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기(수기). 생몰연대 알 수 없음. 고려 고종 때의 승려. 화엄종의 승려로 추정되며 수진이라고도 한다.
도승통으로서 개태사의 주지였으며 자세한 생애는 전해지지 않고 있지만 학문이 뛰어나고 지식이 정밀했다고 한다. 고려대장경을 재조할 때는 고종의 명으로, 착오된 것을 교정하였는데 마치 자기가 번역한 것처럼 능란하였다. 그의 저서인 「고려국 신조대장 교정별록」30권은 대장경에 수록되었는데 이는 고려판본과 거란 및 송나라본 대장경을 대교하면서 경문의 잘못된 것을 정정하고 그 사실을 자세히 기록한 것이다. 이밖에도「대장목록」3권을 저술하였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백과사전에서조차 스님이 언제 나서 언제 세상과의 인연을 마쳐야 했는지 알 수 없다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고려대장경의 조성(1236년 -1251년)에 참여하셨던 것으로 보아 13세기 초에서 중엽까지 생존해 계셨음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화엄종의 스님으로 추정하는 것은 스님께서 머무셨던 ‘개태사’가 화엄종의 중심사찰 가운데 하나인 까닭입니다. 삼본 화엄경 주본 제6권에 ‘해동 사문 수기 소장본’이란 소장인이 찍힌 자료도 남아 있더군요.
학자들은 스님을 화엄종 안에서도 ‘의상스님에서 균여스님으로 이어지는 맥을 잇는 제자’라고 말합니다. 속장경에 전하지 않는 균여스님의 저술을 고려대장경 속에 편입시켜 간행한 것부터 그렇습니다.
의천스님은 균여스님을 인정하지 않아 그의 저술을 모두 속장경에 수록하지 않았다고 하죠. 그런가 하면 의상 스님의 일승 법계도에 관해 직계 법손의 해석을 모은 「법계도기총수록」을 보판에 편입하고 있는 것으로 다만 짐작해 보는 겁니다. 봉사 코끼리 더듬듯 이렇게 스님의 발자취를 헤아려야만 합니다. 이 또한 코끼리의 코만 더듬고 코끼리를 이해하려는 격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스님이 어느 종파였든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잘못됐지만 분황종에서 유통시킨지 오래돼 바꾸기 어렵다’고 기록한 교정별록의 내용만으로도 스님의 뜻을 가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님께선 다른 견해를 가진 종파의 입장조차 모두 수용해 고려 대장경에 편입시키지 않으셨습니까? 언제부터인지 내것네것으로 편 갈라 살아가는 우리 불가입니다. 스님, 선의의 발전을 도모하고 뜨겁게 서로의 가풍을 살려가던 고려의 불교가 그립습니다.
스님께서 교감히신 「고려국 신조대장 교정별록」을 접했을 때의 가슴 벅참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교정별록은 고려대장경의 내용을 어떤 방식으로 교정했는지를 낱낱이 기록해 놓은 책자죠.
고려대장경 영인본38권에 실려있는 교정별록은 지금 한글대장경으로 정리돼 있습니다. 그 한 대목 한 대목에 실린 글귀는 고려대장경 조성의 총책이셨던 스님의 입장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놀라운 건 사라지고 없는 「초조장경」과 북송의 「개보측판 대장경」거란의「대장경」등 세가지를 꼼꼼하게 대조해서 구체적으로 무엇이 어떻게 잘못됐는지 밝히고, 가장 정확한 쪽을 택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오늘의 우리는 세상에서 모두 모습을 감춘 초조대장경이나 송본, 거란본의 모습을 더듬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과정으로 어떤 입장으로 대장경의 편집에 임하셨는가를 헤아릴 수 있기도 합니다. 한 글자의 오류조차 교감해내신 그 세밀함도 충격적이거니와 분명 잘못됨을 알면서도 “마음대로고치지 않고 후현들에게 남긴다”하신 스님의 마음을 생각합니다. 고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 뛰어난 해석과 더 새로운 교정을 이룰 다음세대를 기다리던 스님의 넉넉함을 떠올려 봅니다.
