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테드가 올 여름의 마지막 열기를 식히고 지나간 자리에 성큼 가을의 냉기가 차지하고 있다. 맑개 개인 서울의 하늘이 이처럼 고울 때도 있나 싶어 정릉 가는 차안에서 자주 창밖을 내다보았다. 가을이 주는 처연한 감정인지 시인 스님을 만나러 가는 기대 때문인지 문득 서산스님의 싯구 한 소절이 비수처럼 떠오른다. 이제는 지나 버린 일이긴 하지만 서울 어느 곳보다 공기 맑고 물 좋기로 소문난 정릉, 오늘은 하늘 가득히 바다가 잠겼다. 북악터널을 들어가기 전 샛길을 따라 내려가면 치렁한 아카시아숲에 인접한 단아한 이층 양옥 청암사에 이른다. 서산스님의 고요함 속에 떨어지는 번뇌 대신 유난히 많은 절들의 이정표에 잠시 헤매이다가 스님을 뵈었다.
청화 스님. 지금도 넘치는 인파 속에서 가끔 재빛 옷자락의 스님네를 만날 수 있는 거리가 인사동이다. 그 거리에서 팔십년 초엽엔 유난히 눈에 띄는 검은 승복에 훤출한 키의 스님을 자주 만날 수 있었다. 또 당시에 제법 활발하게 꾸려지던 스님들의 시낭송회에서 투명하고 청아한 시를 읽어 주시고 표표히 사라지던 스님이다. 그 스님을 영그는 고추처럼 말간 가을 햇살이 넘치는 청암사에서 마주했다. 번듯하고 날카로운 콧마루, 잔잔한 미소의 얼굴, 조용한 움직임의 삶이 시처럼 느껴지는 스님이다. 그렇게 살아오신 스님을 우리는 흔히 재야승려, 승려시인, 그러면서도 낮은 목소리의 자상한 분으로 알고 있다.
“출가 승려의 분상에서 보면 승가에 누가 될 만큼 허물이 많습니다. 신도 교화에 심혈을 기울여 대법회를 주관해 보지도 못했고, 저자거리에 나가 힘겨운 생활에 고통받는 이들의 손을 잡아주지도 못했습니다. 팔만교해를 회통하는 교학도, 부처님 심법을 요달하는 참선도 지극히 해 보지 못한 셈이지요. 적극적으로 밀고 나가지 못하는 성격 탓이라 생각합니다.”
솔직 담백한 스님 말씀이 오히려 다른 어떤 것보다 귀중하지 싶다. 문학이 사상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수단이라는 데 동의한다면, 구도의 열정으로 써 온 시에 불교적인 사상의 정수를 담아 온 스님의 대중 교화는 또다른 영역에서 타당성과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분별지를 부정하는 선 수행 중심인 한국 불교의 전통에서 보면 스님네에게 재야니 시인이니 하는 말들은 힘들고 무거운 단어이다. 아니 사소한 개성이나 특기도 신심이 옅다는 비난을 받기가 일쑤인 풍토가 아니던가. 그러나 시란 일상적인 언어의 리듬을 축약된 언어로 조직한 것이고 우리네 정서의 표현 양식에 가장 훌륭한 한 형태라면 이런 태도도 문제가 아니겠는가 싶다. 고준한 선 수행의 정상에서 잡다한 세속의 정리가 탈색된 말씀만을 얘기했지 싶은 서산스님의 싯구도 찬찬히 보면 너무나 심정적인 일상의 감상을 표현하고 있어서 우리를 놀라게 하지 않는가.
“경직되기 쉬운 수행 생활을 좀 더 유연하게 하기 위한 매개체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나의 시작詩作은 구도의 알갱이로서의 의미도 중요하지만 이러한 유연한 정서의 확장으로 시를 택한 것입니다.”
고단한 수행의 길을 가려면 긴장되고 헝클어진 마음을 여과시킬 정서적 매체가 필요하다는 지론이다.
“풀 한 포기 없는 바위 덩어리는 바위다운 모습은 물씬 날지라도 생명감이 없습니다. 그러나 바위 모서리에 한 포기 풀이라도 있다면, 침묵하는 바위에 생명감까지 곁들여져 아마도 바위의 마음까지 읽을 수 있을 겁니다.”
이렇듯 수행은 부드러움과 굳음의 병행, 백척간두에 서서도 여유를 갖는 담대함을 함께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바위와 같은 굳은 정신과 풀과 더불어 있는 마음이 곧 수행인의 모습이란 말씀이다.
