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며 매달려 간신히 입방한 금산사 행자시절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나의 행자시절 - 석지명
1998년 01월 191호
나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이 사바세계에 왔다. 세상에 태어나는 데 나의 뜻은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나는 내 뜻과 관계없이 절집에 있었다. 철이 들어서 내가 서 있는 곳을 생각해 보니 그 곳은 절이었다. 탁발승이 어디에선가 나를 주워왔다고 한다.
나는 처음에 깊은 산골에 있는 조그마한 암자에 살았다. 뒷산에 올라가면 멀리 금강이 보이고, 산의 한 모퉁이에는 나병 환자 촌이 있었다. “접촉하면 문둥병에 걸린다”는 소문 때문에 나는 나환자와 만나는 것을 아주 무서워했다. 그 고에 전기, 전화, 대중교통은 없었다. 산 계곡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을 식수로 이용했다.
그 암자에서의 내 임무는 예불과 노동이었다. 새벽과 저녁에는 예불을 모시고 기도를 했다. 나는 아직 나이가 어려서 정식으로 계를 받지 못했지만, 다른 스님이 없기 때문에 나에게 법당에서 예불 모시는 일이 주어졌다. 주지 노스님은 재받이 전문가로 자주 여기 저기로 초청되어 출타했다. 아침 공양이 끝나면, 나는 땔감을 구하기 위해서 뒷산에 올라갔다. 산의 잡초를 베어다가 말려서 연료로 사용했다. 여름부터 가을까지 땔감을 준비해서 겨울과 봄을 지대야 하기 때문에 나의 노동량은 많았다.
불탄일, 칠석, 동지, 입춘 등의 특별한 때를 제외하고 평소에는 그 절에 불공을 드리기 위해서 오는 신도도 없었다. 속세와 완전히 격리된 그 곳에, 바깥 세상의 소식을 전해 주는 이는 몇 개월에 한번씩 들르는 객 스님과 방학시기에 공부하기 위해서 찾아오는 학생들뿐이었다. 어린 시절 나의 선생은 그 객 스님들과 고3 학생들이었다. 객 스님들은 나에게 한문을 익히게 했고, 학생들은 초동학생 수준의 국어와 셈본을 공부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었다.
어느 여름이었다. 그 산 속에 고3의 여학생 두 명이 방학 동안 살게 되었다. 그들은 어린 나를 무척 귀여워해 주었다. 나에게 김소월의 시집이나 학용품 등을 선사하고, 자신들이 쓴 시를 읽어 주기도 했다. 그들이 약수터에서 목욕을 할 때는 혹시나 외부 사람이 오는지 내가 망을 보았다. 목욕 뒤에는 내가 그들의 머리 빗어 주기도 했다. 그 장면을 본 노스님으로부터 큰 걱정을 듣고서야 여자의 머리를 빗어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한 달이 다 차서 그들이 자기의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나는 그들의 짐을 지게에 지고 수십 리를 걸어서 이틀에 한번씩 들어오는 버스 정류장까지 전송 나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버스를 떠나 보내고 혼자 빈 지게를 매고 절로 걸어오면서 뭔가 이상했다. 허전했다. 모든 것을 다 알아 버린 것 같았다. 절에 돌아와서 그들이 머물던 텅빈 방을 보고 공허에 떨며 울었다. 밥도 먹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나는 그들과 만나고 헤어졌다. 그 뒤부터 나는 여자를 무서운 마음 병을 만드는 괴물과 같은 것으로 여겼다. 정에 흔들리고 마음을 빼앗기면 큰일난다고 생각했다. 여자를 만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ꡓ는 생각뿐이었다. 그 경험은 나에게 긍정 부정의 양면으로 영향을 미쳤다. 갈애, 고독, 고통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고, 늘 여자를 경계하고 나를 강하게 하는 데는 큰 도움이 되었으리라. 그러나 나는 오직 나만을 생각하고 남에게 따뜻한 정을 베풀 줄 모르는 차가운 사람이 되었다. 여자를 만나면 이 여자가 나에게 무슨 피해를 입힐 것인지를 먼저 의심해 보는 이상한 사람이 된 것이다.
