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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밑에 해 보는 몇 가지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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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이야기 - 신경숙 1998년 01월 191호
인영이
이른 오전에 초인종이 울려 누구냐고 물으니 퀵서비스에서 왔다고 했다. 퀵서비스? 매무새를 여미고 문을 열어보니 헬멧을 쓴 청년이 서 있다. 건네주는 봉투를 받아 안으로 들어와 살펴보니 카드 한 장과 손수 노란 한지를 붙여서 만든 작은 상자가 나왔다. 그 때까지도 나는 그게 내게 전달된 선물인 것을 모르고 약간은 의아한 마음이었다. 상자 입구에 단정하게 붙여져 있는 메모 한 장.

“모과 차예요. 삭혔다가 한 달 뒤에 드세요 커피보다 몸에 좋을 거예요!”
-인영-

인영? 아아
나는 인영의 얼굴을 한번도 본 적이 없다. 우련 가끔 전화 통화를 했을 뿐이다. 이를테면 인영은 내가 쓴 소설을 읽은 독자인 셈이다. 이따금 인영처럼 내게 전화를 걸어오는 사람들이 있다. 책을 읽고 있다가 읽은 뒤 그들의 소감을 내게 말하면 나는 수화기 이편에서 듣는다. 그렇게 전화를 걸어 온 그들과 내가 직접 만나본 적은 없다. 우린 수화기 이편과 저편에 존재할 뿐, 서너 번 또는 대여섯 번의 통화로 이어질 때도 있지만 대부분 한두 번의 통화를 끝으로 그들은 또 어디 이 우주의 어디론 가로 사라져 간다. 내가 인영의 이름을 기억하는 건 인영이 언제나 전화를 걸어서 저, 인영이에요--- 라고 꼬박꼬박 이름을 밝히는 탓도 있겠고, 언제부턴가 그녀가 일요일에 전화를 걸어오는 탓도 있다. 혼자 보내는 일요일은 늘 얼마간의 고독이 지리하고 있다. 그녀가 일요일 오후, 또는 일요일 밤의 적요를 뚫고 내게 전화를 걸어 저, 인영이에요, 라고 말을 걸어 온 게 상당히 오래 되었다. 난 일요일엔 거의 외출을 하지 않는 편이고, 그러니 인영과의 전화는 거의 연결이 되었던 것 같다.
상자를 열어 보니 안에 유리병이 들어있다. 병이 흔들리지 말도록 빈 지리에 얌전하게 신문을 접어 끼어 넣었다. 유리병을 꺼내 보니 잘게잘게 썰어 재 놓은 모과가 노랗게 밀봉되어 있다. 아마도 모과 차를 담그다가 내 생각이 났던 게지. 유리병을 다시 상자 안에 넣고 개봉했던 자리를 다시 테이프로 봉해 카드와 함께 탁자 위에 올려놓는데 인영의 마음이 내 어딘가를 따뜻하게 감싸온다. 그녀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느껴진다. 오며 가며 탁자 위에 놓여져 있는 이 모과 차를 볼 적마다 나는 행복 할 것이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스며드는 자책. 나는 이런 정성을 타인에게 베풀어 본 지가 언제지? 이렇게 남을 사랑해 본 지가?