수기스님, 그래서 교정을 봤다하지 않고 교감했다고 말하는가 봅니다. 고려대장경이 세계에서 가장 정확한 내용을 갖추고 있다고 평가 받는 까닭도 스님의 눈 밝은 교감에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고려대장경의 글자 체를 두고 추사선생은 인간의 글씨가 아니라 신선의 글이라 했다지만 전, 고려대장경의 교정작업 역시 사람의 솜씨가 아니라 신선의 경지라고 믿습니다. 방대한 경전의 어느 한구절 소흘함 없이 살피셨던 선지식의 자세는 어떤 일이고 ‘대충대충’ 넘어가고 마는 세상살이에 참으로 많은 경책이 되기 때문입니다.
교정별록 말미의 「사문수기 등교감」이란 대목에서 전 내내 눈길을 뗄 수 없었습니다. 등等이라는 한단어 속에 함축돼 있는 무수한 스님들의 알수 없는 이름을 조심스레 불러 봅니다. 눈 푸르게 탐구하고 정진하며 , 여러 대장경의 내용을 대조하고 진위를 밝히고 누락된 걸 새로이 넣어 두고, 각종 착오를 바로 잡으셨을 수많은 스님들의 땀방울이 새록 느껴져 옵니다.
그리운 수기스님 , 대체 고려라는 나라에는 불교의 기운이 얼마나 융성했기에 그처럼 눈 밝은 스님들이 모여 전란의 와중에도 착오 없는 교정작업이 가능했던 걸까요?
그 불심을 이루는 원동력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스님께 여쭙고 싶습니다. 중국 황제만이 쓸 수 있던 ‘봉 칙奉 勅’ 이란 단어를 대장경판 말미에 과감하게 기록했던 스님 뜻이 궁금합니다. 거란본이나 송나라본에 들어 있지 않은 우리 스님의 저술을 고려 대장경 속에 편입시킨 스님 뜻도 궁금합니다. 자주성의 발로였던 것일까요? 당대 세계에서 가장 융성하던 우리불교의 당당함을 표출한 것이었을까요?
개태사의 승통 수진은 널리 배워서 식견이 정밀했으며 칙령을 받들어 대장경의 바르고 잘못됨을 교감하였고 지금은 오교 도승통이 되었다
「보한집」권하
이 땅에 처음 ‘승통’의 이름을 단 분은 고구려에서 신라에 귀화한 혜통스님이셨습니다. 이 승통직 아래에 비구와 비구니 교단을 두었다고 하죠. 뒤에 지장스님이 귀국하고 삼국에 통일되면서 승통이란 이름대신 국통이란 이름이 쓰였습니다.
고려 때의 승통은 ‘교종 최고의 법계’였다죠? 나라에서 주관하는
승과의 교종시험에 합격하면 대선, 대덕, 대사, 중대사, 삼중대사, 수좌를 거쳐 승통에 이르렀고 승통이란 지위는 왕사나 국사의 자격이 부여됐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수기 스님께선 혼란의 시대를 지키는 왕사나 국사와 다름없는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겠군요.
보한집에서 스님에 얽힌 또하나의 사연을 읽었습니다. 스님 성품을 드러내 보여 주는 가장 귀한 구절이지요. 당대의 문장가 하천단이 스님께 겨자를 내밀며 글을 지어 보라하자, 논리를 세움에 있어 겨자 맛처럼 극명해야 한다 하신 한줄기 문장. 그것은 한편의 시詩였습니다. 그리고 그걸 그대로 오롯한 수기스님ꡑ 이었습니다.
톡 쏘는 겨자맛 같은 극명한 논리로 고려대장경을 교감하시고, 고려대장경 조성을 진두지휘하셨을 스님 모습이 절로 떠오릅니다. 분명 스님은 수행의 삶 조차도 그처럼 극명하게 사셨을 테지요. 스님, 스님께서 신명을 바쳐 완성하신 고려대장경이 있는 해인사가 가야산에 머잖아 골프장이 생긴다 합니다. 정밀한 식견으로 논리를 세움에 있어 겨자맛처럼 극명하셨을 스님께서는 이 문제에 어떻게 대처하셨을까요?
‘후대에 이 문제를 밝혀 줄 현철賢哲을 기대한다’는 스님 앞에 오늘 우리는 어떤 슬기로 살아가야 할지, 막막할 따름입니다.
존경하는 수기스님 , 당신의 그 지혜로운 말씀이 그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