시와 구도를 교화 매체로 삼은 청화스님. 지금은 수행의 한 방편으로 문학의 길을 가고 있지만, 오히려 지난 시절의 절절했던 문학에의 편력이 수행의 길로 가게 했는지도 모른다고 한다. 스님의 문학에 대한 특별한 정서는 굳이 말한다면 ‘남다른 업’ 이라고 해도 좋을 듯 싶게 생의 전반에 점철되어 있다. 일기라도 쓰지 않으면 잠을 이룰 수 없던 십대에 이미 문학에의 허기로 동서고금의 책들을 두루 섭렵했다. 그 고독한 독서의 유영에서 문득 이광수의 ‘산사의 일기’를 읽은 것을 계기로 산문에의 길에 발을 들여 놓게 된다. 처음엔 조계사로 출가하였지만 나중엔 진관사의 김해룡스님을 은사로 삭발하고 의발을 수지하였다. 이때의 나이가 열여섯 살이었으니 동진출가인 셈이다.
“동진출가한 산사의 생활은 내가 그리던 삶이라 잠들은 정서를 흔들어 낮엔 대중 생활에 지쳐도 밤이면 산신각 등에 담요를 치고 밤 새워 글을 썼지요.”
끊임없이 타올랐던 문학에의 열정을 추억의 그림자처럼 떠올리는 스님 말씀에 우리 젊음이 열병처럼 앓아 오는 동질성을 느끼게 한다. 발표를 목적으로 하지도, 사상을 담으려고 한 것도 아닌데, 구도의 열정처럼 문학에의 사로잡힘으로 소화불량, 불면증, 황달... 등등 여러 가지 질병을 얻게 된다. 이러한 좌절과 번민을 겪으면서 스님은 결국 천안 가운사의 신법민스님을 은사로 재출가 하였다.
공기가 좋다는 이유 하나로 무허가 건물을 인수하여 청암사란 현판을 건 지 이십여 년. 두 번이나 강산이 변한다는 세월을 이곳에서 살아왔으니 이제는 남들이 이름하지 않아도 정릉의 토박이가 된 것이다. 몇 개의 고찰과 작은 암자가 널려 있는 이곳에 조금 오래 살았지 싶은 사람에게 누구나 길을 가다 물으면 조그마한 청암사를 친절하게 가르쳐 준다. 별반 변화없이 살아온 이곳에 요즈음 커다란 소용돌이가 일고 있다. 터널이 하나인 북악터널의 교통 혼잡을 덜기 위해 굴 하나를 더 뚫는 공사가 벌어지고 있다. 이 공사가 수십 년을 이곳에 터잡고 살아온 사람들의 삶을 송두리째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교통의 혼잡을 덜기 위한 불가피한 공사인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정부의 시책이 조금만 사려있고 주민의 고충을 배려한다면 이렇게 막무가내로 공사를 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공사비가 좀더 들더라도 주택가를 피해서 길을 낼 수도 있는데 아무런 보호 장치도 없이 이곳 동네를 관통하는 길을 내고 있습니다.”
이 공사의 변경을 요구하는 청원 작업을 하면서 스님은 관념의 삶이 아닌 구체적 실상의 우리 문명에 대한 깨달음을 가질 수 있었단다. 작지만 이웃끼리 느끼는 공동체의 문제에서 거대한 폭력과도 같은 현대 문명의 무한궤도에 대한 심각한 성찰까지.
시와 구도가 우리의 삶을 언어화하고 승화시키는 것이기에 이 두 길을 하나로 가는 스님에게 현실의 부조리와 부패는 당연한 부정의 대상일 수밖에 없지 싶다. 군사 독재의 암울한 그림자가 뭇사람의 목을 죄고 있던 시절. 스님 발길은 자연 현실의 고통 넘치는 거리로 향했다. 질곡에 찬 역사와 분단된 민족의 현실에 맞서 젊은 피를 민주와 통일의 재단에 뿌리는 함성을 더 이상 초월의 의지로 포장한 승가의 현장에 남아 있지를 못하게 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함께 아파하는 스님들을 모아 ‘정토구현 전국 승가회’를 조직하고 부정하고 부패한 군사독재의 종식에 헌신하여 왔다.
