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映岩대사(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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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의 향기 - 시명
1992년 10월 128호
영암 큰스님께서는 80년대 중반까지 이 지상에서 범 같은 눈썹과 아이 같은 해맑은 미소를 함께 띄우고 사셨던 스님이니 우리와는 너무나도 친근한 분이다.
먼년에는 서울 봉은사에 주석하였지만, 해인사 곳곳에는 스님의 손때가 묻어있고 스님의 잔기침 소리와 애정어린 눈길, 그리고 잔소리마저도 아직도 문설주 언저리에 남아 있다.
1960년대에 해인사에서 영암스님을 모시고 살았던 스님들은 누구나 영암스님을 가장 무서운 ‘호랑이 스님’으로 기억하지만 그와 함께 그분처럼 해인사를 아끼고 가람을 지키는 데 온힘을 바친 분이 없다는 사실도 모두 인정하고 있다.
오늘날도 학인들이 절 시주물을 아끼지 않으면 어른 스님들은 곧잘 영암스님을 모시고 살았던, 고되고 힘겹기만 했던 ‘시집살이’ 시절 이야기를 교훈으로 들려줄 만큼 영암스님의 흔적은 우리들 가슴에 아직도 식지 않고 따뜻하게 남아 있다.
스님은 수행승으로서보다는 교화승으로 더욱 빛나는 분이었다. 사리에 밝고 사심이 없으며 모든 것을 올곧게 처리하시어 스님 앞에서는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그냥 지나치는 일이 없었다.
스님은 1907년 경상남도 울산군 중남면 교동리에서 아버지 박석순과 어머니 신씨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밀양 박씨의 후예로 속명은 기종淇宗이다.
어려서 서당을 다니며 사서삼경, 유학을 공부하다가 우연하게 불교 서적을 얻어 읽던 가운데 영가永嘉대사의 증도가를 보다가 諸行無常一切空 卽是如來大圓覺이라는 구절을 읽고서 문득 발심하여 17세 되던 해에 통도사로 나아가 주청담朱淸潭스님을 은사로 김구하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으니 법명은 임성任性이었다.
스님께서는 24세에 통도사 강원 대교과를 졸업한 뒤 줄곧 통도사에 계시다가 1933년 3월에 불영사 주지로 취임하셨고, 그해 4월에는 오대산 월정사 에서 방한암 스님을 계사로 보살계와 비구계를 수지하였으며 이봉인 스님을 법사로 건당하였는데, 그 때 받은 법호가 바로 영암映岩이다.
1938년에는 행정승으로 이름을 날리던 이종욱 스님의 간곡한 권유로 월정사에 가서 퇴락한 그곳 불사를 일으키고 가람을 새롭게 가꾸었지만 6․25 동란으로 그 모두가 잿더미로 변해 버려서 옛 모습을 찾을 길 없다.
1941년에는 월정사에서 종사법계를 품수하였고, 6․25전란 전까지 월정사에 있으면서 힘들고 어려운 살림살이를 모두 관장하였다.
6․25가 일어나자 남으로 내려와서 통도사 해인사를 포함, 본사에서 막중한 소임을 보기도 하고 동림사 해남사 등지에서 포교사를 역임하기도 하셨다. 또 원효학원 감사, 해인학원 이사로 있으면서 언제나 종단 행정의 일선에서 최선을 다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렇게 스님께서 종단의 대소불사를 관장하면서도 언제나 잊혀지지 않는 마음의 고향이 있었으니 경상북도 울진 천축산 불영사가 그곳이다.
당시 불영사는 폐사廢寺가 되다시피 한 절이었다. 처음으로 스님이 주지 부임을 받은 곳이기도 하고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복원하였기 때문에 특히 잊혀지지 않는 곳이기도 했을 것이다. 특히나 스님의 은사인 주청담 스님을 조실로 모시고 불영사를 수행도량으로 삼아 3년 결사 용맹정진을 시작했던 것과 함께 그곳에서 평생의 도반인 자운스님을 만났기 때문일 것이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수행자가 대중운력을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어서 오전에는 좌선하고 오후에는 대중운력으로 불영사를 재건해 나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스님들은 힘든 운력을 견디지 못하고 하나 둘씩 떠나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대중이 전부 떠나고 오직 한 분 스님만 남아 있었는데 어느 날 스님께서 장에 갔다 오니 그 스님마저 보이지 않았다.
영암스님은 부랴부랴 장꾸러미를 던져 두고 뛰어 나와 여기 저기 찾아보았으나 찾을 길이 막연해져 산으로 뛰어 올라가 그 스님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그러나 무심한 메아리만 귓전을 스칠 뿐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산마루에 오르니 마침 그 스님이 걸망을 내려놓고 쉬고 있었으므로 간신히 만날 수 있었다.
“스님! 이곳에 오실 때 3년 동안 결사하러 오셨다가 이렇게 떠나심은 애초 약속이 틀리지 않습니까? 저는 스님께서 꼭 가시겠다면 막지는 않겠습니다만 부처님과의 약속은 지키셔야지요” 하고는 돌아왔는데 그 스님께서는 영암스님을 따라와 그 어렵던 불영사 복원을 마무리하였다. 그 때 그 한분의 스님이 바로 평생 도반으로 지낸 자운 큰스님이다.
그 뒤 영암스님은 그 때 그 은혜와 우의를 잊지 못해 늘 자운스님을 보필해 드렸는데 그 뒤 60년도에 지금 방장이신 성철스님을 모시고 해인총림을 개설할 때에도 자운스님이 주지소임을 맡자 영암스님은 총무로서 어려운 살림살이를 다 맡아 꾸려나간 것은 영암스님의 인간됨을 잘 알 수 있는 한 보기이다.
60년대 해인사는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만큼 재정이 궁핍하였는데, 수십 년 동안 대처승에 의해 온갖 수탈이 벌어져서 그 뒤 정화 휴우증이 큰 상처로 남아 있던 때여서 많은 대중들이 있었지만 대중이 공양할 양식조차 없었고 재정은 고갈될대로 고갈되어서 암담하던 시기였다.
더구나 해인사가 마산에 있던 해인대학을 운영해야 하는데도 해인대학에 해인사가 흡수되는 현상에 이를 정도였으니, 더 이상 해인사의 어려움을 설명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총무 소님을 맡은 영암스님께서 해인사와 해인대학의 재정을 분리시키지 않았더라면 오늘의 해인사는 아마 해인대학에서 운영하는 상태에 이르렀을지도 모른다.
혹자는 해인대학에 대한 운영을 둘러싸고 오늘날 별의별 소리를 다하고 있지만, 그 때 해인사의 재정 상태로는 해인대학과 해인사를 병립할 도리가 없었다. 가람은 오랫동안 돌보지 않아서 비가 오면 주룩주룩 비가 새고 있었다. 이렇게 어려울 때 스님은 해인사에 계셨다.
지금까지 영암 큰스님의 행장 가운데 전반부의 삶을 조명하여 보았다. 지면 관계로 다음 호에서 스님의 후반부 행장을 살펴보기로 하면서 여기서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