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디밭 방아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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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동화 - 김명수
1992년 09월 127호
밤새 부슬부슬 내리던 비가 아침이 되자 활짝 개었습니다. 서민들이 모여 사는 대단위 아파트 앞마당에 무궁화 잎이 파랗게 윤이 났습니다.
한나는 삼층 자기 집 창밖으로 아파트 앞마당을 내려다봅니다. 아파트 마당에는 놀이터가 있습니다. 그 옆에는 넓다란 잔디밭도 잇습니다.
오늘은 일요일, 아이들이 일찌감치 놀이터에 나왔습니다. 국민학교 아이들에겐 미끄럼틀 놀이가 재미있습니다. 미끄럼틀은 간밤에 내린 비로 녹이 묻었습니다. 아이들은 녹이 묻은 미끄럼틀도 아랑곳하지 않고 주르르 주르르 미끄러져 내립니다. 아이들이 입고 있는 반바지와 치마에 붉은 녹물이 묻었습니다.
그네 아래에는 물이 고여 있어서 아이들이 그네를 타지 못합니다.
한나는 다른 때 같으면 벌써 아이들과 어울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나는 창문에 턱을 괴고 밖을 내다볼 뿐 미끄럼도 타기 싫고 그네도 탈 마음이 없었습니다.
땡 땡, 아파트 안에 있는 교회에서 종소리가 들립니다. 한나는 벽에 걸린 시계를 봅니다. 벌써 열 시가 지났습니다. 한나가 오늘따라 우울한 것은 아버지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십 년이 넘도록 무사고로 일하시던 개인택시 기사 입니다. 그런데 닷새 전 사고를 내셨습니다. 아니, 사고를 내신 게 아니라 사고를 당하셨습니다.
아버지는 닷새 전 저녁 무렵, 손님을 태우고 영동대교를 건너섰습니다. 그 때 옆에서 달려오던 화물트럭이 아버지가 운전하던 개인택시를 들이받았습니다. 아버지는 급하게 운전대를 돌리다가 옆에 있던 승용차와 충돌했습니다. 그 바람에 아버지는 얼굴을 다치셨고 왼쪽 다리도 부러지셨습니다.
엄마는 아침 일찍 병원에 가셨습니다. 아버지 문병을 가신 것입니다. 한나도 그저께 엄마를 따라 병원에 간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얼굴을 다섯 바늘이나 꿰매셨고 왼쪽 다리에는 기브스를 하고 계셨습니다.
“한나 왔구나!”
한나가 쪼르르 침대 곁으로 다가오자 아버지는 아픔을 참느라고 찡그리던 얼굴도 얼른 펴고 환하게 웃으셨습니다. 그러고 침대에 누워서 한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습니다.
한나는 그것이 마음 아팠습니다. 아빠가 아픈 것도 참고 한나를 보고 웃으셨지만 아빠는 부러진 다리가 무척 아프실 것입니다.
“주민 여러분! 관리사무소에서 알려 드립니다. 오늘 오후에 사십이동 앞 잔디밭에 진딧물을 잡기 위해 농약을 뿌립니다. 주민 여러분께서는 장독대를 덮고 유리창을 닫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알려 드립니다. 오늘 오후에...”
아파트 잔디밭에 세워진 스피커에서 안내 방송이 들렸습니다.
“딩동, 딩동”
안내 방송이 막 끝났을 때 한나네 집 초인종이 울렸습니다. 한나는 엄마가 오신 줄 알고 발딱 일어나 현관문을 열었습니다. 현관문 밖에는 정희가 보였습니다. 정희는 307호에 사는 한나 친구입니다.
“한나야, 놀자!”
정희가 웃으며 손을 내밀었습니다.
“나 혼자 집 봐야 돼!”
한나가 정희에게 말했습니다.
“열쇠 우리 집에 맡기고 놀자!”
정희는 자꾸 졸랐습니다. 그때 다시 또 안내 방송이 들렸습니다.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알려 드립니다. 오늘 오후에 잔디밭에 농약을......”
한나는 열쇠를 찾았습니다. 오후에 잔디밭에 농약을 치면 놀이터에 나가서 놀지도 못합니다. 한나는 아빠 생각을 잊었습니다. 정희와 나가서 그네를 타고 싶었습니다.
한나는 열쇠를 앞집 정희네 집에 맡겼습니다.
“엄마 병원에서 아직 안 오셨니?”
정희 엄마는 한나가 열쇠를 맡기자 물었습니다.
“네에.”
