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이리로---분홍 치마
노란 저고리에 까만 조바위까지 얹은 아이들이 가지런히 놓인 의자를 향해 와르르 몰려간다. 그것들은 한꺼번에 움직이는 물고기 같다. 자리를 옮겨 사진기를 쳐다보고 앉았으면서도 한시도 움직임을 멈추지 않는다. 머리에 올린 것 만지고, 입은 것, 여미고, 옆놈이 걸어오는 손장난 털쳐 내고---구월에 핀 과꽃처럼 또랑하고 맑은 아이들, 부처님을 뒷배경으로, 가운데는 스님을 화심으로 삼은 꽃밭이다. 성불 유치원 원아들은 한 학기 과정을 끝내고, 구중중한 바깥 날씨와는 상관없이 화창한 이층 법당에서 기념 사진을 박고 있었다.
우산을 쓸까말까 싶게 내리는 비로 촉촉히 젖은 유치원 모래밭에서 아마도 형이나 누나를 따라온 듯 싶은 아이 하나가 따로 놀고 있었다. 아이란 또래와 함께 몰두할 일 있을 때말고는 늘 시큰둥하다. 늘 뻔한 소리만 묻는 어른들에게 특히 그렇다. 법당 가봤니? 네. 안 무섭니?---안 무서워요.
기억은 오래 묵은 것일수록 앞뒤가 없다. 아버지의 뒷등에 달라붙어서 논길로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발견한 크고 붉은 다알리아꽃 한 송이, 뭐 이런 식이다. 늘 다니던 익숙한 길이라 그러셨을까. 어쩌자고 그렇게 늦은 시각에 집을 떠나 절로 가게 되었던지, 달빛이 희게 되쏘이는 좁은 산길을 할머니를 따라 걸어가던 것도 있다. 자글거리고 끓는 방에서 할머니 무릎을 베고 누워 있다가 앗, 하며 들었던 이야기 한 토막도 있다. 치질에는 청개구리를 들깻잎에 싸서 냉큼 생키면 즉효라카대. 바깥에서 기웃이 들여다본 법당은 번쩍거리는 불상도 그랬거니와, 늘어뜨려진 종이 조각, 우중충하고 알 수 없는 그림들, 그리고 빛이 닿지 않는 후미진 곳의 어둠뿐이던 무서운 것이었다.
산 속에서 어둡던 법당이 마을 속으로 내려오면서 환해졌다. 이제 법당은 아이들에게 더 이상 외경스럽기만한 곳, 들어가기 싫기 만한 곳이 아니다. 원주의 공설 운동장에서 멀지 않은 성불원도 그렇다.
대지 사백 평 , 백이십 건평의 이층 건물인 이곳은 ꡒ원주지역 불교 포교의 대부ꡓ라 불릴 만큼 왕성한 포교 활동을 벌이고 있는 현각스님이 원주에서 이룬 십 년 행장의 출발점이자 터전이 되어 준 곳이다. 논과 밭뿐이던 이 일대가 사람이 살 만한 곳이 된 것은 일천 이백 세대가 입주해 살고 있는 주공아파트단지가 들어선 뒤부터이니, 다섯 해쯤밖에 되지 않는다. 어렵사리 땅을 마련해 일층 건물은 올렸지만 세를 줄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고, 지하에 모셔진 법당은 방수가 잘 안되어 여름날 아침에 일어나 보면 물이 차 방석이 둥둥 떠다니곤 했다. 단층 건물이나 건물의 꼭대기에 법당을 모시지 않는 한 도시 건축의 구조가 그 형편을 감수 할 수밖에 없겠는데도, 사람들은 입주자의 발소리를 위로부터 전해 듣는 테다 부처님 모신 곳을 제 절로 삼기를 꺼려했다. 더구나 자연광이 없는 지하실이었다.
