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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불교학계 이대로 좋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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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비평 - 장휘옥 1998년 01월 191호
현대는 정보화 시대고 세계화 시대다. 학문의 세계에서도 정보에 어둡거나 세계적 흐름에 보조를 맞추지 못하면 도태하고 만다. 불교학 분야도 예외는 아니다. 그런데 우리의 불교학계는 어떠한가? 정보에 어둡고 세계적인 흐름이 도외시되는, 아집과 이기심으로 주도되고 있는 한국 불교학계 이십여 년 전,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시절에 나의 동기생들은 불교학계의 미래와 불교교단의 발전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비록 지금은 한국 불교학이 우물안 개구리 수준에 머물고 있지만, 적어도 십 년 뒤면 우수 연구 인력의 양성은 물론 학문적인 성과도 두드러지게 나타날 것이고 불교학계에도 성숙한 토론의 장이 형성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실력 있는 소장학자들이 원로학자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격의 없이 활발한 토론과 논쟁을 할 수 있게 될 것이고, 한국 불교학계는 세계수준으로 발전해 갈 것이라 예상했다. 그래서 우리는 십 년 뒤를 기대하며 희망을 가졌었다.
그 뒤 십 년이 지나고 이십 년이 지났다. 성숙될 것이라 믿었던 한국 불교학계는 인접 학문의 학자들로부터 외면 당하고 많은 불교학자들에게까지 실망을 안겨 주었다. 지금의 한국 불교학계의 논문 수준은 모 잡지에서 말했듯이, 학위논문에서 조차도 기초적인 언어해석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경전을 인용해도 전체에 대한 이해 없이 필요한 부분만 입맛에 맞게 떼어서 인용하며, 님의 연구성과에 대한 안일한 모방 등을 일삼기 때문에 논문으로서의 별 의미가 없다. 한마디로 검증되지 않은 이차적 자료를 적당히 참조하여 구렁이 담 넘어 가는 식의 논문들을 양산하고 있는 실정이기 때문에 독창적인 논문을 찾기는 거의 힘들다. 더구나 남의 견해에 대한 인용 전거 없는 표절이 만연하고, 그것이 표절이라고 알 만한 실력도 없으며, 알았다고 하더라도 그에 대한 제재가 없기 때문에 차마 논문이라 말하기조차 민망한 것도 곧잘 볼 수 있다.
불교학술 회의장에서는 진지한 토론이나 논쟁의 풍경이 사라진 지 이미 오래다. 참석한 학자들의 무성의한 주제발표와 이해관계에 얽힌 논평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며, 간혹 논쟁이 오가는가 싶어 기대를 하면 학문적인 양심과는 상관없이 마음에 드는 사람은 추켜세우고 미운 사람은 깎아 내리는 식으로 끝나 버린다. 토론과 논쟁이 실종된 학회장. 이것이 한국 불교학계의 현주소다. 불교학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으로서 좁디좁은 학계의 한 구석이라도 차지하면,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는 원로학자가 터무니없는 논평을 해도 잠자코 그저 고맙다는 식의 기본적 예의(?)를 갖추어야만 살아 남는다. 그래서 소장학자들 간에는 이런 말을 은밀히 주고받기도 한다. “지금 우리 학계의 소장학차들이 취해야 할 입장은 두 가지 밖에 없다. 하나는 힘있는(?) 원로학자에게 아부하여 자신의 실력(?)을 인정 받거나, 아니면 학문적 양심을 지키며 거기에 대응하다가 학계에서 매장 당하는 길이다.”라고.
지난해(1997년) 11월 초에 있었던 한국불교학회의 발표회장에서도 이런 불교학계의 실상을 그대로 드러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오전 발표에서 한 소장학자가 원전의 해석문제를 지적하면서 발표자에게 그 해답을 요구했다. 발표자가 답변을 망설이고 있는 사이, 갑자기 방청석에서 질문자를 향해 쏘아 부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게 무슨 질문이야…. 자리에 앉아!” 시선이 집중된 곳에는 원로교수 한 분이 얼굴을 붉으락거리며 질문자를 향해 흥분하고 있었다. 그 교수의 갑작스런 행동에 참석자들은 처음에는 어리둥절했으나 금방 민망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너무나 졸지에 일어난 사건이기에 무슨 말인지 똑똑히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고함소리의 요지는 ‘원전의 자구 해석에나 매달리는 그런 시시콜콜한 질문은 질문답지 않으니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불교학은 철저한 원전 고증과 이에 근거한 사무친 고민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만 한다. 원전의 자구 하나, 그 번역 하나라도 철저히 규명하는 까닭은 석존과 역대 선지식의 교설을 한 치의 오류 없이 올바로 읽고자 함이다. 조그마한 칩 하나의 부실로 컴퓨터 전체가 작동되지 않듯이. 원전 한 구절의 소홀한 이해는 그 논문 전체를 오도할 수 있다. 원전 한 구절이라도 완벽하게 대조, 분석하고자 하는 것은 세계 불교학계의 추세이기도 하고, 또한 진정한 학자라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소장학자의 질문은 나무 한 그루 한 그루는 외면하면서 숲만 대충 보려는 우리 학계의 불성실하고 안이한 학문적 태도에 대한 새로운 각성과 일종의 경고로 받아들일 수 있는 좋은 질문이었다. 그런데 원로교수는 왜 사회자의 허락도 없이 마음대로 질문자를 면박하며 앉으라고 소리쳤을까? 고함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개인적인 감정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기득권에 대한 위협이라 생각하여 내린 철퇴였을까? 아무튼 이 사건으로 인해 소장학자들은 점점 더 소신 있는 질문을 피하게 될 것이고, 불교학회의 토론문화 부재현상은 더욱 가중될 것이라는 우려가 들었다.
이런 한국 불교학계의 풍토 속에서 어떻게 자유로운 학문적 논쟁과 대화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21세기라는 새로운
경쟁시대로 향하는 길목에서 힘없는 소장학자들은 벙어리 냉가슴 앓듯 마음만 졸이면서 그저 보고만 있어야 하는 걸까. 한국 불교학계의 발전은 곧 한국 불교종단의 발전이고 한국불교의 나아갈 길을 알려 주는 이정표다. 소장학자들이여, 뜻 있는 불교학자들이여, 참 불자로서 불교학자가 해야할 일은 비판적 안목으로 도전하는 용기를 가지는 것이다.
제발 더 이상 낡은 불교계의 시류에 편승하지 말고, 학자의 양심을 걸고 열심히 공부하여 소신 있는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실력을 갖추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