한나가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엄마 오시면 내가 열쇠 드릴께. 오후에는 놀지도 못하겠구나. 어서 정희랑 놀다 오너라!”
정희 엄마가 미소를 지었습니다.
한나는 정희와 함께 계단을 내려와 집 밖으로 나왔습니다. 한나가 바라보니 아파트 마당에 아빠가 택시를 세우던 곳이 비어 있었습니다. 한나는 정희와 손을 잡고 깡총깡총 뛰어 놀이터로 갔습니다.
한나가 집에서 내다볼 때 놀던 아이들이 아직 놀이터에 있었습니다. 한나와 정희는 미끄럼틀로 달려가서 주르르 미끄럼을 탔습니다. 미끄럼틀이 이제 하얗게 녹이 벗겨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나와 정희는 그네로 다가가 그네도 탔습니다. 아직 그네줄 아래에는 물이 고여 있었지만 한나가 조심스레 그네줄을 당겨와 그 위에 앉고 정희가 뒤에서 밀었습니다.
“한나야, 메뚜기 봐라!”
정희가 한나 혼자 그네를 타게 한 뒤 잔디밭으로 가더니 방아깨비 한 마리를 잡았습니다.
한나는 그네에서 내려 정희한테 쪼르르 뛰어갔습니다.
“얘, 이거 방아깨비다!”
한나가 손뼉을 치며 소리쳤습니다. 방아깨비는 아주 컸습니다. 몸빛이 파랬고 뒷다리가 길었습니다.
정희가 방아깨비 뒷다리 끝을 쥐니 방아깨비가 디딜방아처럼 끄덕끄덕 움직였습니다.
“와! 너 이거 어떻게 잡았니?”
한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방아깨비 더듬이를 건드렸습니다.
“뭐니? 뭘 잡았어?”
놀이터에 놀던 사내아이들이 우르르 달려왔습니다. 사내아이들이 정희가 들고 있는 방아깨비를 뺏으려고 했습니다. 정희는 방아깨비를 사내아이들에게 뺏기지 않으려고 두 손으로 움켜쥐고 집쪽으로 도망쳤습니다.
“따라오지마, 얘!”
한나도 정희와 함께 도망치며 소리쳤습니다.
“아악!”
앞서 가던 정희가 잔디밭에서 넘어졌습니다. 정희는 얼굴을 찡그리고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한나가 놀라 멈춰섰고 아이들이 그 자리에 빙 둘러섰습니다.
“방아깨비 어딨어?”
사내아이들이 두리번거렸습니다. 한나가 다가가 정희를 부축해 일으켜 세웠습니다. 정희 손에 방아깨비가 없었습니다.
“메뚜기 어딨어?”
“없잖아!”
“너희들 메뚜기 안 잡았지, 그치?”
사내아이들이 소리쳤습니다.
“얘들은! 얘가 쓰러졌는데 메뚜기만 찾니? 그래 메뚜기 안 잡았다 얘!”
한나가 사내아이들을 향해 눈을 흘겼습니다.
“정희야, 너 방아깨비 어떻게 했어?”
사내아이들이 사방을 두리번거리다가 사라지자 무릎을 털고 일어선 정희에게 한나가 물었습니다.
“몰라! 넘어질 때 도망갔나 봐!”
정희도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며 방아깨비를 찾았습니다. 방아깨비는 옆에 있는 나무 사이로 숨었는지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만치서 한나 엄마가 오고 있었습니다.
“엄마!”
한나가 엄마한테 뛰어갔습니다.
“밖에 나와 노는구나! 엄만 병원 갔다가 정비공장에 들렀다. 아빠 차 다 고쳤는지 보러 갔다 왔다. 들어가자!”
엄마가 한나 손을 잡고 삼층으로 올라갔습니다. 정희도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오후가 되자 아파트 단지 내 농약 냄새가 풍겼습니다. 오전에 관리사무소에서 방송했던 대로 한나네 집앞 잔디밭에 농약을 치나 봅니다. 한나네도 정희네도 유리창 문을 닫았습니다. 베란다에 열어 놓은 장독 뚜껑도 덮었습니다.
한나는 오후 내내 텔레비전을 보았습니다.
삼일 후 아버지가 다리 수술을 했습니다. 기브스 한 다리가 갑자기 더 부어 올라서 다시 엑스레이를 찍어보니 덧났습니다. 부러진 뼈가 살을 건드려 곪았다고 했습니다.
병원에 갔다가 돌아왔습니다. 엄마는 차 안에서 자꾸만 우셨습니다. 한나도 따라 울었습니다. 건강하시던 아빠가 병원에 누워 다리를 수술하고 하얀 붕대로 칭칭 감아 앓고 계신 모습이 자꾸만 되살아났습니다.
