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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 거사 이규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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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장경과 사람들 - 이윤수 1998년 02월 192호
백운선생의 묘소는강화땅 최고의 명당이라 했다. 그래서인지 칼끝 같은 날센 바람이 불었지만, 길상면 문수산을 뒤로한 양지바른 묘소 부근은 바람 한점 없이 안온했다.
두번 있던 유배 생활을 빼면 마혼 넘어 이루어진 선생의 정치 길은 선생의 묘소로 향하는 길 마냥 순탄 대로였다. 오늘날 국무총리서리 격에 해당하는 ‘상국’이란 최고의 관직에 올랐던 정치인, 「동명왕편」이란 대 서사시를 지은 시인, 한평생 칠, 팔천여 편의 주옥같은 시를 지어, 이규보 만한 천재는 만년에 한번 나온다는 동료들의 찬사를 받던 대 문장가.
그러나 내겐 ‘대장경 각판 군신 기고문’을 지어 올린 한사람 신하로 백성으로서의 존재 의미가 더 크다. 세계 인류의 문화유산인 고려대장경을 만들기 전에 임금과 신하가 한마음으로 국난극복의 염을 담아 부처님 전에 그뜻을 고했던 것이 바로 대장경 ‘각판 군신 기고문’이기 때문이다. 몽고군을 피해 쫓기듯 옮겨 온 고려의 수도, 그 곳 강화에서 수기스님의 진두지휘 아래 대장경 조성이 시작되던 때 선생의 나이는 예순아홉이었다.
양지 바른 묘소 한 귀퉁이에 앉아「동국 이상국집」제 25권에 실린 선생의 기고문을 음미해 본다.

대장경을 판각할 때 군신의 기고문-정유년에 행했다.
국왕은 태자, 공, 후 재상들, 문무백관 등과 더불어 목욕재계하고 끝없는 허공계 시방의 한량없는 불보살과 삼십삼천의 호법 영관에게 비옵니다.

군신 기고문이 낭독되는 지리엔 왕과 태자, 문무백관등 모일 수 있는 이들이 두루 함께 자리했다. 기록에는 없지만 수많은 필생과 각수들도 함께 그 법요식에 동참했을 일이다.
그곳이 대장도감이었는지 고종이 자주 찾던 강화의 한 절이었는지 알 길 없지만 적어도 부처님 전에서 고해진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나라의 전란을 부처님께 의지해 대장경을 조성하려 했던 그 간절한 신심으로 문무백관 모두 목욕재계하고 이 의식을 봉행했던 것이다.
군신이 하나 되어 부처님과 여러 보살들, 제석천과 삼십삼천 앞에 목욕재계 올리고 한마음으로 간절히 발원하는 의식은 과연 얼마나 장엄한 것이었을까? 그 애타는 마음은 또한 얼마나 절절한 것이었을까?
이규보 선생의 명문장은 임금과 신하가 함께 모든 불보살과 호법 신들에게 간절히 비는 것으로 시작된다. 나라의 혼란 속에서 군신이 하나되어 이룬 자리 . 이 땅의 결집은 늘 이런 위기 속에서 시작됐고 그 위기를 타개하는 자리가 되곤 하지 않았던가 대결집의 순간이다.

몽고군의 환란은 몹시 가혹합니다. 그 잔인하고 흉포한 성품은 이미 말로 다할 수 없고 어리석옴이 또한 짐승보다 심하니 어찌 천하에서 가장 소중한 불법이 있는 줄을 알겠습니까? 때문에 그들의 더러운 발자국 지니는 곳마다 불상과 경전을 마구 불태워졌습니다. 부인사에 모셔둔 대장경 판본도 마침내 하루아침에 재가 되어 버렸으니 나라의 큰 보배가 상설되었습니다. 모든 불보살과 여러 천왕의 대자대비하신 마음인들, 어떻게 참을 수 있겠나이까.

일혼 가까운 나이의 선생이 격한 분노에 차 몽고군의 야만성을 폭로하고 있다. 몽고군이 고려 땅을 짓밟기 시작한 것은 1232년의 일이다. 그들은 부인사에 봉안된 초조 대장경을 불태웠으며, 황룡사 구층탑 마저 잿더미로 만들었다. 이 땅의 백성들을 유린하는 갖은 만행이 이루어졌고, 오랜 전란으로 백성들의 삶은 사경 직전이었다.
연이은 내란, 도탄에 빠진 민중․만신창이가 된 고려의 비운은 마치 태어나자마자 석달을 꼬박 문둥병을 앓은 선생의 몸과 흡사했다.

