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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운 육백 주년의 역사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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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고은 1998년 02월 192호
가야산 해인사에 가자.
추사는 고려대장경 글씨를 인간의 글씨가 아니라고 극찬했다.
가야산 환적대 위 짙푸른 하늘 아래 그런 초인간적인 글씨 한 자 한 자로 아로새겨진 경판이 어제인 듯 싱그럽게 살고 있다.
대장경은 신인神人이다. 신인으로 잠들고 신인으로 깨어나기를 이곳에서 어언 육백 년이다.
나는 지난 날 1950년대 말 해인사시절에 첫 시집을 냈다. 그 무렵의 아늑한 퇴설당에는 선방 수좌 일곱쯤이 겨우 앉아 있었고 강원에는 학인 서른 명이 치문부터 전등 염송까지 각각 배우는 중이었다.
밥 한술에 된장과 소금김치면 날마다 큰복이었다. 가난한 살림이었다. 그 가난이 이미 공부 아니던가. 대적광전 등뒤로 가파르게 올라가면 거기의 장경각은 늘 적요했다. 새소리 같은 놀이를 삼가해야 할 노릇이었다.
나는 그곳에 들어가 한참씩 지낼 수 있었다.
장경각 안의 오래된 침묵 가운데에서 잠들어있던 경판들은 이따금 절로 깨어나 정교하게 드나드는 공기로 숨을 내쉬는 소리가 역력한 듯 그런 고요를 나도 덩달아 누릴 수 있었다. 누구한테 함부로 자랑할 그런 행복이 아니었다.
이 장경각의 팔만대장경이 있어 그 경, 율, 논 삼장이 한데 어우러진 법으로 하여금 해인사를 법보종찰로 부르는 것인가. 그러면 선, 교의 쌍전 공부없이도 공으로 법보가 된다하겠는가
아무튼 그 법보가 멀리 서해안 강화도에서 이운된 지 육백 년 세월이 바쁜 구름 속의 달인 양 흘러갔다. 오늘은 그런 시간의 덧없음과 그 덧없는 삶을 알알이 붉은 열매로 익으며 살아간 역사의 자식일 터.
기적은 기적이 아니라, 역경 가운데서 태어난 필연의 다른 이름이다.
고려대장경은 그것이 도저히 출현할 수 없는 국가의 위난이 낳은 것이다. 백 번이나 불가능이었다. 그 불가능이 가능으로 된 것이다.
한 사람이라도 병정으로 데려가야 한다. 한 푼이라도 칼과 화살을 만드는 데 바쳐야 한다. 그런데도 전혀 딴판으로 경전을 새기는 어마어마한 사업, 황당무개의 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그 초토와 폐허밖에 남기지 않는 몽골의 무자비한 침략에도 불구하고, 들의 곡식까지 태워 버리는 살인 방화에도 불구하고 싸움터의 밀리는 북소리를 들으면서 한 자 한 자 글씨를 새겨 갔다.
승통 수기스님은 무서운 보살이었다. 왜 그의 앞에 있는 원효 의상이나 균여의 화엄종을 잇는 종장이면서도 그 자신의 행적이 거의 인멸되다시피한 것일까. 의천이 균여를 싫어했던 것처럼 조선 주자학이 고려 불교를 배척하는 과정에서 대장경의 주체를 고의로 지워 버린 것은 아닐까. 더구나 화엄학은 남송 주자학의 모체였다.
‘고려사’는 고려 조사 정권 기간의 커다란 인물인 수기에 관한 기록을 깡그리 무시해 버렸다. 그렇다고는 하나 보조스님은 우뚝 솟고 수기스님은 파묻혀 버린 까닭을 그저 밖에서만 찾을 것인가 오직 고려 문신 최자의 사사로운 책에 수기스님을 한 두마디로 적어 놓은 것 만이 남아 있다. 그런 스님과 함께 남은 승속 대중이 국난의 십육 년 동안이라는 가혹한 세월에 걸쳐 완성한 팔만일천이백쉰여넓 장의 현존 경판은 이 나라 산야가 함께 이룬 최고의 문물이다.