어느 날 한 객 스님은 나에게 “이런 곳에 살면 배울 것도 없고 진짜 중이 될 수 없으니 큰 절로 가야 한다.”고 말해 주었다. 나는 금산사로 갔다. 그 절은 대처승으로부터 정화된 지 얼마 안되어서 어수선한 상태였다. 스님과 행자들이 많았다. 행자들의 수가 많아서인지 행자에 대한 심사가 엄격했다. 행자를 받아 주는 심사 책임자는 포공스님이었다. 그 스님은 행자들이 승려가 될 자질을 갖추고 있는지를 살폈다. 아울러 산이나 밭에서 노동할 수 있는 능력과 건강도 중요하게 생각했다. 나는 아직 나이가 어려서 일을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쫓겨날 뻔했지만, 잘할 수 있다고 울며 매달려서 간신히 행자 입방을 허가받았다.
행자들은 입문 순서대로 소임을 맡았다. 처음에는 산에 가서 땔나무를 구해 오거나 밭에 나가 일을 해야 했다. 다음에는 물을 길어 나르는 일, 불 때고 국 끓이는 일, 반찬을 만드는 일, 밥을 짓는 일의 순서로 소임을 맡았다.
그때 금산사에서는 조실에 금오스님, 주지에 월주스님, 강사에 입적한 용봉스님, 총무에 경운스님, 중강에 도산스님이었다. 월주 스님은 총무원의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절에 없을 때가 많았지만, 귀사하면 반두시 모든 행자들을 불러 앉히고, 맡은 바 소임과 공부에 다같이 충실하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제대로 중노릇하지 않으면 효도해야 할 속가의 부모님에게도 죄가 되고, 절의 부처님에게도 폐만 끼치게 된다는 것이다.
행자들은 중강스님에게서「초발심자경문」을 배웠는데, 날마다 배우는 분량을 완전히 외워야만 했다. 이 출가승 입문서에는 “재물과 여색의 화”를 강조하는데, 그 무렵 스물한살이던 중강스님의 설명은 충분하지 못한 것 같다. 열네살의 나는 이미 여자라는 괴물이 만드는 병에 걸려서 심하게 앓아 보기도 했는데, 저 중강스님은 아직 그런 아픔을 맛보지 못한 듯했다. 그러나 뒷날 생각해 보니, 그 때의 나야말로 “재색의 화”에 대해서 제대로 몰랐던 것 같다.
혜정스님은 월주스님의 고향 친구이고 다같이 금오스님을 은사 스님으로 모신 출가 형제간이라고 했다. 혜정스님은 가끔 금산사에 내려와서 며칠씩 묶다 가곤 했는데, 나는 멀리서 그 스님의 고요하고 자비스러운 모습을 여러 번 훔쳐보았다. 그 스님의 인품을 마음 속으로 존경하고 사모한 나머지, 내 은사 스님으로 모시겠다고 작정하고 허락을 받았다.
나와 같이 행자 생활하던 이의 숫자가 많았는데, 어찌된 셈인지 모두 떨어져 나갔다. 먼저 고된 행자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포기하는 이가 반 이상이었다. 「초발심자경문」과 「사미율의」를 다 익힌 뒤에 수계식을 가졌는데, 한날 한시에 사미계를 방는 수계도반은 삼십오 년이 지난 지금 한 명도 절 집에 남아 있지 않다. 모두 환속했으리라고 짐작된다.
나는 가끔 왜 저 행자 동기생들은 모두 환속하고 나만 절에 남아 있는지를 생각해 보곤 한다. 혹시 어릴 때, 저 여고생들과의 만남과 헤어짐을 당해서 겪었던 공허의 아픔이 오히려 나를 굳세게 만든 것은 아닐까, 저 아픔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다면, 나도 저 행자 도반들처럼 이미 속가에서 아기들이나 보고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