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 나는 불교가 뭔지도 모르는 채 출가의 열병을 앓고 있었다. 출가자의 본분사보다는 다분히 감상적 열병이었는데, 머리카락 시원스럽게 털어버리고 가사장삼에 휘적휘적 걸어가는 모습이 그리 멋있어 보일 수가 없었다. 여자로서의 구차한 숙명따위도 그리 출가만 하면 절로 후련해질것만 같았다. 그러면서도 미련은 많아서 이것 저것 재보느라고 출가의 연은 감히 생각지도 못하던 어느 날이었다. 조계사 도량을 지나가고 있는데, 저쪽에서 보살님 두 분의 이야기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 인천 용화사 보잘선방에서 동안거 접수 받는다고 하는데, 같이 안갈래?” 나는 그 길로 돈 삼십만 원을 들고 용화사로 떠났다.
그렇게 영겁결의 나의 동안거는 시작됐다. 하지만 두서 없이 떠난 길이라 동안거가 시작된 다음에야 내가 얼마나 부족한 게 많은지 알게 됐다.
법복은 공양간 보살님한테 얻어서 입을 수 있었지만, 이불도 각자가 준비해 와야 한다는 사실도 몰랐고, 매일같이 나의 육신을 공양시켜 줄 발우조차 없었다. 마침 동안거 결제 법회식 때 용화사 입구에 펼쳐진 불교용품파는 보따리 장사 아저씨가 있어서 겨우 발우 한 벌은 구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이불은 끝내 구하질 못해 어머니께 전화로 부탁을 드려야 했다. 살림 장만하듯이 나의 살림살이도 하나 둘 늘어났다. 하지만 함께 동안거에 들어간 짱짱한 대보살님들에 견주면 여전히 나는 너무도 가난했다. 보살님들은 방선시간이 되면 지대방에 모여 앉아 이것 저것 맛나는 것들을 꺼내 먹곤했는데 그 종류가 그렇게 다양할 수가 없었다.
실제로 그렇게 먹고 싶었던 건 아닌데도, 그 사어에서 손가락만 빨면서 앉아있으려니 공연히 궁색하고 구차스러워지곤 했다. 그런 마음을 들킬새라 조용히 앉아있을 때 마음씨 좋은 노보살이 “아그야 아그야!” 하고 부른다. 노보살님의 손에는 초코파이가 한 개 들려져 있다. 난처해진 웃음으로 손사fp를 치면 곁에 계신 보살님들까지 합세하셔서 일동으로 “괘않다. 먹어라!” 부추기곤 했다.
나는 그 무렵 애기보살로 불렸고, 실제로 나이도 가장 어렸다. 보실님들은 ꡒ우째 조만한 나이에 신심을 냈을꼬…ꡓ 하면서 나를 무척이나 갸륵히 여겼다. 그려면 바도 그분들의 믿음에 보답하듯이 말뚝 신심을 끝까지 올려 제법 귀염 받을 정도로 열심히 절 생활에 몸을 익혀나갔다. 보살선방 동안거는 하루 사분 정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새벽 세시 대종이 울리면 하나둘 일어나서 세면을 하고, 세시 반에 법당에 올라가 예불을 올린다. 예불이 끝나면 바로 새벽 정진에 들어간다. 그리고 나서 아침 공양을 들게 된다. 보살선방에 계시는 분들의 대개가 노보살님들이기 때문에 천수물 떠오는 일을 가장 힘들어 하셨다. 나는 얻어먹는 것도 많고, 또 사랑도 듬뿍 받는터라 보답하듯이 천수물 네다섯 주전자를 혼자 올려다 놓곤 했다. 그런 덕에 나의 하루는 사분 정진과 공양준비로 채워졌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나면 정말 꿈결같이 지나간다.
