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수기스님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고려대장경과 사람들 - 이윤수 1998년 01월 191호
수기스님 혜존.
칠백 년 세월을 묵힌 뒤에 띄우는 편지 사연입니다. 어떤 인연이었기에 칠백 년 뒤의 후손이 낡은 옷자락에 배어 있는 묵은 땟자국 같은 그리움으로 스님께 서신을 띄우는 것일까요.
세상에 전하는 스님 관련 기록이란 몇 줄 되지 않건만 제게 스님은 ‘수기’라는 두 글자만으로도 가슴 설레이는 그리움의 대상입니다.
스님의 존함을 맨 처음 접한 것은 소설「대장경」에서였습니다.
몽고의 장수 살리타이가 부인사에 침입해 고려의 스님과 민초들을 몰살시키고, 그 곳에 봉안돼 있던 대장경을 불태우는 것으로 시작하는 조정래 선생의 소설「대장경」.
그 소설에서 스님은 남다른 인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주인공은 뒤에 장경각을 짓는 대목수 근필입니다. 그러나 소설 속에 드러나지 않는 주인공은 바로 스님이셨습니다.
대장경 조성을 계획하는 최씨 무선정권을 향해 스님은 ‘백성의 원성을 엉뚱한 불사로 회피하지 말라‘고 준엄하게 꾸짖고 있습니다.
원하든 그렇지 않든 진행될 불사 앞에서 소설 속 스님은 ‘차라리 이루어질 불사라면 그 의도가 더 순수한불사가 될 수 있게 하자’고 다짐하십니다. 그리하여 스님이 주도하신 대장경 불사는 마침내 전란에 시달리던 백성들의 흩어진 마음을 모우는 정신적 구심점이 되었고, 현실적인 고통을 불심으로 승화시키는 신앙의 귀의처가 되기도 했습니다. 대장경 조성에 참여하는 백성들을 독려하며, 하나의 오자도 없이 완성도 높은 대장경을 빚어내신 스님, 스님 곁에선 산적도 정의로운 인물로 거듭났고, 무수한 민중의 발원은 스님 곁에서 꽃피어납니다.
소설은 역시 소설인지라 초인적인 혜안, 불세출의 의지가 영웅담을 뛰어넘기도 하지만 소설 속에서 스님은 완벽하게 정의롭고 부족함 없이 눈 밝게 사는 분이었습니다.
이토록 방대한 수기스님 자료를 어디서 구했느냐고 조정래 선생께 여쭈었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작가의 상상력 속에서 구했지요”
그렇습니다. 몇 줄 남아 전하지 않는 스님을 그리려면 자료에 바탕을 둔 ‘상상력’만이 가장 큰 힘이 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어차피 소설은 허구라 하더라도, 퍽 지나버린 세월 속에서 다시 만난 스님은 또다시 완벽한 분이셨지요.
다큐멘터리 고려대장경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 자료를 뒤지면서 이 엄청난 대결집을 진두지휘한 분이 수기스님이었다는 대목은 다시금 ‘옛사랑’을 떠올리듯 두근거리는 심정이었습니다. 동국대 도서관 지하 창고, 빛 바랜 한지에 새겨진 인경본 고려대장경 목록속에서 스님의 이름이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수기’라는 이름뿐 스님에 관한 정보는 최자의 「보한」에 실린 짤막한 내용과 고려의 스님들이 함께 남긴, 고려국 신조대장 교정별록에서 겨우 엿볼 수 있을 따름입니다.
그렇게 스님과 인연되면서 저는 하염없는 ‘물음표’를 지녀야 했습니다. 왜? 어떻게? 과연?---
허공을 향해, 스님을 향해 무수히 되물어야 했던 것은 턱없이 부족한 자료 때문이었지요. 왜 스님의 기록은 전하지 않는 겁니까? 여전히 어느 다락방 고문서 속에 잠들어 있는 겁니까, 무수한 전란 속에 스러지고 없는 겁니까, 아니면 우리 민족은 기본적으로 역사를 기록으로 남기지 않은 겁니까, 유독 대장경과 관련된 문헌만이 남아 전하지 않는 까닭은 어디 있습니까?
스님 , 엄청난 대불사였기 때문일까요? 성스러운 불사라 고려왕조 실록과 같은 기록으로 남길 수 없었던 것일까요?