어렵게 시작된 출발이라 첫 삼년은 법회 때마다 오늘은 몇 사람이나 더 모이려나 신경이 써졌다. “오는 사람”에 대한 강박 관념 떨치고 “할 일”을 찾아 몰두해 보리라 마음먹은 것은 우선 그런 제 마음이 견디기 힘들어 마련한 자구책이기도 했다. 그로부터 삼 년쯤이 지나 이층에 건물을 지어 부처님을 모셔 올린 다음 일층 세입자들을 내보내고 유치원을 개원하고 나서부터 일에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행려자수용 시설인 원주 시립 복지원을 시로부터 위탁받아 운영하게 된 것은 유치원을 개원한 이듬해부터였다. 현재 여덟 명의 직원이 상주하고 있는 이곳에 수용되어 있는 행려자는 정신 질환자, 지체 부자유자, 무연고에 독립 생활을 할 수 없는 노인등 백 명이 좀 넘는다.
복지원은 중앙통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해 있으면서도 자연적인 여건이 나쁘지 않아 심신이 고단한 사람들이 제 마음을 다스려 나가기에 방해받을 일이 없어 보인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디귿자로 지어진 시설을 둘러치는 울타리가 없다는 점이었다. 울타리 대신에 한가로운 소의 울음소리가 가끔 들릴 뿐이었다. 이곳을 빠져나가기로 마음먹은 자라면 울타리 따위가 최종적인 장애물이 될 수 없을 터이므로 그것을 지어 사람들을 더욱 위축시킬 필요는 없다고 그는 생각한다. “백 번 속더라도” 강제된 폭력을 쓰지 않고 말로 설득하려 한다는 것도 이 곳이 운영 원칙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가 바라는 바, 특수 집단이 아닌 보통의 이웃으로 대접받을 만하게, 스님과 낯선 손님을 맞이하면서 공손히 예를 올리는 이 곳 사람들의 얼굴이 밝았다.
작업장에서 샘플 화장품을 꾸러미로 만들고 있는 사람들은 스무 명 남짓, 그들의 천연한 얼굴 표정에 안심이 되거니와, 그들의 손놀림에서 얼핏 희망 같은 것도 엿보인다. 자활을 꿈꾸며 그들이 일해서 번 돈은 따로 통장을 두어 스스로 관리하게 한다.
마당을 가로질러 맞은편 건물로 들어서자니 얼굴 선이 또렷한 청년 하나가 스님 앞으로 달려나와 제게 오늘 일어난 큰일 하나를 고한다.
스님 , 나 오늘 면도하다가 여기 이렇게 했어요. 그리고 목을 내밀어 아직 핏기가 밴 상처 부위를 보인다.
이런 관계가 가능하게 되려면 시설장의 수용 인원은 이삼백을 넘지는 않아야 한다고 그는 생각한다. 대형화되면 관리인으로서는 수용자의 개인적인 형편을 파악하고 그와 사람다운 관계를 유지할 힘이 약해져 비인간화될 수밖에 없겠기 때문이다. 시로부터 지원받는 것은 최저 생계비에 준하는 것이어서 지금 현재 천 명이 훨씬 넘는 후원자의 수효를 더 늘리고, \"자비의 손길\" 등 공연물을 기획하여 수익금을 마련할 길을 찾아보는 일도 그가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그 일이 벅찬 것은 안중에 없고, 해야 할 일이 태산같이 많게만 여겨진다. 그래서 힘있고 관심 있을 동안 더 나은 방향으로 일을 끌고 가고 싶기만 하다. 복지원만 해도 입주 기준에 걸려 보호 밖으로 내팽겨쳐진 사람이 숱한 것이 그의 마음을 바쁘게 한다. 그 일은 그로서는 국가에게만 책임을 맡길 것이 아니라, 국민 전체가 나눠 떠맡아야 할 일로 여겨진다.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사람들은 거둘 수 있는 자체 시설 마련을 준비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는 복지원 일을 맡고 난 뒤로부터 도심 포교당의 역활에 대한 생각을 새롭게 가지게 되었다. 대부분의 도심 포교당이 그러하듯, 백일기도나 지장기도를 붙이고 전통적인 불교의 뜻을 전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운동으로 연계되는 적극적인 포교 활동을 펴는 곳이 되게 하리라 마음먹게 된 것이다.
