이었어요.
“착한 사람도 다 죽습니까?”
김씨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어 보았습니다.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세상의 종말인데. 중요한 것은 종말을 믿고 예비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딴은 그렇겠다는 생각이 들어 김씨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거렸습니다.
김씨는 그 자리에서 ‘들어올림교’에 가입했습니다. 주저하고 망설이고 할 일이 아니었거든요.
그날 밤, 김씨는 아내에게 낮에 만난 사내 이야기를 해주며 부디 당신도 ‘들어올림교’에 가입하라고 설득했습니다. 김씨의 아내는 착한 사람이긴 했지만 그런 허황한 이야기 따위에는 관심 없는 사람이었어요.
“여보, 제발 당신도 정신좀 차리구려. 아, 멀쩡한 세상이 갑자기 없어질 턱이 있나요.”
오히려 그런 핀잔만 들었을 뿐입니다. 몇 차례나 간곡하게 설득해도 되지 않자 김씨는 마침내 가족들을 데리고 올라가는 것은 포기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착한 아내와 장미꽃 같은 두 딸을 두고 혼자 올라가는 게 좀 안 되긴 했지만 믿음이 없으니 자기도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었어요.
마침내 그 날이 내일로 다가왔습니다. 김씨는 마치 긴 여행을 떠나는 사람처럼 물건과 일을 정리했습니다. 여행과 다른 점은 이제 다시는 영영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김씨는 아내를 불러 말했습니다.
“여보, 내일이면 나와는 이제 영영 이별이라오. 건너 동네 귀돌이네 빵 외상값 받는 것 잊지 마시오. 그리고 내가 차고 있는 이 시계는 내 친구 문갑이한테 주시오. 내가 올라가게 되면 시계는 꼭 자기에게 주고 가라고 했으니까. 애들 시집 문제는 이제 당신이 다 알아서 하구려. 내가 신던 이 구두는 아직 말짱하니까 동네 사람들한테 인심이나 쓰시오.”
남길 말이 많은 것 같았는데 떠오르는 생각은 모두 이런 사소한 일들 뿐이었습니다. 아무튼 이런 뒤처리를 아내에게 부탁한 김씨는 이제 세상의 종말만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다음날,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 시간이 마침내 오고야 말았습니다. 김씨는 다른 ‘들어올림교’ 신자들과 함께 하늘로 붕, 들어올려졌습니다. 그들은 마치 우주를 향해 떠나는 로켓트처럼 위로위로 날아 올라갔습니다.
얼마나 올라갔을까. 천지가 환해지면서 어디선가 우랑우랑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게 아니겠어요?
“자알 왔다. 너희들은 종말을 믿고 따랐으니 이제 여기서 편히 쉬어라.”
그제서야 김씨는 정신을 차리고 사방을 둘러보았습니다. 거기에는 여기저기 김씨처럼 들어올려진 사람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 있었습니다. 김씨가 알고 있는 사람도 더러 눈에 띄었는데 돈놀이 하던 천씨, 여당 국회의원하던 장씨, 남한테 몹쓸 말 잘하던 최씨도 그 안에 끼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얼굴이 부딪치자 장난치다 들킨 아이들처럼 약간 겸연쩍어하는 표정이었어요. 착한 일들하곤 좀 거리가 먼 그들은 마지막 결정적인 순간에 선택을 잘하여 들어올려진 사람들이 틀림없었습니다.
“자, 이제 보아라. 종말을 믿지 않은 자들이 얼마나 무서운 꼴을 당하는지.”
그때 또 다시 우랑우랑한 목소리가 울려 왔습니다. 그러자 하늘이 열리고 지상의 모습들이 마치 거울 속처럼 환하게 드러났습니다. 아내와 딸의 모습도 보이고 동네 사람의 모습도 보였습니다. 그들은 김씨의 들어올려짐에 모두 놀라고 두려워하는 눈치였습니다.
김씨는 그들을 향해 무어라 고함을 질러보았지만 아무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드디어 준비되었던 종말이 시작되었습니다. 먼저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어두운 하늘에서는 번개가 치고 으르렁거리는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지상에 있는 사람들은 비를 피하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습니다.
“이런, 지난번 장마 때 제대로 손을 봐 두지 않던 축대가 하마터면 무너지겠는걸. 아내더러 미리 일러두었어야 했는데...”
엄청나게 쏟아져 내리는 폭우를 보며 김씨는 혼자 걱정스럽게 중얼거렸습니다. 그러나 이제 와서 걱정해 보았자 소용없는 일이었습니다.
비는 사흘밤 사흘낮을 꼬박 내렸습니다. 세상의 반이 물에 잠겨 버렸습니다. 들어올려진 사람들은 모두 자기가 그런 엄청난 고난을 면하게 된 것에 안도하고 있었지만 김씨는 아내와 딸 걱정에 한시도 편안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비가 그치고 내려다보니 그런 와중에 다행하게도 그의 집은 무사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불비가 기다리고 있엇습니다. 하늘에서 화산의 불꽃 같은 뜨거운 불비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던 것이지요. 곳곳에 건물이 불타 오르고 집 근처의 오리나무숲도 연기에 휩싸였습니다.
김씨네 빵가게 에서도 연기가 나기 시작했어요. 아내와 두 딸이 겁에 가득 질린 얼굴로 뛰어나왔습니다. 큰 딸애의 예쁜 치마에도 불이 붙었습니다.
“그만 두세요! 제발 그만 두라니까요!”
마침내 김씨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고함을 질렀습니다. 그의 두 눈에는 참을 수 없는 연민으로 눈물이 가득 고였습니다. 그러자 그가 서 있던 자리가 푹 꺼지면서 김씨는 아래로 아래로, 끝없이 떨어져 버리고 말았어요.
다시 불비 내리는 세상으로 돌아온 김씨는 평화로운 얼굴로 누가 종말에 대해 말하면 이렇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사랑이 없는 천국보다 난 사랑이 있는 지상을 택하겠소. 난 종말 따윈 두렵지 않소. 정말 두려운 것은 사랑이 없다는 일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