고려청자의 비밀처럼 그렇게 저마다의 가슴속에 저장했다가 아예 잊혀지고 만 것일까요? 남아 전하지 않기에 스님이 더더욱 간절합니다.

수기(수기). 생몰연대 알 수 없음. 고려 고종 때의 승려. 화엄종의 승려로 추정되며 수진이라고도 한다.
도승통으로서 개태사의 주지였으며 자세한 생애는 전해지지 않고 있지만 학문이 뛰어나고 지식이 정밀했다고 한다. 고려대장경을 재조할 때는 고종의 명으로, 착오된 것을 교정하였는데 마치 자기가 번역한 것처럼 능란하였다. 그의 저서인 「고려국 신조대장 교정별록」30권은 대장경에 수록되었는데 이는 고려판본과 거란 및 송나라본 대장경을 대교하면서 경문의 잘못된 것을 정정하고 그 사실을 자세히 기록한 것이다. 이밖에도「대장목록」3권을 저술하였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백과사전에서조차 스님이 언제 나서 언제 세상과의 인연을 마쳐야 했는지 알 수 없다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고려대장경의 조성(1236년 -1251년)에 참여하셨던 것으로 보아 13세기 초에서 중엽까지 생존해 계셨음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화엄종의 스님으로 추정하는 것은 스님께서 머무셨던 ‘개태사’가 화엄종의 중심사찰 가운데 하나인 까닭입니다. 삼본 화엄경 주본 제6권에 ‘해동 사문 수기 소장본’이란 소장인이 찍힌 자료도 남아 있더군요.
학자들은 스님을 화엄종 안에서도 ‘의상스님에서 균여스님으로 이어지는 맥을 잇는 제자’라고 말합니다. 속장경에 전하지 않는 균여스님의 저술을 고려대장경 속에 편입시켜 간행한 것부터 그렇습니다.
의천스님은 균여스님을 인정하지 않아 그의 저술을 모두 속장경에 수록하지 않았다고 하죠. 그런가 하면 의상 스님의 일승 법계도에 관해 직계 법손의 해석을 모은 「법계도기총수록」을 보판에 편입하고 있는 것으로 다만 짐작해 보는 겁니다. 봉사 코끼리 더듬듯 이렇게 스님의 발자취를 헤아려야만 합니다. 이 또한 코끼리의 코만 더듬고 코끼리를 이해하려는 격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스님이 어느 종파였든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잘못됐지만 분황종에서 유통시킨지 오래돼 바꾸기 어렵다’고 기록한 교정별록의 내용만으로도 스님의 뜻을 가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님께선 다른 견해를 가진 종파의 입장조차 모두 수용해 고려 대장경에 편입시키지 않으셨습니까? 언제부터인지 내것네것으로 편 갈라 살아가는 우리 불가입니다. 스님, 선의의 발전을 도모하고 뜨겁게 서로의 가풍을 살려가던 고려의 불교가 그립습니다.
스님께서 교감히신 「고려국 신조대장 교정별록」을 접했을 때의 가슴 벅참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교정별록은 고려대장경의 내용을 어떤 방식으로 교정했는지를 낱낱이 기록해 놓은 책자죠.
고려대장경 영인본38권에 실려있는 교정별록은 지금 한글대장경으로 정리돼 있습니다. 그 한 대목 한 대목에 실린 글귀는 고려대장경 조성의 총책이셨던 스님의 입장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놀라운 건 사라지고 없는 「초조장경」과 북송의 「개보측판 대장경」거란의「대장경」등 세가지를 꼼꼼하게 대조해서 구체적으로 무엇이 어떻게 잘못됐는지 밝히고, 가장 정확한 쪽을 택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오늘의 우리는 세상에서 모두 모습을 감춘 초조대장경이나 송본, 거란본의 모습을 더듬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과정으로 어떤 입장으로 대장경의 편집에 임하셨는가를 헤아릴 수 있기도 합니다. 한 글자의 오류조차 교감해내신 그 세밀함도 충격적이거니와 분명 잘못됨을 알면서도 “마음대로고치지 않고 후현들에게 남긴다”하신 스님의 마음을 생각합니다. 고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 뛰어난 해석과 더 새로운 교정을 이룰 다음세대를 기다리던 스님의 넉넉함을 떠올려 봅니다.