복지원 일을 맡아 주어 나가는 것에 무리가 없어 보였던지, 시에서는 그 이듬해인 92년에 종합사회복지관 운영을 위탁해 왔다. 성불원에 가까이 대단위 주공아파트단지가 들어서면서 일정 가구 이상의 영세민 주거 단지 속에 의무적으로 마련된 복지관이었다.
이 곳에서는 스무 명쯤의 상근 직원들이 목욕탕, 이미용실, 어린이집, 독서실, 노인 대상무료 급식소, 노인 대학따위를 운영하면서, 컴퓨터 교실. 청소년 강좌, 주부 영어 교실. 서예교실 둥의 프로그램으로 한달에 천명쯤의 주민들과 만나고 있다.
복지관 안에 있는 어린이집말고도, 두 군데의 어린이집을 추가로 개원하여 지역 주민들에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는 나라안에서 승복을 입은 유일한 신용협동조합 이사장이기도 하다. 나라안에는 조계사, 신흥사 둥 절과 관계된 신협이 없지 않으나 모두 스님이 전면에 나서서 운영하고 있지는 않다. 모국이 독일인 신협은 우리나리에서는 1960년에 부산의 메리놀 병원에서 성가신용협동조합을 결성한 것이 그 효시가 된다. 원주는 지학순 주교의 주도로 시작된 밝음신협 등, 나라안에서 그 수효가 가장 많고 제일금융권보다 더 건실하게 운영되고 있는 곳이다. 불교의 뜻을 지속적으로 펴 나가려면 경제 활동의 뒷받침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현실 인식이 이런 지역적인 배경 속에서 자연스레 신협 운영에 대한 모색으로 이어졌을 터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여러 사람과 함께 조화로운 사회를 일구어 나가자는 신협의 뜻은 곧 불교 정신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일 년의 준비 과정을 거쳐 94년 2월에 개점을 보았다. 성불원 신도들을 중심으로 한 단체조합인 성불신협은 현재 조합원 수가 이천 명에 가깝게 되었거니와, 최근 들어 분소를 하나 내기도 했다.
성불원의 초창기에 그는 법회가 끝나면 봉고차로 일일이 신도들을 실어 날라 집으로 모셔서 도반들의 “비웃음”을 샀다. 그를 만나고자 하는 사람을 오게 하기보다는 스스로 찾아가는 것이 마음 편했던 것은, 보살이 해야 할 바란, 일을 만들고 살아가되 중생을 그 중심에 두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람을 마주하는 일에 진력나 하지 않음은 그가 표현한 디엔에이의 요소, 곧 타고난 성정으로 볼 수밖에 없을 듯하다. 그럴 뿐만이 아니라, 생각이 저마다 다른 사람들의 다툼이 있는 곳에서는 양쪽의 이야기를 통합하고 조정하는 중간자의 역할을 즐겨 맡는다.
불교 전반에 걸친 문제점들을 인식하는 그의 시각은 십 년 세월을 현장에서 맨발로 띈 사람답게 현장 중심적이고, 기본 해법은 관리의 정점에 있는 층으로부터의 하향 전달식이 아닌 상향 전달식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정부나 국가가 국민을 끌어가는 식이기보다는 뒤에서 뒷받침을 잘 해 주는 식이어야 몸의 아랫면을 이루는 것들이 튼튼해질 수 있다는 논리이다. 법률과 제도로써만 다스리기에는 그에게 세상은 지나치게 다양한 살아 있는 생물이다. 여유가 있고 포용적이어서 오히려 실아 있던 지난 날의 불교와는 달리 , 현대식 교육을 받은 사람들의 합리적이고 분석적인 사고의 틀은 공허하거나 “변방”에 있는 자들을 지나치게 엄히 내몰아 설자리를 잃게 만들고 있다고 그는 생각한다.
태양은 제가 의도한 바는 아니나, 봄이 되면 구별없이 햇살을 내려쬐어 저마다 한결같이 꽃을 피우고 잎을 피운다. “수능 시험에서 좋은 점수는 받지는 못했더라도”, 저마다 가지고 있는 특정들을 극대화시키게 함으로써 함께 어울려 불국토를 장엄해야 한다고 그는 생각한다.