아버지
지난 늦가을부터 시골에 전화를 넣어 아버지와 통화를 하고 나면 늘 마음이 개운치 않았다. 십여 년부터 끌어안고 사는 지병을 두고 삼 년 전부터 아버지는 다른 병을 하나 더 얻었다. 퇴행성관절염. 지난 가을부터는 다리 아픈 것이 최악인 모양이었다. 걸을 수조차 없다 하셨다. 수술을 빼고는 이런저런 조처를 취해 봐도 상태는 나아지지가 않았다. 대체로 말수가 없으신 분이지만 점점 더 말을 잃어 갔다. 수화기 저 끝에서 매사가 다 귀찮은 듯 한없이 저 아래로 잦아드는 목소리, 그래도 뭐라고 뭐라고 말을 붙이면 결국 끌려 올라오는 탄식.
“이렇게 살아서 뭣하나 싶어야.”
듣고 있는 사람도 맥이 탁 빠진다. 처음 부친에게서 그런 말을 들었을 땐 암전이 된 것처럼 마음이 캄캄해지고 슬퍼지더니 언제부턴가 은근히 대들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렇게 말씀하시면 우리보고 어쩌란 말인가요! 부친으로부터 이렇게 살아서 뭣하나 싶다는 말을 듣는 좌절 속엔 진정으로 부친의 괴로움을 염려하는 마음만 있는 건 아니다. 그래도 부친인데 아무리 아프셔도 어떻게 그렇게 말씀하시나, 싶은 이기심이 끼어 있다. 그래서 이런 말이 나오는 것일 것이다.
“아버지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도 아무 일도 하고 싶지 않아요. 아버지께서 병을 이기겠다는 마음이 없는데 병원엔 가서 뭣하나 그런 생각이 든 다구요”
결국 그렇게 피해 오던 수술을 실행해 볼까, 날짜까지 받아 놨는데 또 제동이 걸렸다. 십여 년째 들고 계시는 약의 성분 속에 출혈과 관계되는 것이 있어 수술이 어렵다는 것. 수술이 어려워진 부친은 둘째 오빠와 함께 일 주일간 숙식을 함께 하며 물리치료소에 다녀왔다. 그 곳에서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돌아오자마자 아버지는 어머니 앞에서 큰 소리를 내어 우셨다고 했다. 어머니께서 그러신다.
“세상에 얼마나 힘이 드셨으면 날 보자마자 마구 우시더라. 느희 아버지가 엄살부리는 줄 아는 모양이다 만 느희 아버지 내 앞에서 소리내어 우는 거 난 첨 본다!”
병이 났으면 그 병은 육체의 병이지 마음의 병은 아니다, 고 한다. 성한 다리가 절룩거리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다리에 생긴 고장이지 마음에 생긴 고장은 아니라고, 그걸 알고 있으면 온전한 것이라고, 은연중 나 또한 부친에게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부친이 어머니 앞에서 소리내어 우셨다는 말을 전해 듣고 나니 그 말 또한 얼마나 이기적인 말이었는가 싶다. 앓아보지 않고 앓는 사람의 고통을 어떻게 다 알겠는가 젊은 나이의 청년도 아니고 이제 병을 친구 삼아 여생을 보내게 될 분에게 병은 육체의 병이지 마음의 병은 아니다, 라고 강변할 수는 없는 것인데, 부친은 지금 물리치료소에서 익힌 대로 어머니의 부축을 받아 걸음마를 처음 배우는 아이처럼 아주 조금씩 고향의 뒷산을 보행하고 있다. 산책이 아니라 치료보행이므로 한번 걷고 오면 이마며 등에 진땀이 배겨 옷이 축축해 질 정도라고 한다. 힘든 보행을 하시며, 젖은 옷을 벗어내며 부친은 무슨 생각을 하실 까. 그분의 마음을 다 헤아릴 순 없지만 이 겨울 진땀을 식히며 부친은 다른 정상적인 사람들보다 더 당신의 영혼 가까이 가고 있을 것이다.

갇혀있는 사람들
아침 신문에 전직 대통령들의 사면복권이 크게 실렸다. 기사를 따라 읽으면서 그럴 수밖에 없겠지, 하면서도 다른 생각이 한편 자리잡는다. 이 년 전, 장편소설 「외딴 방」을 세상에 내 놓은 직후에 감옥의 황석영 선생으로부터 봉함엽서를 받았다. 「외딴 방j에 대한 독후감이었다. 감옥에서 내 소설을 읽으셨으려니 생각하니 숙연한 생각이 들였다. 거기다 독후감까지 보내 주시다니. 짧은 독후감이긴 했지만 그분의 문학에 대한 열정이 얼마만한지가 느껴졌다. 하루 빨리 자유로운 몸으로 창작생활에 임하고 싶은 간절함도 함께. 몇 년 전 선배들과 함께 면회를 간 자리에서 나는 그분을 딱 한번 보았다. 그저 선배의 뒷전에 가만히 앉아 있다가 온 게 전부였지만 이후 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나도 함께 자유롭지 못함을 느낀다. 누군가 갇혀 있다는 건 심리적인 억압을 주는 것이다. 그는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니고 부정한 돈을 사과상자에 담아 창고에 쌓아 두었던 사람도 아니다. 문학에 대한 열혈과 상상력과 행동이 자유로운 큰 작가였을 뿐. 상황에 의해 그의 행동을 응징해야 했다고 해도 그의 자유를 몇 년 동안 감금시켜 그로 하여금 새 작품을 내놓지 못하는 고통을 준 것으로 되었지 않을까. 분단 상태의 나라 상황도 있겠지만 황석영 같은 작가를 감옥에 둔 채 세월을 보내는 일은 단순히 황석영만의 불행은 아니다. 몇 년 동안 감옥에 있느라 중단된 그의 창작세계는 그저 개인의 일이 아닌 것이다. 그의 창작은 곧 우리의 문화와 연결된다. 법 나름의 사정이 있겠지만 이 정도면 넘친다는 게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다. 새해가 오면 9시 뉴스에 등장할 대통령의 얼굴이 바뀐다. 새 대통령은 문화에 대한 인식이 전직 대통령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높다고 해서 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문화계 전반이 그에 대한 희망의 기대를 가지고 있다. 국고가 바닥이 난 힘겨운 시기에 대통령이 되어 밤잠 제대로 잘 날도 없어 보이지만. 구속 문인이 있는 나라도 얼마나 수치스러운 나라인지를 헤아려 새해에는 황석영, 박노해 같은 구속 문인들이 새로운 창작생활을 할 수 있는 전환의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