“현실 승가의 한 사람으로서 역사의 바른 외침에 둔감한 우리 교단의 모습에 적잖이 실망도 했고 무엇보다 민중이 함께 하는 역사의 현장에 스님네가 신뢰받는 한 집단이어야 하지 않나 하는 바람이 컸지요. 이러한 각성을 통해 저의 시 또한 시의 본령이라고 할 수 있는 서정성에서 저항하고 투쟁하는 참여시로 변모했어요. 이러한 과정에서 몰이해와 비판도 많았지만 이제는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스님의 본분이라지만 세간과 출세간이 본질에서야 하나일진대 돌아온 자리가 저 먼 곳은 아닐지 싶다. 투쟁을 통해 이루어간다는 이론은 부처님 가르침에 어긋나는 점도 없지 않지만 후회하지는 않으신다. 격동기를 헤쳐 온 사문의 하나일 뿐 운동가적 이론을 가진 것도 남다른 사상이 있어서도 아니란다.
“나보다 더 정열적이고 헌신적인 사람이 많아서 나 같은 사람은 절집이나 지켜야 하는데...”
그러나 시대가 필요로 하면 언제든지 다시 나설 수밖에 없음을 독백처럼 덧붙인다. 사문의 길이 어둡고 괴로운 곳에 친근한 동반자여야 하는 것처럼. 어디 그뿐이겠는가. 속수무책인 불가의 고질병은 새로운 도로가 필요함을 우리는 모두가 알고 있다.
“투철한 의식을 갖고 수행하는 풍토의 조성에 게으를 수 없습니다. 사문으로서 갖추어야 할 소양이나 사상, 세계관을 바르게 세울 교육 기관이 부실하여 인연 따라 일반 학교니 강원이니 다니지만 체계적이고 일관적이지 못해 산만할 뿐입니다. 불교적 시각이 결여되고 스님이 가져야 할 의식도 부족하고 사회를 바라보는 감각도 낙후되었지요. 종단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교육 제도가 정비되지 않고는 희망이 없습니다.”
도제 양성이라면 자신을 던져 일조해 보겠는데, 그런 계기가 만들어질지 의문이라는 스님. 이런 일이 하루 이틀의 준비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듯이, 관심의 무중력 상태에 대한 염려를 한시도 놓지 않는다. 그러기에 스님은 스님 방식대로 자료도 열람하고 자세도 가다듬으면서 틈틈히 전문 서적도 읽는다.
“종단 개혁의 중요한 고리는 수행승과 교화승의 분리가 아닌가 해요. 이것이 혼재되어 있어서 체계와 위계 질서가 무너지지 않나 싶어요. 인재 활용의 측면에서도 특수한 분야에서 가정을 갖는 제도도 고려해야 한다고 봅니다.”
스님의 상좌는 두 분이란다. 가능하면 앞으로 종단 일에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 커 가기를 기대하며 의식 있는 승려가 되기를 바라지만 억지로 되는 일이 아닌 듯 싶다며 너털 웃음을 짓는다.
시인 청화스님은 7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그 동안 시 작업이 다작은 아니지만 십오 년 여를 지나 꽤 많은 양의 시가 있지만 아직 흔한 시집 하나 엮지 않았다.
“재고하여 작품에 완전성을 기하려다 아직 시집을 못 냈습니다. 문인으로 손색이 없는 작품을 남겨야 하지 않겠나 싶어 미루다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돌아보면 미흡한 것 투성이구요.”
여러 출판사에서 시도를 해 오지만 번번이 실패다. 이 생에 어쩌면 그 숱한 아픔들이 고스란히 묻혀 버릴지도 모른다. 문학성이나 예술성을 떠나 구도인이 가지는 언어의 정수, 차라리 그것은 언어의 사리들일지니 그 빛남 하나로 넉넉한 우리의 양식이지 싶다. 이젠 외부의 원고 청탁은 가능하면 사절이다. 예민한 스님의 성품은 언제나 건강이 적신호를 보내온다. 하루의 시간 시간을 할애해서 잠을 관찰하고 호흡을 조절하며 수식관에 가까운 명상의 시간을 가져 육신의 힘듬을 조절해야 한다. 북악터널을 오르내리는 자동차 소음이 끊이지 않지만, 요사 옆 조그만 텃밭에 채소가 자라고, 앞산 가득한 가을의 향기가 청암사 뜰에까지 널려 있다. 스님이 늘 그러하듯 마당 구석 풀포기들 갈래갈래 팔 벌리고 마음의 자리 열어 놓고 있다.
“난 모양 없는 그릇이니 아무나 담기시오. 난 색깔 없는 그릇이니 담는 즉시 당신의 색 돌려 주겠소”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