수기스님, 그래서 교정을 봤다하지 않고 교감했다고 말하는가 봅니다. 고려대장경이 세계에서 가장 정확한 내용을 갖추고 있다고 평가 받는 까닭도 스님의 눈 밝은 교감에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고려대장경의 글자 체를 두고 추사선생은 인간의 글씨가 아니라 신선의 글이라 했다지만 전, 고려대장경의 교정작업 역시 사람의 솜씨가 아니라 신선의 경지라고 믿습니다. 방대한 경전의 어느 한구절 소흘함 없이 살피셨던 선지식의 자세는 어떤 일이고 ‘대충대충’ 넘어가고 마는 세상살이에 참으로 많은 경책이 되기 때문입니다.
교정별록 말미의 「사문수기 등교감」이란 대목에서 전 내내 눈길을 뗄 수 없었습니다. 등等이라는 한단어 속에 함축돼 있는 무수한 스님들의 알수 없는 이름을 조심스레 불러 봅니다. 눈 푸르게 탐구하고 정진하며 , 여러 대장경의 내용을 대조하고 진위를 밝히고 누락된 걸 새로이 넣어 두고, 각종 착오를 바로 잡으셨을 수많은 스님들의 땀방울이 새록 느껴져 옵니다.
그리운 수기스님 , 대체 고려라는 나라에는 불교의 기운이 얼마나 융성했기에 그처럼 눈 밝은 스님들이 모여 전란의 와중에도 착오 없는 교정작업이 가능했던 걸까요?
그 불심을 이루는 원동력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스님께 여쭙고 싶습니다. 중국 황제만이 쓸 수 있던 ‘봉 칙奉 勅’ 이란 단어를 대장경판 말미에 과감하게 기록했던 스님 뜻이 궁금합니다. 거란본이나 송나라본에 들어 있지 않은 우리 스님의 저술을 고려 대장경 속에 편입시킨 스님 뜻도 궁금합니다. 자주성의 발로였던 것일까요? 당대 세계에서 가장 융성하던 우리불교의 당당함을 표출한 것이었을까요?

개태사의 승통 수진은 널리 배워서 식견이 정밀했으며 칙령을 받들어 대장경의 바르고 잘못됨을 교감하였고 지금은 오교 도승통이 되었다
「보한집」권하

이 땅에 처음 ‘승통’의 이름을 단 분은 고구려에서 신라에 귀화한 혜통스님이셨습니다. 이 승통직 아래에 비구와 비구니 교단을 두었다고 하죠. 뒤에 지장스님이 귀국하고 삼국에 통일되면서 승통이란 이름대신 국통이란 이름이 쓰였습니다.
고려 때의 승통은 ‘교종 최고의 법계’였다죠? 나라에서 주관하는
승과의 교종시험에 합격하면 대선, 대덕, 대사, 중대사, 삼중대사, 수좌를 거쳐 승통에 이르렀고 승통이란 지위는 왕사나 국사의 자격이 부여됐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수기 스님께선 혼란의 시대를 지키는 왕사나 국사와 다름없는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겠군요.
보한집에서 스님에 얽힌 또하나의 사연을 읽었습니다. 스님 성품을 드러내 보여 주는 가장 귀한 구절이지요. 당대의 문장가 하천단이 스님께 겨자를 내밀며 글을 지어 보라하자, 논리를 세움에 있어 겨자 맛처럼 극명해야 한다 하신 한줄기 문장. 그것은 한편의 시詩였습니다. 그리고 그걸 그대로 오롯한 수기스님ꡑ 이었습니다.
톡 쏘는 겨자맛 같은 극명한 논리로 고려대장경을 교감하시고, 고려대장경 조성을 진두지휘하셨을 스님 모습이 절로 떠오릅니다. 분명 스님은 수행의 삶 조차도 그처럼 극명하게 사셨을 테지요. 스님, 스님께서 신명을 바쳐 완성하신 고려대장경이 있는 해인사가 가야산에 머잖아 골프장이 생긴다 합니다. 정밀한 식견으로 논리를 세움에 있어 겨자맛처럼 극명하셨을 스님께서는 이 문제에 어떻게 대처하셨을까요?
‘후대에 이 문제를 밝혀 줄 현철賢哲을 기대한다’는 스님 앞에 오늘 우리는 어떤 슬기로 살아가야 할지, 막막할 따름입니다.
존경하는 수기스님 , 당신의 그 지혜로운 말씀이 그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