한나 큰아버지와 같이 살고 계시는 한나네 할머니가 오늘은 병원에서 간호를 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한나 엄마와 한나가 집으로 온 것입니다.
병원에서 돌아오니 한나네 집 뒤 잔디밭에서 잔디를 깎고 있습니다.
“부르릉 부르릉” 기계소리를 내며 잔디깎는 기계가 움직이고 관리사무소 아저씨가 잔디 기계를 밀었습니다. 잔디밭에 향긋한 풀 냄새가 났습니다.
잔디깎는 아저씨는 땀을 흘리셨습니다. 아이들은 잔디 깎는 아저씨가 땀을 흘리며 잔디를 깎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잔디 깎는 모습이 재미있는지 다 깎은 잔디밭에 나와 딩굴었습니다.
한나는 갑자기 메뚜기 생각이 났습니다. 아니, 그 방아깨비 생각이 났습니다. 지난번 농약을 칠 때 방아깨비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했습니다.
한나는 지난번 농약을 칠 때, 농약 냄새 때문에 방아깨비 생각을 까마득히 잊었던 게 미안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잔디를 깎으니 그 방아깨비 생각이 다시 난 것입니다.
아니, 한나가 방아깨비 생각을 다시 한 것은 아버지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한나는 혹시 오늘 잔디를 깎을 때 방아깨비가 다리를 다쳤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가 다리를 다쳐서 누워 계시니 방아깨비 생각이 떠올랐던 것입니다.
“엄마! 나 밖에서 놀다 갈께요!” 한나가 현관 입구에서 엄마한테 말했습니다.
“아버지 수술도 하셨는데 얼른 놀다 들어오너라!”
엄마가 한나를 돌아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나는 엄마와 헤어져서 잔디밭으로 갔습니다. 이제 잔디를 거의 다 깎았는지 잔디 깎는 아저씨가 전깃줄을 감았습니다.
한나는 잔디밭을 차근차근 살폈습니다.
놀이터 앞도 살피고 무궁화 나무 뒤에도 살폈습니다. 방아깨비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지난번 농약을 칠 때 독한 농약에 죽었나? 아니면 오늘 잔디 깎는 기계에 눌려 죽었나?’
한나는 자꾸만 조바심이 나서 손에 땀이 났습니다. 제발 방아깨비가 살아 있으면 싶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무엇이 눈앞에서 풀썩 뛰었습니다. 한나는 얼른 그것을 쫓아갔습니다. 그러자 그것이 다시 풀썩 뛰었습니다. 한나는 얼른 가서 눈앞에 움크린 그것을 보았습니다.
“찾았다. 방아깨비다!”
한나는 “후휴” 한숨을 쉬었습니다. 그러자 한나 가슴이 콩콩 뛰었습니다. 한나는 살그머니 다가가 손으로 덥썩 덮었습니다. 손바닥 안에서 방아깨비가 움직였습니다.
“잡았다!”
한나 이마에서 땀이 솟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정희가 잡았던 그 방아깨비였습니다. 한나는 살그머니 손을 펴 다른 손으로 방아깨비 다리를 붙잡았습니다. 방아깨비는 한나가 뒷다리를 붙잡자 뒷다리를 쭉 뻗었습니다. 그러고는 더듬이를 움적이더니 덜컹덜컹 방아를 찧었습니다.
한나는 조심조심 두 손으로 그 방아깨비를 감쌌습니다. 그러고는 아파트 뒷문을 빠져나와 아파트 뒤에 있는 빈터로 갔습니다.
빈터에는 구룡산 약수터로 가는 길이 보였습니다. 한나는 약수터로 가는 길로 접어들어 한참을 갔습니다. 아파트 사람들이 흰 물통을 들고 약수물을 뜨러 가고 있었습니다.
한나는 약수터를 조금 못미쳐 구룡산 산밑으로 다가갔습니다. 산밑에는 들풀이 우거져 있었습니다. 빨간 산딸기도 익어 있었습니다.
“자, 여기서 살아라! 여기는 농약도 안 칠거고 잔디 깎는 기계도 없단다!”
한나는 조심조심 움켜쥔 방아깨비를 구룡산 풀밭에 내려놓았습니다.
방아깨비는 구룡산 풀밭에서 잠시 동안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풀썩 뒷다리를 쳐들더니 힘차게 날았습니다.
구룡산 언덕 위의 흰구름이 한나를 보고 미소를 지었습니다.