생각컨대 저희들의 지혜가 어둡고 식견이 얕아서 일찍이 오랑캐를 방비할 계책을 마련 못하고 능히 불법의 큰 보배를 보호할 능력마저 없었기 때문에 이런 큰 보배가 상실되는 변고를 보게 됐으니 실은 저희가 잘못한 소치입니다.

고귀한 성보를 끝내 지켜내지 못했음을 참회하는 선생. 어떤 이는 선생의 한평생을 두고 성공한, 시대의 행운아였다고 한다. 그러나 겨레가 환란을 당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정치인이며 감성 짙은 시인이 느끼는 시대의 고통은 과연 그러했을까?
하염없이 두손 놓고 몽고군의 말발굽 아래 놓인 산하를 바라보는 선생의 절망은 얼마나 깊고 큰 것이었으랴. 권세를 위해 영합하는 문인이었다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차 생산지 주민을 괴롭히는 지방군수를 향해 선생은 서슬퍼런 일갈을 하기도 했다.
‘백성은 앙상한 뼈 가죽으로 남았는데 몸 속에 살이 얼마나 된다고 남김없이 긁어내려 하는가. 묻노니 그대는 얼마나 입이 많아서 백성의 살을 겁탈해 먹는 것인가? 물론 선생이 명예에 대한 욕망을 지녔을 수도 있다. 그러나 「동국이상국집」에 실린 한 구절은 그가 탐심을 지우며 얼마나 부처님 가르침에 충실하게 살아가려 했는지 보여 준다.
“누군가가 내가 무서워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이렇게 답했다. ‘난들 어찌 무서워 하는 것이 없겠습니까? 두려워하는 것은 다른 데에 있지 않고 내 몸 안에 있습니다.’”
또한 한마디의 말, 한마디의 침묵에 영욕이 달려 있어 진실로 입만 삼가면 행세에 어떤 어려움이 있겠느냐고도 했다. 무신정권 최씨 일가에게 얻었던 벼슬자리, 그 갈등 속에서 선생은 더 부처님 가르침에 의지했는지도 모르겠다. 걸림 없이 떠다니는 흰구름(白雲)이란 선생의 자호가 이를 분명하게 드러내 주고 있다.
그러나 후회한들 소용이 있겠습니까? 부처님 말씀하신 가르침은 본래 이루어지고 무너지게 되는 것이 아니옵고, 경전이란 진리가 담긴 그릇이오니 망가지면 다시 고쳐 만드는 일 또한 꼭 해야 할 것입니다. 하물며 나라가 불법을 존중해 받드는 처지이므로 진실로 우물우물 넘길 수는 없는 일이며 이런 큰 보배가 없어졌는데 어찌 감히 그 불사佛事가 거대할 것을 염려하여 다시 고쳐 만드는 일을 등한히 하겠습니까?
여기에 고려대장경을 다시금 조성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헐어지면 고치는 것이 예삿일이거늘 하물며 민족의 유산인 초조대장경이 타 버린 것을 이제 다시 새로 조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연한 의지를 담고 있는 것이다.
선생은 그 때에 거사로 불렸다. 거사, 재가 생활 속에서도 수행 정진하는 이다. 유마 거사에게서 거사의 이상상을 모색하면서 철저하게 불법을 몸에 익혔던 것이다.
불교 경전을 폭넓게 섭렵했고, 그 가운데서도 「수능엄경」을 몹시 애송했다. 삶도 불교적이었다. 보현행원품을 노래한 향가 ‘보현십원자’는 그가 빚어 놓은 찬란한 불심의 발로였다. 그 같은 신심의 선생에게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한 임금과 신하의 간절한 기도를 담은 구국의 기고문을 맡긴 것은 필연이었을 것이다. 선생은 이 기고문에 자신의 불심과 애국심을 하나로 녹여 내고 있지 않은가.