물흐르듯 지나간 자리, 그러나 지금 돌아봐도 더 없이 소중한 것은 송담스님의 다감한 법문으로 참선법을 익힐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 공간에 모인 분들은 모두 마음 공부에 대한 원력을 지니고 있다. 어수선한 마음자리를 적요하게 비워보고 싶은 그런 그리움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런 마음자리는 애서야 조금씩 넓혀갈 수 있고, 당장 눈 앞에 보이는 것은 서로가 한공간에서 부딪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동안거가 제법 한달 남짓 지나갔을 무렵이다. 방선을 알리는 죽비소리가 나고 입승 스님이 조용히 방을 나가신 다음의 일이었다. 한 보살님이 방선시간 중에도 참선을 계속할 요령으로 앉아 있었다. 그러나 그 앞에 마주앉아 있던 보살님이 그 심중을 알리 없다. 점심공양 준비도 할겸 일어나서 방석을 접으며 다소 부산스럽게 한 모양이다. 괴성이 질러졌던 건 그때였다. “내 콩알을 놓쳤잖아!” 무슨 소리인지 몰라 다들 어리벙벙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좌선법에 대한 집착 때문에 빚어진 일이었다. 좌선을 할 때 저쯤에 콩알 하나를 쳐다보는 정도로 눈을 반쯤 내리라고 했는데, 그 보살님이 왔다 갔다 하는 바람에 마음으로 찍어둔 콩알을 놓쳤다는 것이다. 그 싸움은 입승 스님이 오고서야 겨우 멈출 수 있었다.
공양을 할 때 나는 당연히 제일 하판에 앉게 돼 있다. 자연 맛나는 반찬들이 쑥대밭처럼 엉성해져서야 내 앞으로 왔다. 그런 건 사실 내게는 별로 큰 문제가 아니었다. 상기로 심하게 소화장애를 겪고 있었기 때문에 먹는 것에 그 때는 별로 큰 애착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참기름 한 병이 반찬과 함께 나왔다. 아마도 미역국에다 조금씩 쳐서 먹으라는 뜻이었던 듯하다. 그런데 보살님들이 국에다 넣을 생각은 안하고, 참기름을 수저에 가득 담아서 꿀떡 삼키는 것이었다. 그것도 평균 두 수저씩이나 마셨다. 나는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풍경이었다. 마침내 내 옆에까지 참기름병이 나왔는데, 나를 평소에 안타깝게 여기던 보살님이 당신은 먹지 않고 내 수저에 참기름을 가득 담아주는 것이었다. 큰 소리를 낼 수도 없고, 나는 고개만 저었다. 보살님은 내 허벅지를 살짝 꼬집으면서 “먹어, 대덕심!” 하는 거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나는 보살님이 떠 주는 대로 무려 세 수저나 참기름을 마셨다. 그리고 속이 느글거려 얼마나 고생을 했던지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난다.
선방은 여름보다 겨울나기가 더 복잡하다. 따뜻한 방구들 위에 앉아 있으려니 수마는 정신없이 달려들고, 또 모두가 그 좁은 방구석에서 복닥이려니 작은 것에도 치열해진다. 나중에야 안 거지만 선방에 오면 없던 탐욕도 거세게 일너나 그 순서가 있다고 한다. 그 가운데 가장 먼적 일어나는 탐욕이 식탐이다. 그리고 법복욕심, 좋은 잠자리, 방석 등 욕심은 여기서 저리기로 옮겨다닌다. 그 욕심을 쫓아서 다툼도 자주 일어난다. 하지만 동안거를 마칠 때쯤에서야 나는 조금 알 것 같았다. 왜 대중의 화합을 마음공부의 으뜸으로 두었는지. 왜 여렷이 모여서 함께 마음 공부를 지어 가도록 했는지 말이다. 그 단적인 대답은 동안거를 마칠 무렵 적어도 나는 반찬을 내 먹고 싶은 대로 골라 먹을 수 있었고, 잠도 저 안쪽 조용한 곳에서 청할 수 있었다. 그런 만큼 다툼의 소리도 잦아들었다. 동안거 초기 무성하게 일어났던 탐욕의 불길이 겨울 안거로 조용한 새해의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