후박나무, 자작나무, 산벚니무의 목판에 새긴 눈물과 땀과 피의 법보인 대장경 경판이었다. 처음부터 경판은 불안했다. 강화도 서문 밖 대장경 판당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선원사로 옮겨가야 했다. 전세가 날로 불리했다. 그러다가 배에 실려서 서울 지천사로 옮겼다. 그것으로도 불안했다. 또다시 병화에 잿더미가 되어서는 안 되었다. 경판의 이삿짐은 마소가 끄는 수레, 나귀등짐 그리고 사람들이 동원되어 남으로 남으로 험한 길을 나서야했다. 가야산이 어디인가 첩첩산중이 아니던가. 허위단심이었다. 대장경판의 문화적, 종교적 위용은 당시로서는 흩어진 백성의 마음을 여기저기서 하나로 모으는 힘을 낳았다. 또한 곤핍한 백성들을 그 정신으로서 위로했다. 분명코 그것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구심점이었던 것이다.
저 바닷물에 목재를 잊어버린 듯이 담가 두었다가 꺼내어 그것을 그늘에서 조심스레 말린 뒤 그 가운데서 엄히 고르고 골라 다듬어 원판을 만들었다. 거기에 갖은 칠을 입힌 다음 그대로 바람을 실컷 쏘여 그 인위의 정성까지 자연으로 되돌렸다.
그 다음으로 도가의 어김없는 일정에 따라 한 자 한 자 양각하는 각고의 나날이 이어졌다. 어느 한 사람이 아니고 수많은 사람이 나라와 세상 떠난 부모를 위하여 새겼고 불행한 중생을 위해 새겨 나갔다. 수많은 사람이라 하지만 오로지 한사람의 체로 일관한 글씨나 그 글씨의 새김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어야 했다. 과연 사람의 능력을 넘어서 있었다.
그런 경판이었다. 그것을 강화도에서 가야산까지 아무런 탈 없이 이운할 수 있었던 그 장엄한 역정에도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다짜고짜 실어서 옮기는 짐짝이 아니므로 온갖 정성을 다한 경건한 의례의 행렬을 통해서 그 자체가 하나의 법요였고 구도의 순례 길이었다. 국난 가운데 국민의 신심을 하나로 만들었으니 그 하나의 마음이 고려 전체의 마음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경판 이운의 정신이야말로 그 경전을 다 익히는 지혜의 발현이었다. 오늘날에도 경판을 머리에 이고 도는 정대불사 그대로 고려사람들은 마음속에 경판의 글씨를 담고 모든 고초를이겨내게 된 것이다. 그 이운의 행렬에 동참함으로 너와 내가 동시에 부처를 이루는 확신에 빛났다. 저 상고시대 이래 한반도에서는 어떤 가치가 보존되거나 계승되는 축복과는 지주 동떨어져 그것이 소실되기 십상이었다. 어떤 문화가 고이 지켜지기 어려웠다. 그런데도 아주 드물게 고려대장경이 그 예외가 된 것 자체가 하나의 역사적 영험이 아닐 수 없다. 가야산 해인사와 대장경판은 이제 둘이 아니다. 대장경은 그것이 머물러있을 곳을 해인사에서 얻었고 해인사는 대장경을 섬기는 것으로 그의 역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 물소리와 바람소리가 있고 학인들의 글 읽는 소리와 그런 소리 저쪽에 죽비소리가 있다.
산세 자체가 무골의 기상인 가야산이란 도무지 방정맞은 것은 용납이 되지 않는다. 오로지 천 년의 묵중한 경판 한장이 제대로 숨을 들어 쉬는 경지만이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의 묵언과 함께 가야산의 그것이다. 세계 문화유산의 반열에서 어찌 대장경판의 이름이 행여 뒤질 것인가. 그것은 이미 고려의 법보인 것과 한가지로세계의 법보인 것이다. 지난 이운 육백 년과 앞으로의 육백년은 동서양의 진리를 여기서 시작하도록 떨쳐 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