이제 대소 재상과 문무백관들이 함께 큰 서원을 세우고 이미 주관하는 관청을 두어 그 일을 시작하였나이다.

주관하는 관청이란 대장도감을 말한다. 이미 대장도감이 운영되고 있었다는 증거다. 고려대장경의 조성이 1237년의 일이라고 보지만 그 이전에 이미 나무를 구하고 제련해 찌고 말렸으며 송나라본, 거란본, 속장경 경전의 내용을 교감해 바로잡고 그 한장한장 사경을 하는 일들은 이미 시작됐던 것이다.

맨처음 대장경을 판에 새기던 연유를 고찰하였더니 현종 2년 거란병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와서 현종은 남쪽으로 피란하였는데 거란 군사는 오히려 송악성에 주둔하고 물러가지 않았습니다.
이에 현종과 여러 신하들이 큰 서원을 발하여 대장경을 판각하자 뒤에 거란 군사가 스스로 물러갔습니다. 그리하온즉 그 때나 지금이나 같은 대장경이요, 판각한 것도 다를 바 없으며 임금과 신하가 함께 서원한 것도 또한 한가지오니 거란군사가 스스로 물러갔사온대 지금의 몽고군은 어찌 물러가지 않겠습니까? 다만 여러 부처님과 여러 하늘이 살피시기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현종 때 겪었던 거란족의 침입이나 그때의 몽고 침입은 다 같은 국난이며 온 국민이 다같이 대장경 조성의 대원을 세우는 것도 한가지이니 오늘이라 하여 몽고병이 물러가지 않을 까닭이 있겠느냐는 하늘에 사무치는 기고문. 하루도 시를 짓지 않은 날이 없었다는 선생이 , 치떨리는 분노 속에 붓을 들어 부처님 전에 올린 간곡한 기고문에는 적어도 한마음 한뜻으로 이룬 대결집이야말로 잔학무도한 몽고군을 물리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깃들어 있다.

저회들이 진실로 지성으로 하는 바가 그 때 군신의 정성에 조금도 부끄러울 바 없으니 원하옵건대 여러 부처님과 성현님들, 삼십삼천께서는 저희의 간곡한 기원을 살피시고 신통한 힘을 빌어 주소서.
저 모진 오랑캐로 하여금 멀리 도망하여 다시는 우리 국토를 밟는 일이 없게 하여, 전쟁이 그치고 나라안팎이 편안하며 모후와 태자의 수명이 길고 나라의 운이 만세에 태평토록 유지되게 해 주신다면 저희들은 마땅히 노력하여 더욱 법문을 보호하고 부처의 은혜를 만 분의 일이라도 갚으려고 합니다.
저희들 간절히 비는 마음, 밝게 살펴 주시길 삼가 바라옵니다.

군신기고문을 지은 지 오년 뒤에 선생은 세상과의 인연을 마친다.
군신기고문이 전하는 「동국이상국집」전 53권은 칙명을 받들어 대장경 판각을 마친 뒤 그 대장도감에 의해 판각 간행되기에 이른다. 「동국이상국집」은 백운 소설이란 명편 외에 차 문화를 즐기던 선생이 남긴 무수한 차시에 이르기까지 담겨 있어 실로 우리 문화의 보물 창고와 다름없다.
그 안에는 수시로 열렸던 대장경 도량 법회 때 우렁차게 울렸을 음찬시, 대장경 도량 소와 같은 명문들도 가득하다.
“---다시금 법력 벌어 금성이 견고하니 오랑캐의 굳센 기병인들 어찌 두려우랴---.”
많은 이들이 그의 대 서사시 동명왕편이 없었더라면 우리 국문학사가 얼마나 쓸쓸했겠느냐고 되묻고 있지만, 참으로 대장각판 군신기고문이 전하지 않았던들 남아 전하는 것이 미미한 고려대장경의 역사는 얼마나 쓸쓸한 것이었을까.
햇살 따사로운 선생의 묘소 곁에서 창공 위 한 조각 흰구름처럼 살다 가신 선생의 남긴 시 한 구절 음미해 본다.

구구한 나라가 어찌 그대를 포용할 수 있겠는가. 그대를 위해 천지만큼 큰 세상을 만들어야지 .

아이엠에프시대의 우리를 두고 하는 말씀처럼 가슴에 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