어떤 곳의 몸이 지나치게 살찌워져서 제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을 때 , 폼을 살찌운 자가 보여 준, 아무나 쉽게 흉내낼 수 없었던 신기神氣는 인정해 주려 한다. 그의 거친 행적 뒤에서 몸을 던져 보살 정신으로 산사람까지 매도된 일은 없는지도 따뜻이 바라보려 한다.
월정사로 출가하여 해인사 강원을 거쳐 동국대 승가학과를 졸업한 그는 일찍부터 대불련의 지도 법사 노릇을 하거나 불교 학생 단체를 창립시킨 이력도 있거니와, 불교뿐 아닌 갖가지 사회 현실의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은 역사적이고도 사회과학적이다.
그의 말은 절이라는 특수 집단에서만 알아듣는 것이기보다는, 일반사람들이 알아듣기 쉬운 것으로 이루어져 있어 듣기에 편하고도 친근하다.
그런 밑바탕으로 그는 불교의 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사회를 만들어 감에 있어서 지분을 확보하는 일에 몸을 아끼지 않는다. 예컨대, 날마다 원주와 서울을 오가며 심야 생방송 르로그램인 “살며 생각하며”를 두 해 동안 열정적으로 진행한 일이나, 선거 관리 위원 및 투표 관리 위원장, 원주 시사示史 편찬위원 등의 제도권 일에서부터 공선협 , 환경운동연합 등 진보 성향의 단체에 이르기까지 두루 참여한다. 불교란 산중에서 별개의 세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속에서 역동적인 역할을 해내고 있는 것임을 몸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참선하는 스님으로서는 첫철 득력이 평생을 좌우하게 되듯이 , 초발심을 낸 신도들은 초기에 심지를 굳혀 주어야 흔들림이 없을 터였다. “천만 불자”란 양심에 비추어 부끄러운 것이니. 그 책임이 온전히 그 일에 태만했던 스님들에게 있다고 자신의 종아리를 걷는다. 이층에 이어 성불원을 삼층으로 지어 올려 이 곳을 연중 이어지는 교육장으로 삼으려는 것도 그런 다급하고 절실한 이유 때문이다. 책을 읽어 머리로 깨친 사람은 많으나 실수實修가 부족하니 절이나 독경, 주력도 시켜야 할 터였다.
지내 온 행장이 장하고 펼쳐 보이는 앞길도 미더워 보여 , 첫철 득력은 언제 어디서 하셨는지 여쭈었더니 자신은 수좌도 아니니 득력이란 당치 않다고 했다. 첫 주지 소임지연 영월의 보덕사 시절을 끝내고, 외국에 나가 때늦으나마 교학에 힘써 볼까, 산으로 들어가 수행을 할까, 아니면 중생 속으로 다시금 자신을 던질까 고민하다가 선택한 길이었다. 그러나 이즈막에는 작은 자신감이 생겨 하는 일에 갈등이 없을 만큼은 되었다 했다, 작위적으로 행동하지 않더라도, 제 입자가 두렷이 선 사람은 어디 가서 무슨 일을 벌여도 충분히 자신을 지킬 수가 있지 않겠는가. 그런 속에서 불교의 위력을 보여줘야 되지 않겠는가 싶다고 했다. 그러고 크게 한바탕 웃는 바람에 스님이 이미 그 경지에 다다랐다는 뜻인지 아닌지를 놓치고 만다.
영동고속도로 원주 인터체인지를 접어들기도 전에 실해진 빗줄기가 갈 길을 곱절로 늘여 놓는다. 원주는 태백의 험한 산 기운이 잦아지고 강의 기운이 힘을 얻는 어름에 있는 곳이다. 속향이 강원도이기도 한 현각스님은 강원과 동국대 시절을 빼고는 강원도를 벗어나 산 적이 없다.
이 땅의 등뼈를 이루는 산의 강건한 기운을 은연중에 그는 얻었을 터였고, 그 산에서 발원되어 동해와 서해 바다로 흘러가면서 땅을 적시는 강물 소리 듣고 자랐을 터였다.
이 땅을 불국토로 만드는 데 이 한 몸 다 던지리라. 그의 원력은 산과 같이 강건하고, 끝내는 바다에 이를 물결처럼 쉼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